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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죽지 않았다면



이 글은 두 가지 전제 하에 쓴 것입니다. 미국 연방정부와 CIA가 소련과 중국을 견제하는데 더 이상 박정희가 제 역할을 못하다는 평가를 내린 후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을 묵과(미국이 지시했다는 것은 객관적인 증거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확신하지는 못합니다)했다는 것과 1980년 말부터 시작된 경제위기가 1981~2년에 정점에 달했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개개인의 모든 선택의 순간마다 서로 다른 역사가 무한대로 펼쳐질 수 있다는 현대물리학의 역사총합이론(평행우주와 다중우주이론과는 조금 다르며,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할 수 있는 양자역학에서 도출된 이론)에 따르면 저의 상상이 현실로 이루어진 대한민국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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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과 미국의 현대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한 것이 두고두고 아쉽게 다가옵니다. 삶 자체가 배신과 행운의 연속이었던 박정희는 김재규의 저격 때문에 죽어서도 행운을 누리는 존재로 격상됐습니다. 박정희가 60대 이상에게 신화적 존재로 각인될 수 있었던 것도 김재규의 저격이 결정적이었습니다.





항일독립군 토벌이라는 최악의 친일부역의 소유자였던 박정희는 해방 이후 친형을 따라 남로당에 가입해 사회주의자로서 활동했습니다. 당시에는 자생적으로 탄생한 사회주의가 남한을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회주의자였던 박정희가 친일부역 경력을 세탁하는데 남로당 가입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미 군정 시절 군인으로 변신하는데 성공한 박정희는 이승만 정부 때 남로당 활동 경력이 발각돼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합니다. 이때 박정희는 남로당원이 아닌 사람까지 포함해 300명을 무차별적으로 고발(이들 중 상당수가 사형당했다)한 이후 간신히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만, 군대에서 강제로 쫓겨났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 덕분에 박정희는 기사회생을 합니다. A급 전법이었지만 일본 수상까지 오른 기시 노부스케 휘하에서 항일독립군 토벌을 주도했던 백선엽의 구명으로 박정희는 장교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전투경험이 있는 단 한 명의 장교도 절실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박정희를 살려준 자가 한국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군인으로 복귀한 박정희는 막상 한국전쟁에서 별다른 공적도 세우지 못했지만, 백선엽 밑에서 출세가도를 달리며 소장까지 승진했습니다. 권력욕의 화신인 그는 김종필의 도움을 받아 5.16군사쿠데타에 성공하기에 이릅니다. 수없이 많은 배신과 변신, 끊이지 않는 행운을 통해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박근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경제에 관해서는 백치에 가까웠습니다. 그가 얼마나 경제에 무지했는지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예가, 지나친 해외차입(총 148억달러로 세계 4위의 채무국으로 전락했다. 현재의 환율로 치면 수백조에 이른다)으로 국가부도 직전에 이르자 경제원리도 무시한 채 단행한 화폐개혁(지하경제양성화 포함)입니다.  



집권 초기의 실정(별도의 글로 다룰 생각)으로 국가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르자, 경제원리를 철저히 무시한 채 통치자금만 확보하려던 화폐개혁 때문에 거의 모든 기업들의 은행예금이 동결됨에 따라 기업활동이 전면 중단됐고, 예금자들과 은행들도 입출금이 불가능해 공황상태에 빠져들었고, 심지어는 사금융까지 전면 중단됐습니다. 한마디로 해서 한국경제가 고사될 뻔했습니다.



