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득권을 형성하고 있는 메이저 언론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들은 노무현과 문재인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점에서 공통의 이해로 연결돼 있다.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죽이기에 나선 것은 조중동만이 아니었고, 현재 문재인 죽이기에 나선 것도 조중동만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런 추정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기득권을 형성한 언론들은 악의적일 만큼 노무현과 문재인에 비판적이다. 이들의 논리가 일관되게 이어져왔다면 그들의 비판이 상당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비판이란 가치체계라는 것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일관성은 비판의 필요조건이다.



하지만 보편적 합리성과 시대적 요구라는 충분조건이 남아있다. 노무현과 문재인 죽이기에서 공통의 이익을 공유하는 제도권 언론들은 보편적 합리성과 시대적 요구라는 두 가지를 제멋대로 해석해서 대중과 독자에게 영합한다. 이들은 정보접근성에서의 우위를 비판을 위한 충분조건으로 대체한다.



대중매체에게 노무현과 문재인 비판을 위한 필요충분조건 모두를 요구하는 것은 가혹할 수도 있다. 그들도 먹고 살아야 하니 일정 부분 그때그때의 시류에 영합하는 것까지 탓한다면 너무 가혹할 수 있다. 어쩌면 노무현과 문재인 비판에서 그들이 무지하게 필자가 터무니없이 틀릴 수도 있다, 그들이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여기까지는 지겹게 얘기된 것이어서 별로 신선하지도 않을 터다. 하지만 노무현과 문재인 자리에 박원순이 들어간다면 조금은 다르지 않을까? 안철수는 스스로 무너진 면이 강해 융단폭격까지 갈 필요도 없었지만, 박원순도 노무현과 문재인에 비해 융단폭격이 가해질 경우 무너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박원순의 강점은 또한 약점이다. 그에게는 대중의 인기는 있을지언정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을 지켜줄 정치적 기반은 거의 없다. 상당 부분 안철수의 도움을 받은 대중적 인기는 정치적 기반을 다질 필요성과 체계적인 기회를 상당 부분 줄였기 때문이다. 



필요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은 정치영역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박원순의 장점은 당파적 이해관계와 진영논리에서 자유롭다는 것이고, 바로 그것 때문에 위기에 처했을 때 방패막이가 되어줄 정치적 기반을 다지지 못했다는 것이 약점이다. 그를 서울시장으로 올린 힘이 그의 운신을 제한할 수 있는 것이 정치에서의 역학관계다.





박원순은 노무현과는 달리 정치판에서 성장해 최고의 자리에 오른 정치적 경험이 취약하고, 안철수와는 달리 하나의 현상으로 불리며 폭발적인 지지를 끌어낸 적이 없다. 문재인처럼 뛰어넘거나 새로운 리더십을 창출해야 할 분명한 정치적 자산(노무현 정신)도 없고, 사기꾼 이명박처럼 거짓된 신화도 없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안철수보다는 어렵지만, 문재인보다는 쉬운 박원순 죽이기가 무섭게 펼쳐지고 있다. 총선 승리를 위해 새누리당과 제도권 언론들이 총 동원된 박원순 죽이기가 권은희 의원을 기소한 공안2부(김신 부장검사)에 배정된 것도 박원순 죽이기가 예사롭지 않음을 말해준다.



박근혜가 중국에 나가있으니(돌아왔다), 공안총리 황교안의 종횡무진한 활약이 펼쳐질 터, 박원순 죽이기가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음은 분명한 것 같다. 손석희 죽이기에 JTBC 보도부문의 논조가 상당히 약해진 지금, 집권세력이 준비해둔 박원순 죽이기가 몇 개나 남아있는지 짐작하는 것조차 힘들다.





이 모든 것의 정점에는 문재인 죽이기와 총선 승리를 기반으로 여권의 정권재창출이 있다는 점에서, 이 모든 것을 뒤집어보면 야권의 분열을 획책하는 자들이 가장 날뛰기 좋은 환경이 조성됐다는 점도 야당의 대표인 문재인으로서는 커다란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내우외환이 만만치 않다.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정치생명이 위급해진 박지원이 조용해지자 박영선이 총대를 맸고, 이에 힘입은 안철수와 김한길이 문재인 때리기에 나섰다. 천정배의 신당 창당이 임박했다는 보도가 나왔고, 손학규의 정계복귀설도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이들은 문재인 체제가 출범한 이후 단 한 번도 문재인을 대표로 인정한 적이 없다.    



의문투성이 DMZ 지뢰폭발사건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전면전 위기를 거쳐 낮은 수준의 합의에 그친 공동보도문이, 박근혜 지지율 폭등으로 이어진 시점을 전후로 해서 박원순 죽이기가 재점화됐다는 점에서 음모론 하나쯤은 만들어도 이상할 것이 없으리라.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5.09.03 08:06 신고

    힘을 모아도 모자랄판에 내분이 일어나서는 안될일입니다
    수구 언론과 새눌당이 그걸 노리고 있습니다

    성동격서 작전에 휘둘리면 안됩니다

    • 늙은도령 2015.09.03 17:05 신고

      총 공격에 나선 모양입니다.
      현 집권세력 모두가 동원된 형국입니다.
      지금부터 잘 대응해야 합니다.

  2. 참교육 2015.09.03 10:05 신고

    저도 오늘 기사는 언론에 관련된 글인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게 신기합니다.
    검색하다 이런 글도 봤습니다.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0140019#cb

    • 늙은도령 2015.09.03 17:08 신고

      언론은 정말 문제입니다.
      항상 언론이 문제였지만 지금은 더욱 심합니다.

  3. 『방쌤』 2015.09.03 10:33 신고

    어쩜 이리도 한결같이 일관성을 유지할수가 있을까요,,
    참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들로 계속 물고 늘어지니,, 한숨만 나옵니다
    어떻게든 구심점이 생겨서 온전히 하나로 힘이 모였으면 좋겠는데 너무 힘드네요

    • 늙은도령 2015.09.03 17:10 신고

      야당은 국회의원만 하면 된다는 놈들이 문제입니다.
      이 작자들은 자신의 정치생명만 생각합니다.

  4. 耽讀 2015.09.03 13:19 신고

    수구세력의 노무현-문재인 비판은 당연합니다. 이제 박원순이군요. 문제는 같은 당에서 문재인을 향한 끝없는 비난입니다. 정책과 비전에 대한 비판은 찾아볼수 없습니다. 흠집내기, 호남지역주의를 동원합니다. 진짜 나쁜자들입니다.

