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혁신은 개인 및 집단의 복지증대를 낳는다. (탈숙련화, 실업이나 이직의 위험, 건강 위험과 자연파괴 등의) 그 부정적 효과들은 이러한 생활수준의 향상 속에서 언제나 정당화되었다.
ㅡ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에서 인용
걷잡을 수 없는 기술의 발전은 우리 인간성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까지 파괴시킬지도 모른다. 기술은 도덕적 기반을 상실한 문화를 만들어낸다. 기술은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정신적 과정들과 사회적 관계들을 뿌리 채 흔들어놓는다.
ㅡ 닐 포스트만의 《테크노폴리》에서 인용
플라톤의 《파이드로스》를 보면 그가 지적재산권의 대부분을 독점했던 소크라테스의 말(아리스토텔레스가 나머지 소유권을 가졌다. 이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대단히 불행한 일이었다)을 빌려, 발명의 신인 테우스가 이집트를 통치하던 타무스 왕에게 자신의 발명품을 널리 보급해 번영을 누리라고 말하는 얘기가 나온다. 각종 발명품에 대해 타무스 왕이 테우스에게 묻고 답하는 가운데 문자에 이르렀고 둘의 견해는 완전히 갈린다. 테우스는 문자가 이집트인들의 지혜와 기억력을 눌려줄 것이라고 했지만, 타무스 왕은 이에 대해 동의하지 않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발명가의 모범이 되는 테우스여, 기술의 발명자는 그 기술이 장차 이익이 될지 해가 될지를 판정할 수 있는 최선의 재판관이 될 수 없습니다. 문자의 아버지인 당신은 자손들을 사랑하여 발명해 낸 그 문자에 본래의 기능에 정반대되는 성질을 부여한 셈입니다. 문자를 습득한 사람들은 기억력을 사용하지 않게 되어 오히려 더 많이 잊게 될 것입니다. 기억을 위해 내적 차원에 의존하기보다 외적 기호에 의존하게 되는 탓이지요. 당신이 발견한 것은 회상의 보증수표이지, 기억의 보증수표는 아닙니다. 그리고 지혜에 대해서라면, 당신과 제자들은 사실과는 상관없이 지혜에 대한 명성을 계속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적절한 가르침 없이도 많은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고, 따라서 실제로는 거의 무지하다 할지라도 지식이 있는 것으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진정한 지혜 대신 지혜에 대한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장차 사회에 짐만 될 것입니다.
모든 지식과 정보가 축적됨에 따라 검색을 통해 어느 곳에서나 광속으로 접속할 수 있는 정보사회(감시사회)에서 타무스 왕의 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지만, 기술의 본질에 관해 분명한 성찰을 전해준다. 닐 포스트만의 성찰처럼 ‘기술은 한 번 도입되기만 하면 인간의 통제권을 벗어나 인간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 자체의 예정된 임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새로운 기술을 채택할 때에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상기해준다. 특히 기술이 돈이 되는 세상에서 타무스 왕의 성찰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마셜 맥루한은 《미디어의 이해》에서 ‘기술의 영향력은 의견이나 개념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기술의 영향력은 인식의 방식을 꾸준히, 아무런 저항 없이 바꾸어놓는데 있다’고 말함으로써 인간이 자신이 만든 도구인 기술에 어떻게 지배되는지 말해주었다.
한나 아렌트 또한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조건이 인간이 만든 기술의 산물인 인공세계에 의해 반대로 조건 지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TV와 스마트폰의 보편화로 혁명적으로 달라졌지만, 동시에 진화의 과정을 역행하고 있는 우리의 삶의 행태를 충분히 떠올릴 수 있다. 특히 상당한 돈이 있어야 수중에 넣을 수 있는 고급기술은 모든 인류의 갈등들 사이에서 극소수의 승자와 강자에게 소화해내기 힘들 정도의 전리품을 안겨주지만 절대다수의 패자와 희생자에게는 절망과 죽음을 안겨주기 때문에 그 도입의 단계에서 예상되는 부작용에 대해서 철저히 따져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칼 포퍼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Ⅱ》에서 말한 대로 과학과 기술을 독점한 ‘정치권력의 역사는 국제적 범죄와 집단학살의 역사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술이 만악의 근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술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또한 기술은 사용 방식에 따라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원천이 되며, 인간을 보다 높은 차원의 삶으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는 마르크스도 동의하는 것이며, 그래서 그는 자본주의의 등장을 역사의 필연으로 봤고, 그 끝에 이르면 노동자의 생산성이 최고조에 이르러 투입 대비 이익이 제로에 이르러 더 이상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아 노동착취가 사라지는 ‘자유의 왕국’이 실현된다고 말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기술의 발전과 자본의 무한 변신을 예상할 수 없었던 시대의 한계였으며, 생의 마지막까지 착취되고 사물처럼 거래되는 제품으로 전락해 극단적 소외에 빠져드는 노동자의 삶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유토피아적 발상으로 결론을 내리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마르크스의 문제점을 가장 잘 지적한 칼 폴라니의 설명처럼, 그는 여러 곳에서 자신이 세운 ‘준거틀’에서 벗어나는 실수를 보여줬지만, 소수의 자본가의 수중에서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 노동자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휴머니즘의 산물이었다. 