이에 이병철 등의 재벌오너들과 경제전문가들이 청와대를 방문해 만류(그 대가로 엄청난 통치자금을 제공해야 했고, 이병철은 전경련을 만들어 초대회장을 역임했다. 한국판 정경유착이 이때부터 본격화됐고, 화폐개혁은 33일만에 없던 일이 됐다)하지 않았다면, 전국적으로 민란이 일어나 압축성장의 ‘압’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때의 경험으로 박정희는 경제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그 덕분에 압축성장의 신화로 포장되는 행운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대신 노동자들은 최저생활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최악의 환경에서 저임금에 시달리게 됐고(전태일 열사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 재벌들은 떼돈을 벌었고, 외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새마을운동도 중화학공업에 투입할 값싼 노동력을 농촌으로부터 확보하기 위한 사전작업(연평균 50만명이 농촌에서 이탈했고 그 결과 도시빈곤층이 450만명까지 이르렀다. 70년대 서울에도 판자집이 많았다)으로, 기시 노부스케가 만주국을 지배하기 위해 만든 작품을 모방한 것입니다. 60대 이상의 노년층은 새마을운동을 통해 농촌이 근대화됐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는 농촌을 황폐화시키는 출발점이었습니다. 



자본주의는 언제나 농촌의 파괴를 전제로 하는데, 한국의 경우 중화학공업(대일청구권으로 받은 3억달러는 10년에 걸친 분할지불이었고, 차관 2억달러는 이자율이 무려 35%였다. 이때부터 한국경제는 일본경제에 예속되기 시작했고, 이는 미국의 강요가 크게 작용했다)과 수출 위주의 경제발전을 추구했기 때문에 농촌의 파괴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 심각한 편입니다. 



미시간주립대에서 개발한 종자를 들여와 일부 개선한 것에 불과한 통일벼도 저곡가정책 때문에 농민의 수입증대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새마을운동으로 포장된 박정희의 농촌근대화는 국고지원이 거의 없었기에 농민 자신의 돈과 농민 자신의 무상노동, 고율의 은행대출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농촌을 살린 것이 아니라, 농촌을 해체하고 죽여버린 사업이었습니다.





박정희의 최대치적으로 칭송받는 압축성장도 그 실체를 파고들면 허상으로 가득합니다. 박정희 집권기간의 경제성장률이 8.5%(9.1%라는 통계도 있다)였는데, 비슷한 시기의 독일(평균 12%), 일본(평균 15.1%), 대만(평균 10.4%)과 비교하면 형편없는 성적입니다. 압축성장이 한국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님은 이미 비교경제학을 통해 입증된 사실입니다. 



게다가 연평균 물가상승률은 무려 16.5%에 이르렀습니다. 유럽이었으면 폭동이 일어났을 살인적인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중하위층으로 갈수록 실질소득은 줄어들었습니다. 특히 1963년 20%, 1964년 29%, 1974년에는 24.3%, 1975년에는 25.7%, 저격된 1979년에는 18.3%에 이를 정도로 살인적이어서 서민의 삶은 극도로 악화됐습니다. 



233억달러에 이르는 수출에서의 누적적자(현재 환율로 하면 250여조원)는 폭발 직전에 이르렀고, 그 결과 1979~80년의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로 떨어졌습니다. 수출을 늘리기 위한 인위적인 환율정책을 사용했는데, 경제적 무능력과 극심한 부패 때문에 역대 정권을 통틀어 유일하게 거대한 적자를 기록했습니다. 





박정희를 찬양하는 사람들은 그가 후대의 정부들이 수출에서 흑자를 기록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다졌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일본이 한반도를 강제합병한 36년 동안 근대화의 기반을 다졌다고 주장하는 식민지근대화론자의 주장과 동일한 논리일 뿐입니다. 위안부가 없었으면 일본군이 일반인을 강간했을 것이라는 논리와 무엇이 다릅니까? 