    • 늙은도령 2015.09.03 17:13 신고

      야당의 많은 놈들이 국회의원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작자들이 지금 준동하는 것입니다.
      정말 나쁜 놈들입니다.

  5. 디에스메시 2015.09.05 18:43 신고

    안좋은 소리하면 죽이기라고 호들갑타령~지겹다.
    왜 대선나오려고 안하던 공사판벌리고 서울 구청장들 편가르기 하는꼴이
    누구 닮았네.
    나폴레옹 리더십-섬에 유배가서 디짐.
    링컨리더십을 좀 배워라
    속물인간아~



이런 식으로 정치와 정책의 연속성은 약해지고(같은 집권여당이 정권을 재창출하기 위해 선거전을 치를 때는 전임 정부의 실적에 관해 마치 야당이라도 된 듯이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정치 무대에 오른 의제들은 기술-경제적 관점에서 사전 조정된 내용들이 올라온다. 그것은 허상의 공연에 불과하며, 집권하면 본색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선거 때마다 경쟁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지킬 수 없는 공약들과 정책들이 난무하는 것에서 이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가장 민주적으로 치러져야 할 선거 기간 동안 성숙되지 않은 민주주의의 약점이 곳곳에서 드러나며, 헌법과 법률에 의해 단기적 정당성을 획득한 정부는 독점적 공권력을 동원해 선거기간 동안 남발된 공약과 정책들을 폐기해버리며, ‘임기제 군주’처럼 임기 내에 확실한 실적을 쌓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하지만 지배세력인 ‘제국’이 있다면, 대항세력인 ‘다중’이 있기 마련이듯이, 그런 과정에서 하위정치를 구성하게 된 변함없는 비판세력의 공격에 노출되고, 현실적인 저항에 부딪치게 된다. ‘임시직 군주’는 이를 돌파하기 위해 권위주의적이고 파시즘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경우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통치행태가 과격해질수록 국민과의 소통의 양과 질, 양면에서 급격한 후퇴가 일어나며, ‘권위주의적이고 파시즘적 통치’에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그네타기 유권자’와 인터넷과 SNS 등의 하위정치에 정착한 비판세력의 공격에 노출되는 범위가 갈수록 늘어난다. 



이런 현대의 정치 환경에서 집권세력은 존재를 확인할 수 없으며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한 여론의 추이와 임기 초반에 나타나는 대중매체의 기회주의적 지지와 집권 후반부면 어김없이 배를 갈아타는 변절에 따라 권력의 저울추는 현기증이 느껴질 만큼 크게 요동친다. 이에 따라 정부 정책의 정당성을 두고 사법부의 권력이 지나칠 만큼 비대해진다. 여기서 울리히 벡의 도움을 다시 한 번 받아보자.



역설적이지만, 한편에서 법관들이 심지어 정치의 본성에 맞지 않게 자신들의 ‘사법적 독립성’을 행사하고, 다른 한편에서 시민들이 자신들을 정치적 결정의 공손한 수신인에서 정치적 참여자로 변형시키고 필요하다면 국가에 맞서 자신의 권리를 법원에 청원하려 하는 바로 그 정도 내에서 이 같은 변화는 일어난다...이 모든 것은 분명히 국가정치의 영향력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외교 및 국방정책의 핵심영역에서, 그리고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국가권력의 응용에서 그 독점권을 보유한다. 이러한 독점이 국가정치의 영향력이 행사되는 중심영역이라는 것은 19세기의 혁명 이래 시민의 동원과 경찰의 기술-경제적 장비 사이에는 상대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이로써 사법부의 권력이 지나칠 정도로 비대해지면서 정치적 결정에 참여하는 발언권이 갈수록 커지고 이는 ‘정치의 사법화’로 귀결되는 퇴행의 민주주의를 견인한다. 사회적으로 다양하게 발생하는 각종 갈등을 조정하는 기능으로서의 정치적 역할은 갈수록 퇴화하고, 본질적으로 확립된 질서를 유지하는 성향이 강한 사법부의 보수적 성향 때문에 정치적 정당성을 결여한 판결이 속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런 예상은 질서유지와 승진을 중시하는 법관의 성향이 제도의 지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이에 대해서는 미셀 푸코가 《감옥의 역사》에서 규범적 권력으로서의 사법제도의 형성을 다룸으로써 상식의 영역에 이르렀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지배세력이 입에 달고 사는 법치주의라는 단어도 개별 사건에 대한 법의 해석이 민주적 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당시의 지배적 세력과 여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 정당성을 지니게 된다. 



게다가 법의 적용은 아무리 과학적인 논리에 따라 법정에 제시된 증거를 다룬다 해도 언제나 법관의 해석이 선행되는 작업이다. 법관도 여론의 향배에 민감할 수밖에 없지만 지배권력과 기술-경제적 특권그룹의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다(특히 아담 쉐보르스키 등의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를 보라). 법관은 판결로만 말한다지만 승진을 해야 하는 정신적 근로자에 불과하며,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부모이거나 자식이거나 변함없는 당사자이고, 아무리 높게 봐줘도 특정 분야의 지식에 정통한 전문가 이상은 아니다. 그 또한 정치적 성향이 있으며 나름대로 시대의 흐름을 바라보는 성찰의 능력도 갖추고 있다. 힘의 우위에 따른 현실적 고뇌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판결이 내려진다는 일반적 생각은 대단한 허구에 불과하다. 



