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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도령이 본 근현대사

늙은도령이 본 근현대사, 과학비판3 ㅡ 과학과 자본



‘탐욕의 삼위일체’가 주도한 이런 과학의 궤도 이탈은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제시한 패러다임 이론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하나의 새로운 과학이론(또는 결과물)이 나왔을 때 다른 과학자들이 그것을 실험하고 다른 방식으로 재현해도 부정적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그것을 대체할 다른 과학이론이 나오기 전까지 정상과학의 위치에 들어선다는 정상과학론을 구조화했다. 하나의 패러다임에 도전하는 과학이론이 나오면 똑같은 과정이 과학계 내부에서 진행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해 한층 진전된 정상과학이 시대를 풍미하게 된다. 





이렇게 정(기존의 정상과학)-반(반대 또는 대립되는 과학 이론의 등장)-합(과학적 검증을 통해 다시 정립된 새로운 정상이론, 이것이 다시 ‘정’이 되고 변증법적 발전이 지속된다)의 순환이라는 ‘계몽의 변증법적 발전’에 의해 과학혁명은 영원히 지속되는 영구운동으로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하늘에 별이 빛나는 한, 우리가 하늘을 보는 일을 멈추지 않는 이상 과학의 발전은 멈추지 않고 모든 장애물들을 돌파해나갈 것이다.



과학의 부정적 입증에 철저하게 파고든 칼 포퍼와는 달리 토마스 쿤이 공식화한 계몽의 변증법적 해석에 따라 과학혁명은 영원한 발전을 보장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쿤이 무한대의 발전을 말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 언젠가는 과학의 진보도 한계에 이를 것이라 했지만ㅡ이것에 관해서는 포퍼도 마찬가지다ㅡ이는 자신이 정립한 과학혁명의 패러다임 이론과도 모순에 처한다. 마르크스가 변증법적 유물론을 통해 자본주의가 극에 이르면 내부로부터 붕괴해 유토피아(자유의 왕국)에 이른다는 것과 대단히 유사하다. 






물론 이런 방식에 대해 닐 포스트먼은 《테크노폴리》를 통해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과학적 진술의 조건을 검증 가능성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은 정반대다. 과학적 진술은 거짓임을 증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과학적 진술과 구분된다. 과학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진리’를 인식하는 능력이 아니라 거짓을 깨닫는 능력이다”라고 주장하며 칼 포퍼의 이론에 반박을 표하기도 했지만, 세상이 다시 뒤집히는 지금에 와서는 포퍼의 주장이 정확했던 것 같다(장하석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는 과학철학에 접근하기에 대단히 좋은 길을 제시한다). 



어쨌든 과학혁명에 대한 그의 패러다임 이론은, 다윈의 진화론과 함께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 같은 모든 분야로 넓혀져, 과학혁명에 대한 맹신과 진보에 대한 믿음이 더욱 강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막심 탈레브가 《블랙스완》에서 ‘돈이 되는 모든 것은 전문화된다’고 말한 것처럼, 비전문가에 대해 또는 적대적 공생관계의 과학자들과 대안과학자들에 대해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전문성이라는 높은 장벽을 구축한 과학자들은 그들만의 천국에서 어떤 것이든 할 수 있었다(하고 있고, 할 것이다). 이렇게 계몽의 변증법이 탄생시킨 진보의 과정에 심각한 왜곡이 일어나면서 지적 모순을 바로잡을 확률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런 배타적 독점권(파벌을 이루는 모든 학문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한다) 때문에 오류의 가능성은 높아졌고, 부작용을 은폐하거나 축소하는데 쉬워졌으며, 문제의 해결도 같은 부류의 과학자들이 도맡아 처리했다. 또한 과학연구가 대학과 기업으로 넘어감에 따라 반드시 실적을 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과학자들의 목을 조여 왔다. 투자비용은 계속 늘어나는데 확실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자, 황우석 교수와 만능세포 발견과 취소를 거듭한 일본의 젊은 과학자처럼 완전하지 않는 연구결과를 조작해서 대규모 사기를 벌이는 일들이 다반사로 이루어졌다(한국 교수들의 학위논문을 전수조사 하라, 그러면 진실이 밝혀질지니!). 





