자신의 승산을 과대평가할 경우 전통적인 노동시장에 속한 사람들 중 자신의 생산적인 직업을 포기하고 승자독식시장에 뛰어드는 사람의 숫자가 더욱 늘어날 것이다. 일반적인 비용편익분석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자신의 성공률을 정확하게 평가할 때조차도 사람들은 무모할 정도로 많이 승자독식시장에 뛰어든다...경쟁자가 한 명 늘어날 때마다 이미 경쟁에 뛰어든 사람들이 승리할 확률은 줄어든다. 이런 제로섬적인 측면 때문에 승자독식시장에 뛰어드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늘어나는 반면 전통적인 시장에서 생산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줄어든다.


                                                              ㅡ 로버트 프랭크 · 필립 쿡의 『승자독식사회』 중에서




재영의 예상과는 달리 동철의 옆에 한 명의 여자 연예인이 앉아 있었다. 술 때문인지 발그레한 볼과 짙은 마스카라 아래서 더욱 또렷한 눈동자가 주변의 빛이란 빛은 모조리 흡수해 홀로 빛나고 있는 듯했다. 손바닥만 한 얼굴에 뚜렷한 이목구비, 길고 날렵한 목선, 탄력이 느껴지는 피부와 풍성한 머리 결이 재영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 시대가 낳은 최고의 미녀이자 삼척동자라 해도 한 눈에 알 수 있는 단 한 명의 슈퍼스타.



‘유리다!’



동철이 말한 연예인이 TV나 뮤직비디오에서나 볼 수 있는 동방국의 톱스타 유리였다. 재영은 연예인을 극도로 멀리 했지만 유리는 차원이 다른 미모의 소유자였다. 재영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도발적인 유리의 시선을 마주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빛이란 죽음의 늪으로 유혹하는 메두사의 눈빛처럼 일단 걸려들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치명적 마력을 지닌 듯했다. 재영은 그 도발적인 시선 하나에 숨이 턱 막혔다. 동철이 반갑게 맞이했지만 재영은 주춤거렸다.



“어서 오십시오, 재영씨. 정말 총알같이 오셨네요? 반갑습니다.”



동철은 재영의 반응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녀 앞에 서면 어떤 남자(일반인은 물론 동료 연예인까지)라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지만, 유독 쩔쩔매는 재영의 행동은 마치 수줍음을 타는 어느 산골 소년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예상대로였다.



“네? 네, 네. 어, 어느 쪽에 앉을까요?”

‘어느 쪽에 앉을까요? 이런 멍청한 말이 어딨어?’



재영은 말을 더듬는 것도 모자라 어이없는 질문까지 한 자신이 너무나 창피했다. 마치 속마음을 들킨 듯 재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헌데 주책없이 뛰는 심장의 반응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크크. 재영씨의 이런 모습이 좋다니까! 이왕이면 유리 앞에 앉으시죠?”

“예쁜 것은 알아서. 지영이와 현아까지 있었으면 기절했겠네?”



동철이 재영에게 자리를 권하는 중에 유리가 독백하듯 중얼거렸다. 그녀는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영의 귀에는 천둥처럼 들렸다. 유리의 말은 자신을 향한 의도적인 말이었음에도 재영은 심장의 두근거림을 제어하기 힘들었다. 아직 뇌는 그것이 어떤 감정에서 비롯된 것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정보를 전달하는 신경세포는 생각보다 느리다. 숱한 반복을 통해 정보가 뇌에 각인된 기억이 되지 않는 한 신경세포인 뉴런에 특정한 반응을 일으키는 속도란 일반의 예상만큼 빠르지 않다. 유리의 말에 당황스러워 하는 재영의 반응은 신경학적으로 이런 경험이 전무한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전형적인 반응에 속한다.



“네? 아, 아! 예, 예.”