만일 그렇다면 정치적 시시비비와 정책집행의 결과에 대해 그 민주적 정당성을 가리는 작업은 처음부터 법정에서 시작하면 아무런 갈등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인간도 완벽할 수 없으며, 정의의 여신의 두 눈이 가려진 것은 어떤 유혹에도 불구하고 불편부당한 판결을 내리라는 것이 아니라, 애당초 법관이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주체와 객체의 입장에 들어설 수 없음을 뜻한다. 자신이 대변하는 쪽에 유리한 판결을 이끌어내기 위해 치열하게 다투는 검사와 변호사가 존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치의 사법화’가 민주주의에 반하는 경우가 빈번한 이유는 또 있다. 그것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따라 법정에 올라온 사건의 내용이 전문적 지식을 요하는 경우가 갈수록 늘어난다는 사실이다. 이 또한 미셀 푸코가 앞에 언급한 책과 《광기의 역사》에서 자세히 명쾌하게 다루었던 내용으로서, 법관이 판결을 내림에 있어 기술-경제적 전문화에 따라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의 조언을 구하거나,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사건의 경우에는 대규모 공개변론이나 공청회ㅡ그러나 일반 국민은 참여하기 힘든 공개변론이나 공청회를 실시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누가 선정하고 규정해서 조언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를 수 있는가? 이제는 그 분화의 이유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세분화된 전문가들 중에서 누가 공신력 높은 권위를 지녔으며, 그 권위에 대해서는 누가 무엇으로 보증할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극도로 세분화된 과학과 기술의 영역에서 서로 대치되는 주장과 방법론을 주장하는 경우가 다산사인데, 해당 분야의 지식을 총괄하는 전문가가 아닌 이상 전문가의 성향과 수준에 따라 판결은 왜곡될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하고 왜곡되기 일쑤였다. 





결국 돈이 유일무이한 권력으로 작동되는 세상에서 ‘탐욕의 삼위일체’의 이해를 대변하는 쪽일수록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한 것이 아니라, 누가 보다 높은 수준의 전문가를 대량으로 끌어올 수 있느냐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자금을 지녔느냐에 따라서 국민적 관심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정치적 사안은 승패의 윤곽이 잡힌다. 전관예우로 얼룩져 있는 거대 로펌이 승승장구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 나오며, 이는 산업사회가 처음 출발할 때부터 내재적으로 갖고 있었던 이중적 경향, 즉 타자의 힘은 무력화시키고 자신의 힘은 최대한 키우는 근대성과 반근대성이라는 이중적 경향에서 나왔다.



입만 열면 거짓말로 일관했던 이명박 정부와 공약 파기나 축소가 최대 무기인 박근혜 정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결코 한국적 상황만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물론 북한이라는 존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지정학적 한계를 무시할 수 없지만ㅡ이를 이용해 자신의 권력의 원천으로 삼는 정부와 세력이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지만ㅡ마찬가지로 참여정부도 이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4.19와 5.18정신과 고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과 합의한 6.15선언과 10.4선언을 당론에서 배제하려 했던 안철수 의원의 한심한 행태는 어떤 말로도 변명될 수 없다. 이것은 본질에 관한 문제여서 몇 마디 정치적 수사로 바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명박처럼 안철수 역시 기업의 CEO 출신임을 명심해야 한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이렇게까지 무력해진 책임은 김한길 대표와 문재인 의원의 리더십에 있다. 물론 편파적인 방송들이 이른바 친노 죽이기에 일치단합한 것에서 나온 이유도 있다. 정치와 정당의 보수화와 관련된 제반의 상황에 대해서는 별도로 다룰 생각이다). 



국정원이 정치의 전면에 부상해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있는 것과 미국의 NSA가 기타 정보기관들과 정보통신업체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전 세계의 지도자들과 유력 정치인, 재계의 거물,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각 분야의 엘리트들은 물론 타국의 국민들을 상대로 무차별도감청을 자행한 것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우리가 보지 못하고 들으려 하지 않을 뿐이지, 최종적으로는 인류에게 유토피아를 선사할 것이라는 기술-경제적 진보의 내부에서는 본래의 모습ㅡ변함없는 사탄의 맷돌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ㅡ을 감춘 사회변화가 무서운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현대의 국민국가는 기술-경제적 요구와 변화에 따라 민주주의의 원리가 적용되는 분야를 갈수록 줄이고 있으며, 국민의 예산으로 돌아가는 정부의 역할과 기능을 이런저런 방식을 동원해 민영화하고 있으며(대부분 완전한 독점이 이루어지고 있거나, 흑자를 내는 것부터 민영화된다), 그 대신에 기술-경제적 특권그룹과 부딪치지 않는 영역에서, 즉 시장권력과 충돌하지 않는 선에서 전통의 영토에 적용되는 주권의 독점적 사용에 전념하고 있다. 국익과 민생이라 하는 마약ㅡ다른 말로 해서 상위1%와 지배엘리트에게 돌아갈 이익과 권력을 숨기기 위해 국민의 의식에 주입되는 마약을 통해 국민을 착취하고 있다.  





결국 기술-경제적 진보의 방향은 기술 발전에 따른 사회의 변혁을 강제하는데, 그 속도의 가속이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는 점에서 문화적 변화를 동반하는 인지부조화 상태를 늘리거나, 급격하게 줄이고 있다. 특히 대규모 토론이 불가피한 핵발전소 문제와 지구온난화 문제처럼 국민의 인식을 바꾸는 문화적 변화가 필수요소로 등장하게 된다. 이로써 TV로 대표되는 대중매체와 인터넷 및 SNS라는 하위정치 영역이 집중조명을 받게 된다. 이는 신화에서 나와 닐 포스트만이 말하는 《테크노폴리》의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는데(감시사회와 자동화에 관해서는 별도의 글로 다룰 생각이다), 여기에 이르면 계몽의 변증법이 인류에게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다루었듯이, 계몽의 비진리성은 그것의 발전이 끝에 도달하면 폭력성이 극에 이르러 파시즘적 전체주의자로 넘어갈 수밖에 없음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닐 포스트만에 따르면 ‘테크노폴리’는 “특정 기술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들은 권력을 축적하는 한편, 기술이 가능케 하는 전문적 지식을 습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불리하도록 자기들끼리 서로 결탁하는 필연적 결과를 낳는다”고 한다. 이는 수많은 학자들이 밝힌 것으로 작금의 정보사회가 감시사회로 넘어가면서 전 지구적으로 부는 상층부에 쌓이고, 위험은 하층부에 쌓이는 현상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21세기에 들어 세계경제를 좌지우지 하는 기업들이 초국적 언론기업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정보통신 기업이며, 그들 모두가 네트워크 효과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애플과 삼성전자, 구글과 MS로 대표되는 4개의 초국적 독과점기업들이다.