이들은 인류의 진보를 이루기 위해서는 과학적 연구의 결과물들이 일정한 부작용을 가질 수 있지만, 그것 때문에 과학자가 책임을 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가치중립적인 면책특권을 이용해 부작용이 속출하는 연구결과물들을 대량생산과 전문서비스의 영역으로 넘겨버렸다. 어떤 것이든 시장 시스템으로 넘어가면 오직 한 가지 목적, 이윤만 추구되기 때문에 부작용들의 확산과 축적은 막을 도리가 없다. 시장이 알아서 다른 것들로 대체할 때까지 악순환은 계속된다.



문제는 막심 탈레브가 《블랙스완》에서 말한 것처럼, 인류는 극도로 세분화되고 고도로 전문화된 연구의 타당성과 윤리적 방법에 대해 사전에 검사할 수 없고, 당연히 연구의 결과물의 장단점과 문제점을 생산단계 이전에 확인할 수 있는 지적검증부대(벡이 말한 대항과학이나 대안과학 또는 대안전문가)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문제의 결과물이 알려진 것보다 부작용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경우(토지 오염과 사막화, 이에 따른 물 부족 사태와 생태계 파괴, 미세먼지 같은 스모그의 일상화, 지구온난화와 각종 기상이변, 무조건 인재인 파멸적인 원전 폭발과 모든 책임이 개인에게 전가되는 공포와 스트레스의 폭발적 증가 등)에도 리콜조치가 소비자가 할 수 있는 거의 전부다. 또한 제품이 나오기까지 여러 단계와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과학자에게까지 책임을 묻는 경우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과학은 그림자 영역 속으로 들어가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르는 연구를 계속할 수 있게 된다. 사전 예방이라는 최상의 방법은 이윤 추구에 굴복해 영원히 취해지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정치만이 아니라 전문화된 거의 모든 영역에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경향이 만연되고 제도적으로 고착화된다. 지금 기업의 연구소에서, 또는 기업의 의뢰로 개인연구소에서 어떤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는지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사적 영역을 보호해주는 자유민주주의가 최상의 체제가 되며, 삼권분립이라는 정부 구조가 책임의 분산을 자초하거나 유발하는데 일조했다. 문제가 발생해도 합법적 면죄를 받거나 최소한의 형량과 벌금으로 과학의 부정적 결과는 모든 제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소비자가 입은 피해는 (거의) 보상받지 못한다.





이런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현상은 과학자들이 연구의 결과물을 내놓으면서 ‘위험과 위협을 조직적이고 객관적으로 해석’해 부작용에 대해 투명하게 밝혔는지, 아니면 ‘경시하거나 은폐했는가’로 판정할 수 있는데, 최근에는 과학적 결과물을 독점하는 산업자본의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이것조차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사라진 상태다. 울리히 벡이 《위험사회》를 통해 적나라하게 밝힌 것처럼, 무분별한 과학적 결과물의 산업화와 서비스화에 따라 부와 위험의 불평등이 중첩되는 사회계급이 발생했고, 공통된 계급의식과 연대의 가능성이 없는 개인화된 이들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비대칭적 종말에 무방비상태로 놓여 졌다는 경고가 속출하기에 이르렀다. 