아무튼 기술의 발전이 ‘탐욕의 삼위일체’에 의해서 극소수의 승자에 봉사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해서, 기술에 책임을 지울 수는 없는 일이며,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문명 속의 불만』에서 결론으로 내놓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기술은 사용의 결정과 그 결과에 따라 우리의 적일 될 수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는 우리의 친구가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애초에 거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철도가 없었다면 내 아이는 고향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고,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전화를 사용할 일도 없을 것이다. 만일 대양을 횡단하는 선박이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친구는 항해에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며 자연히 마음 졸이며 그의 소식을 전보로 전해들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유아 사망률의 감소가 그 비율만큼 출산을 억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결국 어떤 면에서 보든 우리가 위생학이 발전하기 이전보다 아기를 더 잘 기른다고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생활 여건 역시 악화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우리의 삶이 고통스럽고 기쁨이 없으며 비참하기 그지없어 오직 죽음만을 바라고 산다면 오래 산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를 갖는가?
이런 프로이트의 절망은 지구온난화가 일상화되고 초고령사회에 접어들수록 더욱 현실적인 울림으로 다가올 가능성이 높다. 출산율의 저하는 산업사회의 발전 단계에서 처음부터 내재된 것이었기 때문에 결코 노인들의 수명 연장에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임에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세대 간의 전쟁은 갈수록 첨예해지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노인들은 자신들의 손자와 손녀일수도 있는 젊은이들을 비난하고, 젊은이들은 그들의 조부모일수도 있는 어른들을 비난하며 심지어는 폭력적 언사도 퍼붓고 있다.
기술-경제적 발전이 진행될수록 인류는 인식과 삶의 태도 차원에서도 급격히 퇴보하면서 배타적 이기주의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최근에 들어서는 가장 많은 죽음을 초래하는 것이 기술 발전에 따른 교통사고와 산업재해, 총기 사고 등으로 연간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이승을 등지거나 장애인이 되고 있다는 통계가 쏟아져 나온다. 민간 보험을 통해 그 피해를 일부라도 만회한다고 해도 이 또한 기술 발전의 피해자인 개개인에게 책임이 돌아가는 것에 불과하다.
하물며 민간보험마저 들 수 없는 사람들은 어디서 하소연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시계의 발명으로 인간을 시간의 노예와 결과로 평가하는 과정으로 정착한 방식이라도 해도, 기술 발전의 성과를 1년 단위로 나눠서 평가해보면, 한마디로 1년 단위의 고과를 따지면 기술 발전의 결과가 매일같이 크고 작은 사고들을 축적해 거대한 홀로코스트를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사례까지 감안한다면 인류 해방을 약속한 기술 발전 덕분에 인류는 상시적 전쟁상태라는 무차별적인 폭력의 심연 속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없다.
기술 발전의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는 추세라 어제까지의 기술적 경험과 지식들이 오늘에서는 무용지물이 되고, 내일에는 기술 발전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어 퇴물로 취급되는 내가 현실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한다. 어제까지 확실하고 견고해 보였던 모든 것들이 사회와 삶의 곳곳에서 무너져 내리며 오늘의 공포로 엄습해 온다. 내일에는 모든 것들이 불확실할 것이기 때문에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결정을 내려야 한다. 장기간에 걸친 노력이 필요한 지속적인 것들은 살아남을 수 없다. 리처드 세넷이 《개성의 부식》에서 말했던 것처럼, 불확실성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순간적인 충동과 단기적 행위로만 가득한, 지속적 일상과 습관을 결여한 삶을” 유지해야만 한다.
언제든지 어제까지 유효했던 것들과 작별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며, 오늘의 결정이 내일까지 이어지지 않더라도 불평해서는 안 된다. 그 결과 넘칠 만큼 주어진 자유를 소유한 개인은 “이정표 하나 없고 온통 자신이 헤쳐가야만 하되, 그 결과가 어찌 될지 전혀 확신이 없는 상태로 헤아릴 수 없는 위험이 잔뜩 도사린 길을 가며 이런저런 결정들을 내려야 하는 상황” 속에서 공포에 질린 채 무기력한 존재로 한없이 위축된다. 끝없이 땅을 파면서 안전한 곳을 찾아가는 두더지가 그 과정 속에서 에너지를 모두 소비하고 죽음에 이르는 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존재가 오늘날의 파편화되고 소비에 집착하는 너와 나, 철저히 개인 단위로 분리된 우리다. 이런 암울한 현실에 대해 질 딜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그들의 공저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참담한 고백을 해야만 했다.