끊임없이 나오는 신제품에 열광하는 것이 승자의 덕목이고 생존의 필수사항이라며 대중을 현혹시키는 이들은 대중매체와 대형 스포츠행사의 광고를 독점하고, 노동유연화를 내세워 정규직을 대폭으로 줄여서 조달한 천문학적인 인건비를 마케팅 비용으로 지출하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그 생산지가 어디인지,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복잡한 생산과정을 통해 원가에 수배에서 수십 배에 이르는 뻥튀기 가능한 브랜드와 로고의 신화를 창조했다. 



시계의 발명으로 가능해진 초 단위까지 계산한 노동 분업으로 노동자를 착취하고,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수용소 같은 공장에서 저임금 노동을 하고 있는 젊은이들(특히 부당한 권위에 대항하지 못하는 빈곤층 여성이 많다)이 생리와 섹스 임신과 낙태, 각종 성추행과 성폭행을 당하면서 만들어낸 제품에 붙이기 위해. 잔업을 거부하는 행위는 해고의 사유가 되며, 잔업수당을 꼬박 챙기는 것도 해고의 사유가 된다. 세상의 눈에 띠지 않는 곳에서, 지역 정부의 묵인 하에 18~19세기에나 있을 법한 노동착취가 자행되는 것은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이것밖에 없다는 진보의 신화를 끊임없이 주입한 결과에서 나왔다. 



또한 19세기의 후설과 블랑키, 마르크스, 20세기의 벤야민과 폴라니, 푸코와 이스트만, 라캉과 데리다, 딜뢰즈, 엘리아스와 아렌트, 21세기까지 이어진 로티와 네그리, 바우만과 아탈리, 클라인과 벡, 다이아몬드와 스티글리츠 등으로 이어지는 수없이 많은 석학들이 끝없이 경고했던 기술-경제적 발전에 내재해 있는 전체주의적 폭력성을 ‘탐욕의 삼위일체’가 대중매체와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해 개인과 사회 및 시민의식을 사회문화적으로 변화(퇴행)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5.07.13 08:30 신고

    사법부의 판단이 권력을 향한 해바라기 판단으로
    기울수록 민주주의는 현실에서 멀어져 갑니다

    요즘 하는일마다 위헌입니다

    • 늙은도령 2015.07.13 17:40 신고

      최소 민주주의로 가고 있습니다.
      정말 답이 없습니다.
      이제 노골적으로 나가네요.

  2. chemica 2016.05.29 09:49 신고

    잘 보고 갑니다 ..
    공감 .. ^^

  3. 2018.06.11 04:33

    비밀댓글입니다

    • 늙은도령 2018.06.11 19:46 신고

      글은 많이 쓰면 느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찰의 깊이이니 저보다 뛰어나실 수 있습니다.



칸트(특히 《판단력비판》과  《숭고에 대하여》) 이래로 수없이 많은 철학자들이 예술에서 미래의 희망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 이후로 벤야민과 아도르노, 푸코와 부르디외 등을 거치면서 미학이란 이름으로 보다 아름답고 정의로운 세상을 찾아가는 고민들이 예술에서 희망의 단초를 찾으려 했습니다.



벤야민은 자본주의의 미래를 이 그림에서 봤다



이들은 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 참혹한 인류의 미래를 예견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언어 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대중매체와 분업의 논리를 극대화한 기업을 앞세워, 냉혹한 자본주의가 돈과 조직의 논리에 따라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어떻게든 늦춰보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이들은 모든 것을 파괴해야만 진행이 가능한 자본주의의 본질과 이를 포장해야만 하는 대중매체의 본질을 꿰뚫어봤던 것입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현대의 문화는 매스미디어로 대표되는 대중매체가 독점하고 있습니다. 칸트에 의해 철학이 하나의 학부로 내려앉은 것처럼, 예술이 문화의 한 부류에 속한다면 이들의 희망은 이제 종지부를 찍은 것 같습니다. 대중매체가 자본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니 미학은 고사하고 자본의 논리로부터 벗어나는 일조차 힘겨운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압축성장을 신의 축복처럼 생각하는 대한민국에서 자본의 논리를 확대재생산하는 첨병 역할에 충실한 대중매체에게서 일말의 희망이라도 찾는 것은 어불성설을 넘어 어리석음의 극치이겠지요. 이런 면에서 볼 때 ‘미생’은 미운오리 새끼 같은 존재입니다.



자본의 논리가 집적된 대기업을 비정규직과 상시 구조조정의 대상인 직원들의 눈높이에서 다루고 있는 ‘미생’은, 미학적 입장에서 보더라도 참으로 좋은 드라마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연출력의 디테일과 캐릭터의 힘이 돋보이는 '미생'은 가장 자본주의적이지만,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린 종합상사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탁월한 선택을 보여줍니다.





대기업을 소재로 한 지상파 방송사의 드라마가 막장을 넘어 비현실과 왜곡과 저급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가운데, ‘미생’이란 드라마는 한줄기 소나기처럼 시원하기까지 합니다. 원작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미생’이 어떻게 끝날지 모르겠지만, 과거보다 더욱 열악해진 근무환경이 성장할수록 파괴하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제대로 짚어내고 있습니다.



오늘 16국에 나온, 베이비붐 세대를 대표하는 듯한 인물이 ‘안은 전쟁터이지만 밖은 지옥’이라는 대사는 가히 일절이라 할 만합니다. 자본의 논리에 철저하게 지배당한 현실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할 정도입니다. 자신의 노동력을 값싸게 팔아야 들어갈 수 있는 기업이 그 밖의 모든 곳보다 안전한 곳이 된 현실을 압축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이 대사는 21세기의 인간이란 대기업에 들어가야만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개인의 노동력(과 가족)을 쥐어짜 오너 일족과 대주주의 배를 불려주는 대기업이 아니면 제대로 돈을 벌수도 없고, 안정적 삶도 불가능한 것을 말해줍니다. 은퇴하거나 정리해고 당한 자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것을 말해주면서.





산업혁명 이후 250년 정도가 흘렀을 뿐인데, 인간은 돈이 없으면 한시도 살아갈 수 없는 환경에 놓이게 됐습니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가 약속한 것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였음이 너무나 분명해졌음을 오늘의 명대사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가족은 스위티홈이 아니라 지옥의 필수요소가 됐구요.



장그래를 비롯해 ‘미생’에 나오는 신입사원들의 능력이란 놀라울 정도인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기업이 진정한 지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그래 정도의 능력(나머지 세 명도 마찬가지이지만)을 지닌 신입사원이 계약직이라는 이유로 정규직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이 지옥이지 다른 무엇이겠습니까? 