각종 오염과 중독에 대한 기준치는 개별적으로 제시되고, 그 기준치의 근거도 확인할 방법이 없어서, 눈으로 보이고 만성질환의 증가를 초래하고 있음에도 숫자의 제시는 개별 기준치들은 인간이 먹고 마시고 숨 쉬고 접촉하는 가운데 모든 기준치들의 총합은 개인의 인체에 축적되고 있다. 이는 과학적 부작용을 전체 인류를 상대로 한 자연적인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모두가 알지만,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방식으로 인체가 과학의 실험대상으로 전락했다. 달리 말하면 세상에 의해 공인된 그래서 부정적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침묵의 암살자가 등장한 것이다. 거의 모든 과학자들의 종교입문서나 헌법 같은 《과학혁명의 구조》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쿤의 주장이 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과학혁명에서는 소득 못지않게 손실도 따르며, 과학자들은 손실에 대해서는 유독 맹목적인 경향을 띤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혁명을 통한 진보에 관한 어떠한 설명도 이 대목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패러다임 사이의 선택을 결정하는 과정과 권위의 성격을 억제하지 않는다면 전혀 틀린 것은 아닐 공식화, 즉 과학에서 힘은 곧 정의라는 명제를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권위가 그리고 특히 비전문적 권위가 패러다임 논쟁의 조정역을 한다면 그들 논쟁의 결과는 혁명이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과학적 혁명은 아닐 것이다. 과학의 존재 의미는 어느 특별한 유형의 사회 구성원들에게 패러다임 사이에서의 선택의 능력을 부여하는 것에 달려 있다. 과학이 존속되고 성장하기 위해서 그 사회가 얼마나 특별해야 하는가는 과학 활동에 대하여 인류가 보인 이해력의 부족에 의해서 알 수 있다. 기록이 남아 있는 모든 문명의 기술, 예술, 종교, 정치체제, 법률 등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옛 문명의 이러한 영역들은 우리들의 문명에서만큼이나 발달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로부터 전승되었던 문명만이 가장 원초적인 과학 이상의 것을 지니고 있었다. 과학 지식의 대부분은 지난 4세기 동안 유럽이 낳은 산물이었다. 그 밖의 다른 지역, 다른 시대는 과학적 생산 활동이 나타나는 그런 특별한 과학자 사회를 뒷받침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과학은 스스로 과학화됐다. 일체의 도전과 자기성찰을 허용하지 않게 되었고, 위계적 학제와 권위주의적 파벌 속에서 ‘과학에 대한 비판, 진보에 대한 비판, 전문가에 대한 비판, 기술에 대한 비판’을 아예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과학의 진보를 믿지 않는 자들과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은 정신병자나 비합리적 문제아로 낙인찍혔다. 



하지만 칼 포퍼가 말했듯이 “과학적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반적으로 진리에 도달한 의미의 지식이 아니라, 여러 가지 서로 경쟁하는 가정들과 그 가정들이 실험적 증거를 거쳐 어떤 결과가 나왔는가에 관한 정보”에 불과한데도,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연구가 진리로 확정이나 된다는 듯이 그들만의 리그에 안에서 과학적 정의는 물론 사회적 정의와도 거리를 넓혔고, 스스로 자본의 노예가 되는 것을 평균 이상의 소득과 승진, 명성으로 대체해버렸다. 





과학은 또한 인간 구원에 대한 최종적 믿음을 종교로부터 빼앗아 갔지만, 살아있는 동안의 인류 해방의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한 과학자집단이 문제를 일으키면 다른 과학자집단이, 그러나 둘은 지향하는 결과에서는 동일한 비전을 공유하면서도 서로의 방법에 대해 극단적 논쟁에 돌입하지만, 비전문가들은 논장의 밖에서 처분만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했다. 신자유주의가 번성한 지난 30년 동안 ‘과학은 진리의 도움을 받는 활동에서 진리없이 활동’했으며 ‘내적으로 과학은 더 이상 의사결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는 위험의 전 지구적 확산이었고, 유일한 성과물이란 ‘탐욕의 삼위일체’에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윤을 쌓아준 것이다. 