“재영씨, 신경 쓰지 마십시오. 유리가 원래 그래요. 처음 보는 사람한테 항상 이런다니까요. 사실 화장 지우면 거기가 거기에요. 그나저나 유리 한 명밖에 잡아두지 못했어요. 실망하신 건 아니지요?”



동철도 유리의 농에 한 술 거든다. 재영은 동철의 말에 들어 있는 뉘앙스가 미묘했지만 동방국 최고 슈퍼스타의 농담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사람 간의 만남에서 순발력이 약한 재영은 이런 경험이 처음인지라 온갖 노력을 통해 발달시킨 뛰어난 감각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럴 리가 있나요? 실망이라니요?”

“뭐! 화장 지우면 거기가 거기라고? 같이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판에! 오빠 집에는 거울도 없어? 난 지금 봉사활동 하는 마음이야. 사람이 고마운 줄 알아야지. 어디 지영과 현아를 나와 비교해? 턱도 없지. 안 그래요, 기자님?”



동철의 질문에 답하는 것과 동시에 터진 유리의 말에 재영은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이어진 유리의 연타에 재영은 좀처럼 평정을 찾을 수 없었다. 유리는 그런 재영의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크크, 동철 오빠가 말한 그대로네. 그렇다면!’



유리는 자기 앞에서 당황한 채 앉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서있는, 180cm 전후의 키에 탄탄한 몸매와 강인하면서도 날렵한 턱 선이 살아 있는, 한편으로는 강직해 보이면서도 서글서글한 눈매가 매력적인 재영을 향해 다시 도발적으로 물었다.



“기자님 생각은 어떠냐고요? 지영과 현아가 감히 나와 비교가 되냐고요?”

“어.. 저로썬 뭐라고 말씀 드려야 할지? 거참, 허허.”



재영은 유리의 장난스런 말들에 도무지 적응할 수 없었다. 만나자마자 이렇게 몰아치는 경우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사람, 특히 모든 여성과의 만남에서 지독할 정도로 낯을 가리는 자신으로써는 그저 메마른 웃음이나 흘릴 밖에야 다른 방도가 있겠는가?



“야, 그렇게 강요하면 어떡해? 지영과 현아가 어때서? 솔직히 성별이 달라서 그렇지, 화장을 거둬낸 생얼로 치면 너와 나의 차이도.”

“많이 나! 그것도 측정 불가능할 정도로! 난, 내 미모를 숨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화장하는 거야! 안 그러면 나머지 여자 연예인들이 나 하나 때문에 다 죽어버리니까. 나도 엄청 힘들어. 타고난 미모를 숨긴다는 게 쉬운 줄 알아? 안 그래요, 잘 생긴 기자님? 누가 봐도 이거, 웃기는 상황 아니에요? 게다가 있어 달라고 애걸복걸 할 때는 언제고? 양심이 있다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사람이 저래요. 못 생긴 데다 마음까지 삐뚤어져서.. 하여간에 봉사활동 하는 마음이란 제 말, 잘 생긴 기자님은 이해하겠죠?”



동철에게 그랬던 것처럼 유리는 칭찬인지 욕인지 구별하기 힘든 말로 재영을 연속적으로 몰아붙였다. 유리의 연타석 공격은 마치 기관총이 프로펠러 사이로 총알을 빠르게 난사하는 것 같았다. 재영은 좀처럼 유리의 방식에 아직은 적응할 수 없었지만, 외모만 놓고 보면 솔직히 삼척동자라 해도 동철과 유리는 비교대상 자체가 아니었다.



“봉사활동 하시는 마음, 제가 잘 알지요.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유리씨.”