장그래가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는 저로서는 ‘미생’을 계속해서 볼 수밖에 없지만, 글을 마치며 제가 ‘미생’을 미운오리 새끼라고 한 것에 대해 짧게 부언할까 합니다. 지금까지의 내용과 결말이 어떠하던 간에 ‘미생’은 은연중에 기업을 미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대중 드라마로 담아내려니 그럴 수밖에 없음은 압니다. 검열에서 벗어난 드라마는 방송을 탈 수 없기 때문에, 모든 대중매체는 내재화된 자체 검열의 수준에서 현실을 담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자본주의와 시장의 논리가 세상을 지배하는 현실에서 대중매체가 그려내는 현실이란 자본과 시장의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미생’이 미운오리 새끼임은 이 때문인데, 드라마가 끝나면 ‘미생’이 속박된 백조의 꿈을 접은 자유로운 오리인지 알 수 있게 되리라 기대해봅니다. 어리석을지 모르겠지만 기업이 지옥일지언정 기업의 밖은 지옥이 아니길 기원해봅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그리고 아직도 선택할 수 있는 대안적 삶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hans 2014.12.07 07:24

    자본주의가 사람이 가난에 허덕이거나 배고파서 죽는 현상을 없앴습니다.

    인류의 경험과 지식이 묻어나는 제도죠.

    이기심을 긍정적으로 본 자본주의는 경쟁을 바탕으로 꽃을 피웁니다.

    소수가 능동적이고 나머지가 수동적인 시대에 살았다면 자본주의로 인해서 모두가 능동적으로 살아야 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능동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죽게됩니다.

    이러한 경쟁에 대중은 공정한 경쟁을 원하게 되고 사람이 시장의 한복판으로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시장에서 상품이되고 스펙이되며 성형이 됩니다.

    이기심이 허락되는 집단은 생태계와 같습니다.

    장그레를 조직에서 허락할 수 없는 이유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공정한 기회에 대한 대중들의 눈 때문입니다.


    원래 세상은 지옥과 같습니다.

    예전도 그랬고 현재도 그랬으며 미래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며 또한 아름다운 것이라고 봅니다.


    이미 인류는 가둬져서 안락하고 편하게 길러지기를 포기하고 세상속의 자유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선택이 있기에 인생이 아름답습니다.

    • 늙은도령 2014.12.07 08:28 신고

      그래서 자본주의의 결과가 전 세계 인구 중 40%에 이르는 30억 명이 1~2달러 이하로 살아게 된 것인지요?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수없이 소모하고도 이런 결과가 잘 된 것인지요?
      아담 스미스가 아주 작은 지역의 시장을 보고서 터무니없는 확대를 감행한 국부론의 내용이 단 한 번도 성립된 적이 없었습니다.
      자본주의는 그 시작부터 파괴를 전제로 한 성장을 택했고, 그 바람에 인류 역상 유래없는 불평등을 만들어냈습니다.
      자본주의의 초창기부터 그 냉혹한 본질을 파악한 수많은 지식인들의 고발과 저항이 있었기에 그나마 이 만큼 온 것에 불과합니다.
      지구온난화와 토지의 사막화, 환경 오염과 생태계 파괴를 넘어 이제는 인간조차도 자본의 노예가 됐습니다.
      인간의 이기심이 조화를 이룬다는 아담 스미스의 형편없는 착각은 이미 논의 대상에서 벗어난지 오래입니다.
      자본주의는 죽음의 논리이지, 창조의 논리가 아닙니다.
      아무리 자본주의를 미화하려고 해도 상위 1%가 전 세계 자산의 45%를 차지하는 불평등은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경제규모 세계 14위인 한국에서도 점심을 굶는 사람이 수십만 명인데 무슨 자본주의가 자유의 선택이라 말할 수 있는지요?
      자본주의란 자본의 논리에 인간을 수동적으로 길들이는 체제지 개개인이 선택해서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체제가 아닙니다.
      선택이 제한된 곳에서 정말로 행복하고 인생이 아름다우려면 악마의 탐욕을 자유시장의 어둠에 숨겨둔 자본주의부터 거둬내야 합니다.
      공생과 공존이 가능하고, 진정한 자유를 선택하려면 다양한 삶의 형태가 가능해야 하는데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마저 작동 불능으로 만든 이후로는 인간의 삶이란 노예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현 체제에서 진정한 의미의 자유로운 선택은 없습니다.
      자본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후에나 개인 자유로운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다.
      님이 말하는 선택이란 체념이고 길들여지는 것이지 자유가 아닙니다.
      일용직이나 비정규직이 자유로운 선택이라면 그것은 무력함의 표현일 뿐입니다.
      원래 세상이 지옥과 같다면 세상을 없애야지요.
      그래서 전혀 다른 세상을 만들어야죠, 거기에 길들여지지 말고.
      그것이 자유로운 선택입니다.

  2. 공수래공수거 2014.12.08 08:45 신고

    요즘 이 드라마가가 화제이더군요
    이야기만 들었는데 한번 몰아서 봐야겠습니다

  3. guqrnp 2014.12.08 09:22

    요즘 윤태호처럼 웹툰으로 현실을 더 잘 보여주고 있네요.
    드라마는 막장...그러나 오만과 편견은
    우리나라 현실을 잘 보여 주고 있던데요?

    • 늙은도령 2014.12.08 18:31 신고

      아... 제가 보는 드라마가 미생 뿐이라서요.
      지상파 드라마는 잘 모릅니다.

  4. 덕산 2014.12.08 12:27

    미생이후 사석이라는 제목으로 특별 5부작을 내놓았는데
    이것이 미생보다 더 많은 여운을 남겨 주는 것 같았습니다.

    • 늙은도령 2014.12.08 18:34 신고

      나중에 한 번 봐야겠네요.
      제 조카가 5년쯤 후에는 웹툰 작가가 될 것 같은데 그때 '미생'보다 더 생생한 대기업 얘기를 해줄 생각입니다.
      건강만 허락해주면 우영워드를 끝낸 후에 시작하려고요.



앞의 글에서 ‘fuck your money(외부의 권위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경제적 여력)’을 다루었는데, 그 기원은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까지 올라간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정치가 이루어지는 공적 영역인 아고라에 참여하는 시민들에게 평등함을 보장했다.





