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끝없는 이윤 창출을 가능하게 만드는 산업사회의 2차적 시장 형성이라는 ‘요정 이야기’가 되풀이되는 동안 결과의 부작용(부수효과)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개인에게는 과학적 결과에 대한 낙관적 운명론이란 현세에 재현된 지옥이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경제적으로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장체제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과정은 역사의 필연이며, 그래서 폭주하는 기차를 멈추게 하지 않는 한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쯤 되면 부정적 결과를 최소화시키기 위한 대안과학과 대체의학 및 과거회귀적인 식이요법과 지역의 소규모 농장을 돕는 것 이외에는 지속가능하지 않은 유기농 열풍과 함께 확률로 먹고 사는 ‘공학’이 전면에 부상한다(특히 유전공학과 환경공학 및 원자력공학).
이들의 주장은 과학이 무오류성을 지닐 때까지 각종 부작용들을 공학적 기술로 막으면 확률 영역에 속하는 ‘결과의 낙관론’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특히 핵발전의 안정성 확보를 위한 각종 방호장치와 저준위·고준위 핵폐기물들의 (재)처리와 보관에서 끊임없는 논란을 양산하고 있다. 소형항공기와 충돌하는 확률까지 계산ㅡ백만분의 1의 확률ㅡ해서 만들어졌다는 핵발전소가 50년밖에 되지 않는 역사에서 벌써 세 번이나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사실 이런 사고의 가능성은 조지프 로트블랙과 버트런드 러셀, 아인슈타인과 칼 폴라니 등이 “어느 나라나 대륙 또는 종교의 구성원으로서가 아니라, 계속적인 존재 여부가 불투명한 인간이라는 종의 한 구성원으로서” 서명한 핵위협의 감소를 촉구하는 1955년의 선언문에 반영돼 있다.
과학자들 중 아무도 최악의 결과가 확실하게 실현될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은 그러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으며, 실현되지 않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한 전문가들의 견해가 그들의 정책이나 편견에 따라 어느 정도 달라지는 것을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우리의 연구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그것은 오로지 그 전문가가 지닌 지식의 범위에 따라 다를 뿐이다. 가장 많이 아는 전문가일수록 더 비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비록 이들의 선언문이 1955년도에 나왔지만, 핵발전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현재의 세계적 핵물리학자들도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일본 제1원전의 폭발사고에서 보듯, 핵발전은 지구온난화와 함께 인류에게 놓인 최악의 위협이다. 특히 지구온난화는 대규모 기상이변을 동반하기 때문에 핵발전의 위험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핵발전의 위험을 막기 위한 공학적인 조치들로 사고확률을 아무리 낮춘다 해도,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는 것이 확률이란 숫자놀음이다. 폭발 사고란 확률이 계산해낸 마지막 시기에서 발생할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의 원전 폭발이 입증해준 것처럼 그 중간에 일어날 수도 있다.
하물며 노후 원전의 수명이 늘어날수록, 핵발전소의 수가 늘어날수록 사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핵발전소의 완전한 폐쇄까지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농축된 우라늄과 플루토늄에서 발출되는 방사능물질은 최소 500년에서 만년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방출되기 때문에, 그것을 방비하기 위한 비용부담은 전적으로 미래세대에게 전가된다. 아무리 정교하게 계산됐다고 해도 사고확률은 발생가능성만 입증할 뿐이지, 발생의 시기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제공하지 않는다. 일본에 이어 한국에서도 만연된 원전 비리와 일본 제1원전 폭발에서 보듯 현재는 물론 미래의 일을 예측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어불성설이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 회복불가능할 정도로 치명적인 위험을 선택하는 어리석음이란 절대 허용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만들어지면 해체할 수 없고, 상상하는 이상의 피해를 불러오는 것이 핵발전이다. 아무리 많은 방어막을 설치한다 한들,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힘인 핵폭발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또한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확률이란 계산에 적용된 변수의 종류와 가중치에 따라 달라지며 원전사고의 대부분이 인재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안전에 대한 공학적 신화란 확률이라는 놀음에서 나온 위험천만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핵발전은 사고가 일어나면 그 불가역적인 피해에 대해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전대미문의 결과만 동시대의 사람들과 미래 세대들에게 전가될 뿐이다. 특히 방사능피폭의 결과들이 나타나는 다음 세대에 가해지는 개별적이고 직접적인 피해는 핵발전과 관련된 비용에 포함되지 않는다. 핵발전이 경제적으로도 마이너스라는 주장이 허튼 소리만은 아니다. 율리히 벡의 《위험사회》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이런 의미에서 핵에너지는 기술발전에 복속된 ‘무오류성’을 따르는 위험천만한 게임이다. 그것은 객관적인 제약에서 객관적인 제약을 방출한다. 그리고 이 제약은 거의 변화불가능하며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다. 그것은 사람들을 (핵폐기물의 처분 또는 비축기 동안) 수세대에 걸쳐, 오랜 시기에 걸쳐 묶어 두며, 다시 말해서 그 동안에 핵심적인 낱말들의 의미가 변하지 않는다고 확언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그것은 아주 다른 영역에 대해서조차 측정할 수 없는 결과들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것은 그것이 요구하는 사회통제에 적용되는데, 이것은 ‘권위주의적 핵국가’라는 문구로 표현된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장기적인 생물학적 영향에도 적용되며 이것은 오늘날 결코 측정될 수 없다.