재영은 일단 유리가 쏟아낸 소나기는 피하고 보자는 투로 말했다. 둘이 악의 없이 다투는 모습이 일면 의도적인 것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확신할 수 없었기에 사정권 밖으로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에게 현 상황을 파악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터무니없이 부족했을 뿐더러, 도발적인 유리의 시선과 장난기 가득한 질문을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상황에서 소화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재영은 유리의 시선을 피하며 테이블을 둘러봤다. 테이블 위에 몇 개의 술잔과 젓가락, 접시 등이 더 놓여 있는 것으로 봐서 정말로 지영과 현아가 조금 전까지 이곳에 있었던 게 분명해 보였다. 둘은 유리와 함께 활동한 1세대 여성 아이돌 그룹의 대표 주자로써, 최근 들어 전 세계적으로 D-Pop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소녀시대와 2NE1, 카라, f(x) 등의 선조 격이었다. 비록 그들은 현재의 인기 면에서는 동방국 최고 스타로 우뚝 솟은 유리에게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여전히 여러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미의 여신들로 남아 있는 특급 스타였다.



‘조금 더 서둘러 왔으면 그들도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



재영이 그렇게 아쉬움을 달래며 유리의 시선을 피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동철이 유리의 말에 동의를 표한 자신의 말을 물고 늘어졌다.



“재영씨, 봉사활동 하는 마음이라니요? 이거 배반입니다, 배반! 재영씨마저 그러면 제가 뭐가 됩니까?”

“그거야.. 동철씨가 지영씨와 현아씨를 붙들지 못한 죄지요. 사실 저는 지영씨 팬이거든요. 아, 물론 유리씨를 빼놓고 말할 때 그렇다는 뜻이지만. 하하하..”



재영은 웃음으로 자신의 치명적인 말실수를 넘기려 했지만 가늘게 찢어지며 강렬한 빛을 발하는 유리의 시선에 숨이 턱 막혔다.



“음, 음. 꿀꺽!”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재영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까지 삼켰다. 뒤이어 딸꾹질이 나오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었지만.



“침은 왜 다신데? 남자들이란 나만 보면 저런다니까! 그리고 당연하죠. 나 빼면 걔들은 시체인데 어디 감히 저와 비교해요! 어림없지. 하여간에 이놈의 식을 줄 모르는 인기하고는! 피곤해, 피곤하다니까.”



자신에 대해 당연한 듯이 자화자찬을 늘어놓으며 유리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옆으로 쓸어 넘겼다.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던 매력적인 이마와 조명에서 나온 창백한 불빛에 부서지듯 물결치는 머리 결이 재영의 두 눈을 한껏 현란시켰다. 그녀는 단지 머를 뒤로 쓸어 넘겼을 뿐이다. 여기저기서 유리를 훔쳐보던 남자 손님들 입에서 일제히 탄성이 터져 나왔다. 비릿한 욕망들이 알코올을 타고 충혈된 홀 안을 넘나들었다.



“어이구, 저놈의 공주병하고는! 중증이야, 중증. 귀신은 뭐하나 몰라, 저거 잡아가지 않고?”

“귀신도 내 미모에 눌려 오지 못하는 거야!”

“허허, 그런가요? 하긴 귀신들이라 해도 유리씨 미모를 모를 리 없겠지요. 하하하.”



동철은 유리의 당연한 공주병에 여전히 투덜거렸지만 재영은 작은 동작 하나하나에도 넘쳐나는 유리의 치명적인 매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방국 연예계에는 너무나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미인들로 넘쳐나지만 양귀비나 서시, 클레오파트라 같은 경국지색의 수준에 오른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유리는 연예계를 통틀어도 몇 십 년 만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할 정도로 탁월한 자연 미인이자 불세출의 엔터테이너였다.



“앞으로도 저만한 가수가 나오겠어요? 제가 좀 독보적이죠. 뭐, 저도 인정하는 바이니까. 그건 그렇고, 제가 기자라면 질색하지만 동철 오빠가 하도 칭찬하기에 지금까지 기다렸어요. 기자님도 고마우시죠?”

“또 옆으로 샌다. 제발 정신 좀 차려!”