이런 고대 아테네의 평등 개념은, 모든 인간이 침해불가능하고 양도불가능한 기본권인 ‘생명, 자유, 재산’을 가진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그 사실만으로 평등하다는 현대의 평등 개념하고는 다르다. 도리어 아테네 시민들은 인간이 계급과 재산, 능력 등에서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공적 이익을 논의하는 공간인 폴리스에서 자신의 견해를 펼칠 수 있는 평등이 보장되지 않으면 치열한 논쟁이 필수적인 정치가 작동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시끄럽고 지루하고 치열한 토론과 논쟁을 거쳐야만 공정하고 공평한 정치적 합의에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정치철학 때문에 강제성이 있는 법을 통해 공적 영역에 참여하는 시민들에게 정치적 평등을 제공하는 인위적인 제도인 폴리스가 탄생할 수 있었다. 정치가 제 역할을 하는 민주주의는 시끄러운 법이고, 정치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국민의 아우성이 통치자에게 가장 잘 들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대 의회의 기원을 고대 폴리스에서 찾는 것도 이런 아테네 고유의 정치철학을 배경으로 한다. 법이 보장하는 인위적인 공적 영역인 폴리스에서는 참여자들의 완전한 평등 속에서 폭력이 배제된 치열한 토론을 만들어내는 말(토론을 통한 정책 결정)과 그것을 통해 결정된 합의를 실천(정책 집행)함으로써 폴리스 전체에 이익이 되는 공적인 합의(정치)를 최상의 상태로 유지할 수 있었다.



비록 폴리스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재산과 노예를 소유하고 있어 독립적인 삶이 가능한 경제력을 지닌 개인으로 한정됐고, 플라톤에 의해 아테네의 정치철학이 꽃도 피우지 못했지만, 고대 아테네의 철학자들은 폴리스에서 다루어야 하는 공적 사안들이 사적인 불평등과 권위 때문에 자유로운 토론이 불가능하면, 공적 이익이라는 공통의 합의를 도출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다시 말하면 정치가 이루어지는 고대 아테네의 폴리스에서는 자유와 평등이 동일한 개념이었다. 정치 참여가 경제적 독립을 이룬 자유로운 시민들에게만 주어졌지만, 바로 그런 경제적 독립에서 나오는 자유가 폴리스에서의 정치과정에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더구나 아고라로 대표되는 정치의 광장은 모두에게 열려 있어 공통의 합의에 이르는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됐다. 현대의 민주주의는 이런 고대 아테네의 정치철학과 실천을 기반으로,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구호처럼 정치 참여가 제한된 사람들이 피와 목숨과 과세를 대가로 시민권의 확대가 이루어지면서 정립됐다. 자연법사상에서 발전한 근대의 평등 개념 등이 더해지면서 현재의 민주주의에 이르렀다.



헌데 공적 영역에서의 인위적인 평등을 보장한 것이 정치 참여자들의 경제적 독립(fuck your money)에 근거한 폴리스의 법과 제도였다면, 현대에 이르러서는 법(성문법과 관습법)에 의해 정립된 정치제도와 사회제도 때문에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커지고, 기득권 위주의 언론권력이 등장하면서 공적 영역에서의 정치가 불투명하고 불평등하게 됐다.



이런 역사의 아이러니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사회경제적 평등이 일정 수준 이상 전제되지 않으면 민주주의가 퇴행하다는 사실이다. 인류가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으로 대표되는 각종 폭력혁명과 1, 2차세계대전 등을 거치면서 시민권 확대를 통해 폭력이 배제된 현대의 민주주의를 이룩했지만, 신자유주의 40년 만에 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정치 참여의 핵심인 자유의 실질적 행사가 제한됨에 따라 민주주의는 고대 아테네보다 못한 수준으로 퇴행했다. 절대군주제에서처럼 여론은 집권세력이 정책을 집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고, 민주적 선거들은 4~5년 동안 국가를 지배할 임기직 행정가를 뽑는 것으로 요식화됐다.



정치가 자유로운 토론과 그것을 통해 결정된 공적 합의를 실천하는 것에서 세습권력의 기반이 되는 경제력의 크기에 따라 좌지우지되면서, 자유와 평등이 하나로 응축된 1인1표가 1원1표로 둔갑해버렸다. 모든 것에 가격이 매겨진 시장경제 하에서 경제력은 곧 권력의 원천이라 민주주의는 금권정치라는 과두정치로 변질됐다.



앞의 글에 이어 오늘의 글까지, 두 편으로 나눠 ‘fuck your money'에 담긴 역사적 의미를 설명한 이유는 사회경제적 평등이 현대의 민주주의를 지탱하기 위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말하기 위함이었다. 고대 아테네의 폴리스에서 기원한 민주주의는 자유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불평등이 커지면 작동하지 않는다.



결국 각종 불평등을 강화하는 정치를 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은 민주주의(특히 기득권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자유민주주의)라는 가면을 쓴 채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역사를 돌아보면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커질수록 민주주의의 축소되고 퇴행된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독재시대의 산업화세력들이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력이 바탕이 돼야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며, 민주주의를 이 땅에 정착시킨 공로가 자신들에게도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물론 이것은 부분적 진리로 보편적 진리를 대체하는 것이라 참이 될 수 없지만, 부분적 진리인 것만은 사실이다.



따라서 일베충과 알밥, 서북청년단들이 좌빨이니 빨갱이니 하면서 비판해야 할 정치인과 정당은 불평등을 조장하는 정치를 자행하는 정치인과 정당이지, 사회경제적 평등을 요구하는 정치인과 정당 및 시민들이 아니다. 일베충과 알밥, 서청들은 차라리 독재시대가 낫다는 자들과 동일하게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자들이다.



다음 글에서는 현대물리학을 통해 자유와 평등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다루고, 그 다음에는 민주주의를 축소시키는 대중매체의 테크놀로지(미디어정치의 근간)에 대해 다룰 예정인데, 그에 앞서 거칠게나마 ‘fuck your money'에 내포된 민주주의의 원리를 다룬 것은 이 땅의 진보가 지금보다 더 무너지면 민주주의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아니 되찾고, 이승만과 박정희 시대 이래 이 땅의 서민과 노동자를 대변해온 진보 세력의 대오각성과 분연한 부활을 기대하면서.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중용투자자 2014.10.07 11:22

    사회경제적 평등이 유토피아적 발상이 되어버린 난국입니다.