우리는 지금의 생산과 소비 수준을 맞추겠다는 자기파괴적 명목과 영원히 진보해야 한다는 경제적 숙명론 때문에 핵발전소를 추가로 건설하고 노후 원전을 재가동하는 정치적 결정에 미래의 운명을 맡기고 있다. 또한 지구온난화의 대안은 핵발전밖에 없다는 위험천만한 사이비 진단들도 넘쳐나고 있다. 모든 이익을 지금(겨우 한두 세대) 누리고, 그 회복불가능한 피해는 미래세대에 전가하겠다는 이 파렴치한 결정들은 ‘탐욕의 삼위일체’에게 제2, 제3의 산업화와 이윤 창출의 기회를 무한정으로 늘려주고 있다. 세월호 참사의 근본적인 원인도 이런 정치적 결정과 경제적 탐욕이 맞물리면서 일어났다.
울리히 벡이 정식화한 ‘위험사회’의 실질적 위협들이 컴퓨터와 인터넷의 보급, 정보저장기술의 비약적 발전과 데이터 가공기술과 인공지능의 발전에 의한 빅데이터의 출현과 다방면에서의 활용, 모바일기기들의 보편화와 유전공학 및 뇌과학의 발전으로 실재적인 위험들이 더욱 커졌고 통제 불능의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제임스 베니거가 《통제 혁명》에서 과학의 역사가 곧 정보 제어의 역사였다는 사실을 밝힌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정보의 홍수를 통제하지 못하는 현대는 ‘위험사회’를 넘어 ‘초위험사회’로 접어들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베니거의 말처럼, 인류의 진화가 장기간에 걸친 자연선택과 돌연변이로 유전자에 축적된 어마어마한 정보들을 제어하고 통제하는 역사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정보의 범람과 이를 통제하지 못하는 초위험사회’의 도래는 허버트 스펜서가 주장한 ‘사회진화론’의 한 단계에 속할 수도 있다. 헤겔의 주장처럼 변증법적 발전을 통해 더 나은 미래로 향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2002년 7월, 뉴욕 주립대학의 에커드 위머와 그 동료들은 DNA와 인터넷에서 다운로드받을 수 있는 유전자 청사진을 사용해 소아마비 바이러스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마틴 리스의 《인간 생존확률 50:50》에서 인용)”한 것에서 보듯, 전 세계에 퍼져 있는 각종 연구실에서 어떤 실험들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도 고려하면 ‘초위험사회의 도래’는 ‘감시사회의 도래’와 함께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최대의 불확실성이 아닐 수 없다. 인공지능을 향한 구글의 집요한 노력이 빅데이터를 탄생시켰고, MS와 애플, 거대 금융자본들과 초국적기업들이 뒤를 잇고 있으며, 대규모 카드정보가 유출된 것에서 보듯 인류가 감당해야 할 위험들의 숫자와 규모, 발생빈도는 점점 높아지고 빨라지고 있다.