과학은 이제 자신을 반성적으로도 비판적으로도 바라보지 않으며, 돌아오는 이익과 승진에의 욕망, 목을 조여 오는 연구자금의 사슬 속에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세속화됐으면서도 진리의 담지자이자 지배자로서의 역할은 내려놓으려 하지 않는다. 책임이 사라진 곳에서 연구방법과 부정적 결과에 대해 윤리적으로 고민할 과학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에서의 파벌은 경제학에서의 파벌보다 더욱 심하다는 사실은 여러 과학자들의 고백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과학도 그들만의 리그를 구축한 채 현실에서 멀어진 것도 이런 파벌의 부작용에서 나온 것이다. 



게다가 벡의 지적처럼, 과학의 결과물을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환경오염과 다양한 종의 멸종 같은 파괴적인 결과들이 속출하는데도 불구하고, 산업적 이해에 사로잡혀 있는 과학은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한 원인들을 제거하기 보다는, 그것들을 다시 산업화해 시장을 확대함으로써 이윤 창출을 지속하는 방식으로 움직였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 결과 ‘원인은 애매한 상태로 남겨지게 되고, 각종 실수와 문제의 변형을 시장의 활성화에 내맡기는 웃지 못 할 사태가 빈발하고 있다. 과학실천에서 ‘학습과정은 체계적으로 단축되며 저지’됨에 따라 각종 질환이 여기저기서 속출한다. 



인류는 당뇨병, 암, 심장병, 우울증, 비만, 호르몬 장애, 자살 충동 같은 문명질환의 무방비상태로 놓인다. 이렇게 새롭게 형성된 문명질환들을 치료하기 위해 새로운 산업화의 동력이 창출된다. 결국 “더욱더 많은 영역에서 산업은 문제의 기원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무시한 채 자신이 이차적으로 유발한 문제들에서 이윤을 얻고 있다.” 부작용이 눈에 보이는 것들로 변하면서 과학은 갈수록 무오류성의 신화를 대중으로부터 압박받으면서도, 과학이 도달할 무오류성 때문에 모든 부작용들을 언젠가는 해결될 수 있다는 과잉전문화에 매몰되면서 ‘한없이 뒤로 후퇴하는 자가동학적 진보의 신화’를 연일 써나가고 있다. 




1986년에 독일에서 출간된 《위험사회》에서 울리히 벡은 과학적 부작용의 원인을 이차적인 산업화의 동력으로 삼는 과정을 가장 일반적인 화학산업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이런 예는 너무나 많지만 나치가 아우슈비츠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살충제와 미국이 베트남을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옥의 땅으로 만들겠다며 무차별적으로 퍼부은 네이팜탄과 고엽제가 화학산업의 결과물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가장 적절한 예라고 할 수 있다.



화학산업은 유독폐기물을 생산한다. 그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해결책’은 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는, 폐기물 문제가 지하수 문제로 되는 것이다. 화학 및 여타 산업들은 음료수의 ‘정화장치’를 판매함으로써 이러한 문제에서 이윤을 얻는다. 이러한 정화장치로 거른 물이 사람들의 건강을 해칠 경우에는 약을 먹으면 되며, 따라서 그 ‘잠재된 부수효과’는 정교한 의료체계를 통해 차단하고 연장된다. 이런 식으로 과잉전문화의 정도에 따라 문재해결과 문제생산의 사슬이 형성되며 이것은 보이지 않는 이차적 결과라는 ‘요정 이야기’를 다시금 완전히 ‘확증한다.’ ‘객관적인 제약들’과 ‘자기 동학’이 발생하는 원형구조는 이처럼 본질적으로 그 협소함, 방법과 이론에 대한 그 이해, 그 경력 사다리 등에서 과잉전문화된 인지적 실천의 모델이다. 극한까지 추진된 분업은 이차적 결과, 그 예측불가능성, 그리고 이 ‘운명’을 불가피한 것으로 보이도록 하는 현실 등의 모든 것을 생산한다. 과잉전문화는 자기확증하는 순환 속에 결과의 운명론을 집중시키는 능동적인 사회적 실천모델이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