    • 늙은도령 2014.10.07 11:38 신고

      미국만이 혁명에 성공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빈곤의 절박성이나 역사의 필연성을 경험하지도 못했고 고력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혁명은 그것 때문에 일어났지만,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혁명이 가장 위대한 혁명인 것은 불평등이 갈수록 커지는 자본주의를 이해하지 못한 철학자들의 무지함 때문입니다.
      매우 어려운 문제라 쉽게 풀어쓴 글입니다.

  2. 바람 언덕 2014.10.07 12:12 신고

    도령님의 글을 정말 읽으면서 공부가 되는 글이네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글을 읽으면서 민주주의와 경제, 민주주의와 정치에 관해서
    배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건강만 하세요...
    ^^

    • 늙은도령 2014.10.07 12:24 신고

      네,님도 건강하세요.
      좋은 글을 통해 많은 분들에게 좋은 성찰의 기회를 주시길 바랍니다.

  3. Konn 2014.10.07 21:08 신고

    지금처럼 빈부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는 상태에선 절대로 사회적 평등이란 없죠, 특히 경제적 상태에 따라 더 많은 권력이(심지어 초법적일 수도.) 모이는 한국 사회에서는 더더욱.

    • 늙은도령 2014.10.07 21:54 신고

      네, 그래서 근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비폭력 혁명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박근혜와 최경환이 임기를 마칠 때쯤이면 이 나라가 얼마나 망가져 있을지 걱정입니다.
      그 전에 막아야 하는데 야당은 능력이 안 되고 방송은 장악된 상태로 국민이 스스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정치철학이 확실한 사람들이 모여 세상을 바꿔야 합니다.
      정당만 믿을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간 것 같습니다.



진보좌파는 자신의 정체성(이념)을 사회와 국가의 절대다수를 차지하지만, 자본주의와 자유방임 시장경제, 대중매체 등이 만들어낸 결과들이 소수의 기득권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절대다수의 비기득권에게 불리하기 때문에 이를 최소화하거나 극복하는데 정치적 목표를 둔다.



민주주의와 대중매체가 보편화된 20세기 후반부터 사실상 폭력적 혁명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좌파는 정치행위를 통해 이념적 가치인 다양한 방식의 차별을 줄이고 부와 기회의 불평등을 줄여야 했다. 폭력 혁명의 필요성을 놓을 수 없었던 좌파의 투쟁방식은 설 자리를 잃게 됨에 따라, 진보라는 투쟁방식의 정치적 변화를 선택했다.





여기에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그냥 시장의 확대에 불과하다)가 더해지자, 이념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공론장의 구조변동’이 이루어졌다. 공동체나 지역 단위의 공론장은 국가 전체와 세계를 거의 동시에 보여주는 대중매체의 속도에 의해 무너졌다. 인식의 출발점인 시각적 단위가 커지면 전통의 공동체는 너무 작아서 무의미해진다.



기본적으로 대중매체의 테크놀로지는 현실의 피폐함보다는, 꿈이나 희망처럼 좋아 보이는 것, 재미있어 보이는 것, 낙관적이거나 긍정적인 것, 대세(특히 대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드라마와 각종 쇼, 연예인 스캔들 등)를 이루고 있는 것 등을 보여주기 마련이다. 대중매체는 전파를 타는 콘텐츠가 시청자를 중독(인터넷은 재접속)시킬 수 있어야 이익을 만들 수 있다.



이 때문에 대중매체는 시청자와 이용자들이 보기에 좋은 것, 재미있는 것, 복잡하지 않는 것 그래서 깊은 생각 없이 표피적인 인스턴트 쾌락에 빠져들게 하는 것들을 양산한다.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치열한 토론과 장기적인 노력이 필요한 정치적인 것들마저 몇 초 만에 판단할 수 있는 즉시성을 띠어야만 대중매체를 탈 수 있다. 시청자들이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죄악이다. 





인터넷과 SNS 등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은 이런 경향을 더욱 심화시켰다. 단문 위주의 재잘거림인 트위터나, ‘좋아요’에 따라 글의 가치가 정해지는 페이스북, 말의 결핍을 불러오는 카카오톡 등은 정치의 몰락이나 정치철학, 즉 이념이 추구하는 것을 질식사시킨다. 정치는 늘어나지만 이념적 정체성은 희박해진다.



무엇보다도 정치의 본질인 말(토론)이 메시지와 영상, 단문 등으로 대체됨에 따라 상징조작이 일상화됐고, 욕망과 감성을 자극하는 것들이 여론을 형성하고 선거의 승리를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내는 정치의 역할에서 치열한 토론과 냉혹한 현실 인식이라는 공익을 창출하는 과정이 힘을 잃었다.



이때부터 세상의 보수화가 압도적인 우위를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욕망과 쾌락에 대한 상징조작이 난무하는 미디어정치가 이념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상대와 치열한 토론을 거쳐, 보다 유리한 합의에 도달하는 과정으로서의 정치가 갈수록 피곤한 것이 된다. 즉 쿨하지 못한 것이 정치가 됐다.



사회경제적 평등이 전제될 때 ‘자유의 왕국’으로서의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좌파의 이념(전체화하는 경향과 개인화하는 경향이 있는 국가의 특성과 함께 봐야 한다)은 무용지물이 됐다. 태생과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방임적 자유를, 법이나 제도에 의해 보장되는 자유로 제어하지 않으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무한경쟁과 적자생존이 절대적 힘을 발휘한다.



헌데 이런 인식이 대세를 이루면서 강준만류의 오류가 발생한다. 무한경쟁과 적자생존을 막기 위해서는 기존 질서와 제도를 인정하는 상태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전제를 이룬다. 이런 현실 인식은 현재가 최선의 결과이고, 기득권을 인정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에 가장 보수적이다.





‘정치가 타협’이라는 강준만의 진단은, 폭력 혁명이 불가능해진 20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 좌파적 이념을 정치적으로 풀어보려는 진보진영에게 끝없는 양보라는 정치적 타협을 강제하는 올가미로 작용했다. 신자유주의와 미디어정치의 약자인 진보진영이 좌파적 가치를 실현하려면 기득권을 인정하는 ‘싸가지’부터 갖춰야 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치에 대한 이해가 생긴 이래, 이념의 다른 말인 정치철학이 추구하는 것은 탄생과 함께 결정된 불평등을 정치라는 과정을 통해 공익이라는 사회적 합의를 도출함으로써, 후천적인 평등을 이루는 것이었다. 동서양과 종교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제시되는 행동의 황금률이나 사회적 정의가 바로 그것이다.