이런 식으로 따지면 이명박의 4대강공사도 얼마든지 잘한 일로 포장할 수 있습니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상이변으로 2~3년 정도 강수량이 줄어들면 4대강공사는 국가를 살린 일로 둔갑할 수 있습니다. 당대와 미래세대의 피해는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플러스가 되는 것만 언급하면 실패한 정책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도성장으로 표현되는 박정희 시대의 압축성장도 통계수치를 가지고 따져보면 잠재성장률에도 미치지 못했던 때가 거의 10년에 달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살인적인 물가상승률은 경제규모만 커질 뿐 서민의 삶의 질을 갈수록 악화시켰고, 1979년에 이르러서는 한계상황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부마항쟁으로 대표되는 민주화운동이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질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경제파탄이 결정적으로 작용했습니다. 집권 초기에는 소련의 확장을 경계한 미국의 시장개방과 일본의 생색, 베트남전쟁의 특수로 버틸 수 있었고, 집권 중후반에는 미국이 주도한 중동 특수로 버틸 수 있었지만 집권 말기에는 백약이 무효인 상태였습니다.



강력한 독재와 함께 박정희의 성공요인이었던 지독한 행운도 더 이상 작동할 수 없었고, 북한의 도발과 반미정서의 폭발을 염려한 미국 연방정부도 베트남전쟁의 패배에 따른 민심 이반과 적자투성이의 자국 경제를 살리기에 급급해 박정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이 추락하는 한국경제의 숨통을 튀어주려면 강 달러 전략을 포기해야 하는데, 제 코가 석자였던 미국이 환율정책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정경유착으로 성장했던 대기업들을 빼면 거의 모든 국민들이 등을 돌렸고, 분노가 폭발 직전이었기 때문에 이승만에 이어 박정희의 하야는 시간 문제였습니다.





헌데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하는 바람에 이 모든 것이 뒤틀려버렸습니다. 국민의 손으로 박정희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다면 박정희 통치기간의 공과는 냉정한 평가를 받았을 것이고, 온갖 통계가 말해주듯 최악의 독재자이자 실패한 지도자로 귀결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한민국을 최빈국에서 중진국으로 끌어올렸다는 압축성장의 신화는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박정희 시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온갖 통계수치와 연구논문, 저술과 외교문서 등을 보면 박정희가 누린 수없이 많은 행운 중 최고는 김재규에게 저격당한 것입니다. 그 때문에 박정희는 전두환과 노태우 정부를 거치면서 온갖 사실 조작과 통계 왜곡, 조중동과 방송사들의 세뇌작업을 통해 신화의 영역으로 승격했습니다. 



장면 정부가 만들었고, 미국의 경제전문가들이 다듬어주었고, 귀국한 경제관료들이 일본을 모방해서 완성했던 경제개발5개년계획도 박정희의 업적으로 치장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독재를 통한 종신대통령이 목표였던 박정희의 실체와 집권 기간 동안 벌어졌던 온갖 인권 유린 실태(노동 착취가 가장 심했다)와 용공조작사건들도 낱낱이 까발려졌을 것입니다.   





박정희는 형편없는 독재자이자 배신의 달인이며, 철저한 기회주의자였습니다. 그의 업적은 군인정신으로 밀어붙인 경부고속도로의 완공과 정권과 관련없는 경제 및 기술관료들을 등용한 것 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든 행운과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독재가 만들어준 18년의 집권 기간 뿐입니다. 



뛰어난 기술 및 경제관료들과 부지런하고 능력 있고 애국심도 강한 국민들로 넘쳐났던 대한민국에서 18년 동안 대통령으로 있었다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업적(독재자의 최고 덕목)입니다. 진정으로 칭송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독재자 치하에서도 국가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한 그분들이지 중앙정보부, 검찰, 경찰, 법원 등을 총동원해 종신 대통령(=조선시대의 왕)을 꿈꿨던 박정희가 아닙니다.



박정희가 김재규 총에 죽지 않았다면, 그래서 죽어서도 끝없는 행운을 누리고 있는 박정희를 국민의 손으로 하야시켰다면 지금 같은 개판 1분전의 대한민국은 도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최소한 일본 정도의 선진국으로 진입해 글로벌 경제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하며 코앞으로 닥친 통일준비에 매진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최소한 박근혜가 대통령에 올라 박정희처럼 대한민국을 말아먹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박정희는 그 이상일 수 없을 만큼 최대한도로 과대포장된 인물입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