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자유가 허용하는 한계를 넘어 이제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협'인 된 일베의 일탈과 폭력적 행태가 테러의 수준에 이르렀다. 일간베스트에 단원고 교복을 입고 오뎅을 먹으며 '친구 먹었다'는 사진을 올린 것은 고3일베의 폭발물테러가 결코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다. '관용의 역설'은 벌레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므로 박멸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아래의 사진들이 말해준다.
표현의 자유를 무한대로 넓혀주는데 악용되는 '관용의 역설'은 벌레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들의 반사회적 폭력을 막으려면 박멸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육체에 가해지는 테러보다 더 비열한 것이 영혼에게 가해지는 테러며, 그것도 사회적 약자와 억울하게 죽은 이들에게 가해지는 것은 테러 중에서도 최악의 테러며,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는 그런 성질의 것이다.
양아치·건달·깡패들은 무리지어 다닌다. 폭력이 범죄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무리지어 다니며 폭력에 따른 죄의식과 두려움을 최소화시킨다. 벨레들의 출몰을 말해주는 위의 사진들 속에서도 그들 특유의 표식을 드러내는 것으로 집단의식을 공유하는 것은 불변의 법칙이다. 짐승보다 못한 벌레로서의 동질감을 보여줌으로써 죄의식과 두려움을 희석시키고 양아치·건달·깡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초법적 무리를 이룬다.
나치 소속의 전위부대들이 '하이 히틀러'라고 외치며 손을 어깨보다 조금 높은 위치로 쭉 뻗는 특유의 제스처로 동질감을 표현했고, 일제 군국주의는 '덴노이까 반사이(천왕 만세)'를 외치며 사무라이식 충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동질감을 표현했다. 어디서든 혼자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벌레들의 의식은 나치와 일제 특유의 집단의식을 강조하고, 극단적 폭력과 테러를 조장하는 에너지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이런 표식을 통해 집단으로서의 세력을 과시하는 벌레들의 만행은 자신의 가족마저 비하와 테러의 대상으로 삼는 패륜적인 폭력도 서슴지 않도록 만든다. 이들은 자신이 벨레의 일원으로서 충분히 폭력적임을 공공연히 드러냄으로써 세력을 유지하고 행동반경을 넓히며, 그렇게 의식과 실천의 폭력화는 더욱 강렬해져 상상할 수도 없는 최악의 테러로 치닫기 일쑤다, 인식이 행동을 좌우하기 때문에.
바로 여기에 영상과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이 더해지면 패륜적이고 파렴치한 범죄가 빛의 속도로 시공간을 넘나들며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기술의 발전은 그것의 옳고 그름을 넘어 인류 발전의 필연의 과정이라고 해도, 영상과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을 악용하는 사례도 덩달아 폭증하기 마련이다(닐 포스트만의 《테크노폴리》를 참조). 양아치·건달·깡패처럼 현실에서의 무리지음이 불가능하다면 사이버 세상에서의 무리지음을 통해 폭력과 테러의 확대재생산을 위한 에너지를 충전한다.
무리지음이란 위에서 언급했듯, 양아치·건달·깡패처럼 폭력적이고 반인륜적인 폭력 범죄를 가능하게 만든다. 나치의 등장과 집권에 이어 인류 역사상 최악의 범죄들 저지를 수 있었던 것도, 인간의 본성에 자리잡은 노출증과 관음증을 정치적 선동으로 부추겨 집단적 폭력으로 유도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대중연설에 탁월한 재주를 지닌 히틀러와 그의 주위로 정치공학·철학·심리·병리학자, 광고·마케팅 전문가,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몰려든 것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지그문트 바우만의 《현대성과 홀로코스트》를 참조).
걷잡을 수 없는 기술의 발전은 우리 인간성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까지 파괴시킬지도 모른다. 기술은 도덕적 기반을 상실한 문화를 만들어낸다. 기술은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정신적 과정들과 사회적 관계들을 뿌리 채 흔들어놓는다.
닐 포스트만의 《테크노폴리》에서 가져온 위의 인용문은 벌레들의 패륜적이고 반인륜적인 폭력의 근원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인류의 인식보다 언제나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는 과학기술의 발전은 문명을 풍요롭게 만들고, 인류를 빈곤의 질곡에서 벗어나게 해주며, 권력과 자본의 행태에 투명성을 강요하고, 필자가 글을 올리는 블로그와 '아고라', '오늘의 유머', 페이스북과 트위터처럼 민주주의의 발전과 확대에도 도움을 준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발전은 '친구의 역할'을 넘어 '악마의 역할'로 변질될 수도 있다. 군사적인 기술력의 일방적 우위를 바탕으로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의 전쟁범죄가 바로 그러하며, TV조선과 채널A의 광기어린 종북몰이가 더욱 그러하며, 세월호참사의 최대 희생자인 단원고 학생들과 일제의 성노예로 꽃다운 청춘을 짓밟힌 위안부 할머니들을 욕보이는 벌레들의 파렴치하고 반인륜적인 폭력은 더더욱 그러하다.
우리 모두는 상대가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도 내놓을 수 있다고 말했던 볼테르가 될 수 없기에, 표현의 자유와 관용에도 한계를 정할 수밖에 없으며, 미 연방대법원의 역사적인 판결처럼 자유를 행사하는 것이 타인의 피해로 이어질 가능성이 명백하면서도 현존하는 위협일 때는 한계를 강제할 수밖에 없다. 벌레들의 일탈과 폭력은 표현의 자유도 관용의 대상도 아니다.
그들에게 법적이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처벌이 가해져야 함은 당연하고 필수불가결한 사회적 정의의 실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벌레들의 난장을 그대로 나두면 언젠가는 이들을 대표하는 정치인이 나올 수 있다. 그 정치인이 벌레 박멸의 적임자요, 거악에 맞선 정의의 수호자로 포장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물론 그들을 처벌한다고 해서 기술의 발전을 이용해 무리를 짖는 자들과 집단, 세력이 있다면 제2, 제3의 벌레들은 계속해서 나올 것이며, 상대적 약자를 향해 폭력을 남발할 것이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극우와 극좌의 준동만이 아니라, 그들이 사용하는 기술의 발전과 이를 악용한 광범위한 선전선동이다. 히틀러의 나치와 스탈린의 소비에트처럼 역사적 경험을 끊임없이 되돌아봐야 한다.
개처럼 버는 자는 개가 되듯이, 벌레처럼 사는 자는 벌레가 된다. 거듭해서 말하지만 해로운 벌레는 박멸하는 것이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벌레가 활동하는 서식지를 없애야 한다. 그들의 본거지를 폐쇄시켜야 할 이유는 넘치도록 많다. 그들이 세상을 활보하며 폭력을 남발하는 것을 표현의 자유로 넘어가는 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궤변이자 어불성설이며, 정부와 사회의 명백한 직무유기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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