파편화된 존재의 신화에 대해 우리는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그 파편들은 마치 원래의 온전한 상태와 똑같은 하나의 일체로 모아 붙이기 위해 마지막 한 조각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는 고대 조각상의 파편들과 마찬가지이다. 한때 존재했다는 근원적 총체성 혹은 미래의 어느 날 우리를 맞이할 최종적 총체성 따위에 대한 믿음이 이제는 없다.
이런 참담한 고백을 한 사람들이 이제는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아졌지만, TV라는 ‘바보상자(또는 ‘탐욕의 삼위일체’의 판도라 상자)’에 길들여진 아날로그 세대는 왜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지 이해할 수 없다. TV가 보여주는 오늘의 뉴스와 각종 콘텐츠의 오락성과 상업성, 해피엔딩과 즉물적 쾌락에 자신도 모르게 길들여진 그들은 작금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아날로그 세대의 막내인 필자도 한 동안 이런 혼란 속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와 사회, 부모가 요구하고 가르쳐주는 대로 살아온 그들은 너무나 빠른 속도로 변하는 세상의 유동성이 너무나 생경해 존재의 근원까지 뿌리 뽑히는 두려움을 떨칠 수 없었다. 이제 노년의 초입에 들어선 그들은 누가 기술을 독점하고 있으며 세상을 이렇게 만든 TV 화면 뒤의 지배자들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생각하려 않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삶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그들은 닐 포스트만이 《죽도록 즐기기》에서 말한 것처럼 “카메라가 잡은 제한된 각도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브라운관에 비치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압축성장이 가져다 준 확고부동한 믿음, 그 기간 동안 가족의 해체가 시작됐으며 부모 공양과 자식의 교육과 결혼에 들어간 돈 때문에 땅을 팔고 집을 옮겨 다녔고, 이제는 노후도 대비하기 힘든 정도로 통장의 잔고가 마이너스에 근접했음에도 불구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고 굶주림에 대한 위협에서 해방됐다는 진보의 허상이 불러온 마법에 갇혀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 “텔레비전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린 시청자란 있을 수 없고, 텔레비전 없이 지내야 할 정도로 열악한 빈곤도 존재하지 않으며, 텔레비전의 영향을 받고 변질되지 않은 수준 높은 교육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당연한 것이며, 박정희의 독재 시절에 이루어진 압축성장과 이를 주도한 대기업 덕분에 지금의 호사(?)를 누리게 됐다는 믿음에 추호의 의심도 두지 않는다. 자신이 얻은 것이 무엇이며 잃은 것이 무엇인지, 국가의 경제규모가 커진 만큼 자신의 재산도 비례해서 늘어났는지, 왜 자식들과 손자와 손녀들과 떨어져 살며 명절 때에나 간신히 얼굴이라도 볼 수 있는지, 그들은 명문대를 나오고 미국에 유학까지 다녀왔는데도 취직하지 못하는지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평생에 걸쳐 죽어라고 따라가려고 했던 미국이 외국의 돈으로 흥청망청 살다가 전 세계를 경제대공황으로 내몰면서 자신은 부도국가의 처지로 전락했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무려 36년간의 일제 강제합병의 침탈과 착취에서 벗어나 광복의 기쁨을 맛보았지만, 왜 한반도가 민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쪽으로 잘리게 됐는지, 스탈린식 사이비 공산주의의 확장을 6.25전쟁 때 도움을 줬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빼앗기고 있는지(이것을 다루려면 한 권의 책도 모자라다. 미국의 도움을 받는 것은 곧 미국의 식민지가 되는 첩경임을 고백한 《경제저격수의 고백1, 2》가 가장 무난하다) 따져보지 않는다. 북한의 공산주의라는 것이 국가파시즘의 형태를 띤 전체주의 국가이며, 이익 추구라는 단 하나의 가치만 인정하는 미국의 전체주의적 자본주의와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을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고 노무현 대통령 때 실시한 기초노령연금이 박근혜 정부가 개정한 기초연금보다 수령액이 5~6년만 지나면 역전된다는 것도, 자신의 자식과 손자/손녀들은 적게는 수백만 원에서 많게는 수천만 원에 이르는 손해를 본다는 것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여성 대통령의 리더십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어리석은 믿음은 여성들을 차별하는 정책과 친기업적이고 친부자적인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박정희 시대의 압축성장이 받아들여지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오히려 그 당시에 이루어진 각종 불평등들의 원천들이 미래세대의 불행으로 작용하고 있음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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