“됐다니까! 기자님, 좀 더 이쪽으로 앉으세요. 전 옆에서 보는 것보다 정면에서 보는 것이 더 아름다우니까. 언제 저를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보기나 하겠어요? 술자리는 또 어떻고?”

“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가문의 영광이 따로 없습니다. 동철씨, 고마워요. 천하의 유리씨를 뵐 수 있는 영광을 주셨으니.”



재영은 유리가 지시하는 대로 궁둥이를 옆으로 밀어가면서 동철에게 말을 돌렸다. 보석처럼 빛나는 눈동자를 마주하느니, 차라리 그녀의 시선을 회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녀의 탄력성을 따라가다간 자칫 실족하기 십상이었다.



“기본 옵션이지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하지 않습니까?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얼마든지 해 드릴 수 있습니다, 크크큭!”



동철 특유의 웃음. 여린 소리의 톤과 어우러져 묘한 수줍음이 묻어 있는, 진솔함과 겸손함이 매력이자 장점인 남자. 짧은 시간에 숱한 어록을 남긴 것으로 유명한 언어의 마술사이자 대한민국 연예계에서 다시 나오기 힘든 특이한 존재. 국민 토종 노총각의 아이콘.. 이런 것들이 재영의 뇌리를 스쳐갔다.



“헌데 기자님, 오빠에게 이상한 책들만 권한다면서요? 죽도록 즐기기? 너무 노골적이지 않아요? 저야 뭐, 관심도 없지만. 하여간에 남자들은 예쁜 것만 보면 맨 그 생각뿐이라니까! 그러니 완벽한 날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어휴, 끔찍해! 아까 침 다신 걸 보면, 기자님도 혹시?”

“야, 그만하지 못해! 모르면 가만있어. 그럼 중간이나 가지. 재영씨가 추천한 책은 그런 게 아니야.”



동철이 유리의 말을 막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어디로든 튀면 거의 끝까지 가고야 마는 유리의 말에 일일이 응대하는 것은 어리석으면서도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긴 제목만 보면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다. 하지만 제목 위에 있는 ‘성찰없는 미디어세대를 위한 기념비적 역작’이란 글귀만 보았어도 이런 식의 질문은 없었으리라.



‘허허, 이건 좀 지나쳐. 아무리 유리라고 해도..’



재영이 씨익 웃었다. 미미하지만, 입술의 끝이 어떤 비밀을 파헤쳤다는 듯한 선을 그렸다. 동철이 그 미세한 변화를 봤지만 유리는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아예 무시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또 다른 책이 뭐였지? 그래, 무슨 전환이라고 했잖아? 죽도록 즐기기와 전환, 둘을 합치면 단 하나의 결론만 나오잖아! 트랜스젠더와의 사랑. 그거 아니면 뭐야? 기자님, 제 말이 맞죠?”

“하하하하! 유리씨 정말 대단한 추리입니다! ‘죽도록 즐기기’와 ‘전환’이 만나면 당연히 트랜스젠더와의 사랑밖에 남지 않네요. 하하하하!”



재영은 유리의 연상 작용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녀의 논리는 단순하면서도 직선적이었지만, 너무 기발해 그 동안에 쌓였던 피로가 일순간에 날아가는 것 같았다. 조금은 서툴렀던, 유리에 대한 자신의 이른 판단이 오히려 미안하고 어리석게 다가왔다. 순수해도 이렇게 순수한 영혼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평소의 동철이라면 결코 그녀에게 두 권의 책에 대해 아무런 사전 정보도 주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찔할 정도로 현기증 나는 연상 작용의 자유로운 비약은 어느 누구에게서도 보지 못한 특별한 것이었다. 어쩌면 유리라는 슈퍼스타가 가진 재능의 일부가 이런 직설적인 당돌함에 있는 것이 아닌지, 그 투명한 말과 분방한 행동 속에 들어 있는 자유로운 영혼이 아닌지, 재영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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