미국 국방부가 내부용으로 쓰던 인터넷이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연결하는 수단으로 등장한 이래, 인류는 핵폭발의 위협과 지구온난화의 위협을 넘어 새로운 형태의 전염병과 만성질환, 정신병과 인종청소, 구조적 빈곤과 악의적인 차별 등에 시달릴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바우만이 《액체근대》와 《유동하는 공포》를 거쳐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서 다루고 있는 ‘가벼운 경제’와 ‘불확실성의 일반화’와 ‘뒤죽박죽이 된 세상’이라는 성찰들은 아탈리와 아감벤, 네그리와 지젝, 한병철과 벡, 스티글리츠와 센 등이 새로운 사회과학의 성과물들을 내놓는다고 해서 줄어들지는 않는다.
필자는 가끔 새벽에 잠이 깨 거실로 나오면 사방에서 나지막이 ‘웅웅’거리는 소리가 귀신의 울음처럼 끊임없이 귀를 파고드는 것에 섬뜩함을 느낀다. 대형냉장고, 김치냉장고, 평면TV, 정수기, 진공청소기, 전기밥솥, 전자레인지, 스마트폰 충전기, 컴퓨터, 프린터 등이 24시간 전자파를 방출하며 끊임없이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는 이윤 창출의 도구들을 볼 때마다 식은땀이 등 뒤로 흘러내리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이 모든 것들이 핵발전소 추가 건설의 이유로 작용하면서 미래세대에게 모든 피해를 전가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일방적인 부의 창출과 세습화는 거대한 위험의 개인적 분배를 요구하고 있으며, 상층부의 공기가 하층부의 공기와 다르듯이, 모든 분야에서 심화되고 있는 불평등의 이름으로 악마화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불완전한 근대과학과 그 뒷수습에 분주할 뿐인 현대과학이 지속적인 성장이라는 진보의 가면을 쓴 채. 모두에게 책임이 있기에 누구에게도 책임 없다는 궤변들을 늘어놓은 채. 수십억 명에 이르는 신 빈곤층의 양산은 상위 1%가 무한대로 부를 가질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을 넘어 인류의 5번째 종말을 초래할 것이라는 최고 과학자들의 고백성사는 일부 기독교 광신도들의 종말론적 편향이 아님을 말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학에 대한 두 가지 의견은 평행선을 달리며 우리의 판단을 흐려놓거나, 거의 언제나 호도하고 있다. 인류에게는 우주라는 무한대의 시공간이 남아 있으며, 현대과학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고 유혹한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은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에서 볼 수 있으며, 스티븐 와인버그의 《최종이론의 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와 레너드 서스킨드의 《블랙홀 전쟁》과 《우주의 풍경》에서도 볼 수 있다. 리처드 도킨스의 《눈먼시계공》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에서도 볼 수 있다.
거의 모두 이런 식이다. 과학자가 아닌 이상, 설사 과학자라고 해도 미래에 대한 전망에서는 모두가 무책임(그들은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고, 그것을 전 세계의 정치적 의제로도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할 뿐이고, 자신의 주장에 대해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형제와 친지들 중에 특정 분야에서 최고의 위지에 오른 전문가들이 많은, 그래서 그들로부터 최고의 정보를 얻는 필자 역시 다를 것이 없다. 그래서 과학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견해와 비관적인 견해를 보이는 두 가지 인용문을 올리는 것으로 이번 장을 마칠까 한다(에너지의 다른 말인 영성을 강조하는 학파들도 있는데, 필자가 다루고 있는 주제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논외로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국가의 투자가 조금이라도 배분된다면 인류에게 새로운 탈출구를 제시할 시민과학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우리는 우주의 현재 상태를 과거의 결과이자 미래의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지적 능력이 있는 존재가 어떤 순간에 자연을 움직이는 모든 힘을 알고, 우주를 이루는 모든 사물들의 위치를 알고, 또 만약 이 데이터를 분석할 수 있을 만큼 위대하다면, 하나의 방정식 안에 우주에서 가장 큰 물체부터 가장 작은 원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운동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지적 존재에게 불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미래란 마치 지나간 일들처럼 선명하게 보일 것이다(피에르 라플라스의 《천체역학》에서 인용).
과학적 상상력이 상상력의 고갈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거친 말을 통해 말하려는 바는, 과학적 상상력이 극대화되면 새로운 사상은 씨가 마를 것이라는 점이다. 과학에서 거시적 관점은 탐욕적인 관점이며, 우주를 설명하는 값진 모델은 가장 빈곤한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제이콥 브로노프스키의 《인간의 정체성》에서 인용)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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