근대이성이 '계몽의 변증법'으로 산업혁명 이후의 역사를 욕망과 쾌락의 실현에 방점을 두면서 이념적 분할이 이루어졌다(프랑스혁명도 이념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시민권의 확대와 현대적 의미의 역사도 이때를 전후로 해서 이루어지고 정립됐다. 언제나 기득권의 이익에 봉사했던 정치가 공평, 공정, 정의, 평등의 구현이라는 철학을 되찾은 것이다.



이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달라진 것이란 과학기술의 발전과 대중매체의 보편화에 따른 신자유주의적 통치의 발전뿐이었다. 공간을 시간으로 점령하는 세계화란 이 두 가지의 지원 하에 정치에서 철학적 가치를 담고 있는 이념을 배제시키는 과정이었다. 마키아벨리적 추문을 정치의 전면으로 끌어올린 것도, 정치를 마케팅으로 바꿔버린 미디어정치다. 한국의 경우 언론인(특히 기자와 앵커)이 정치로 옮기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대중매체가 보수적 가치를 지향하기 때문에 강준만식의 진보 비판이란 그 자체로 보수화를 의미한다. 대중매체가 주도하는 미디어적 시각에서 보면 ‘풀뿌리 민주주의’가 진보의 정답인데, 그것을 이루는 방식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국민의 수준이 그 나라의 정치 수준’이라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국민의 수준이 높다고 정치가 이념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차별을 조장하는 엘리트주의가 부활하고, 노력보다 능력이 중시되고, 결과의 평등을 강제하는 것들이 갈수록 힘을 잃는 부정의로 가득한 현실에서 국민을 계몽시키면 정치와 민주주의의 수준이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강준만식의 진보 비판과 시대 진단은 그저 지식인을 자처하는 자들의 언어적 유희일 뿐이다.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정치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적당한 타협이 아니라, 사후적 평등을 추구하는 정치과정을 통해 모든 개인이 또 다른 시작을 할 때, 다음세대들이 본격적으로 출발을 할 때, 공정하고 공평한 경쟁과 공존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자유와 평등에 의해 균형과 견제가 가능하도록 사회와 국가를 제도화하고 투명하고 예측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게 만들되, 어쩔 수 없이 참사가 일어나면 가장 민주적인 대처가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게 인류가 민주주의를 지배적 체제로 선택한 이유다.  



거의 모든 국민들이 삶에 찌들어 있도록 만들어, 풀뿌리 민주주의조차 불가능하도록 만든 것이 20세기 후반부터 정치권에서 이루어진 타협의 산물이었다. 다시 말하면 20세기 후반부터 정치권에서 이루어진 타협이란 우파적 가치를 강화하는 것이었다는 뜻이다. 



달라진 것이란 20세기 후반보다 모든 면에서 불평등이 늘어나 풀뿌리 민주주의는커녕, 자식의 죽음을 대중매체를 통해 생중계로 보았지만 부모들이 목숨을 건 단식이 아니면 진상규명에조차 다가갈 수 없는 정치적 타협을 가장한 야합이 늘어난 것이고, 진보 지식인을 자처했던 자가 타협하라고 유족들에게 대목을 박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정치적 타협과 투쟁의 방식을 바꾸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철저하게 보수화되고 재봉건화된 세상에서 진보가 싸가지라도 없으면 무엇으로 버틴단 말인가? 진보에게 싸가지 없다고 욕하기 전에 진보를 싸가지 없게 만드는 대중매체와 극단의 불평등이 초래한 현실의 부정의함부터 제대로 인식하라. 역사상 최고의 추문으로 유명해진 마키아벨리적 접근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싸가지 없는 진보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싸가지다. 진보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가 말이라는 것을 되살려내고, 보수진영은 애초부터 정체성이 없어 상황에 따라 변신하는 기회주의적인 집단이며,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욕망과 쾌락을 잘게 나눠 분할해서 지배하는 집단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인류가 선택한 민주주의는 일정 수준 이상의 사회경제적 평등을 보장하기 때문이며,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최종적 결과의 불평등을 끊임없이 최소화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진보진영에 필요한 것은 이념의 본질을 되찾는 것이며, 유시민처럼 싸가지가 없어도 정치의 본질이 말에서 출발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행동은 말보다 일관성을 유지하기 쉽다. 그래서 자본주의와 자유방임 시장경제, 신자유주의적 통치가 각종 불평등을 양산하고 인류를 공멸의 위기로 내몰았다는 것이 판명난 지금, 보수가 토론을 피하고 대중매체를 동원해 상징조작에 전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보수 비판에 적용해야 할 것을 강준만 교수는 진보에게 적용했다. 최소한 지금까지의 대중매체 인터뷰와 기사와 칼럼 등을 기준으로 하면. 즉 강준만은 더 이상 진보 지식인이 아니라 보수 지식인이다. 세상이 변했다고? 아니, 더 나빠졌을 뿐이다. 현재의 대한민국에선 아우성치며 시끄럽고 싸가지 없는 것이 차라리 낫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중용투자자 2014.10.01 08:50

    진보,보수,중도 이런 프레임에 가둬두고 판단을 한다면 어떤 사람도 피해갈 수 없을 듯합니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지 유심히 지켜봐야 할 듯합니다.

    • 태봉 2014.10.01 11:20

      제 개인적인 생각은 약간 다릅니다 이 세상은 결국은 각자가 프레임을 통한 세계를 보고 경험합니다 그래서 중요한건 프레임의 내용인 이념적 가치관,세계관의 정확하고 바른 정립이 우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재벌 ,정치,미디어권력 등 기득권세력에 의해서 중도,보수,진보라는 개념이 잘못 인식되고 있습니다 늙은 도령님이 말씀하였듯이 가치와 보존,국익추구가 보수일진데, 사익에 눈이 먼 수구를 보수로 잘못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거짓된 프레임에 대중들은 쇄뇌되어 있어서 그들은 그들을 잘 이용해 먹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각자의 개인적 시각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세상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의 정립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님의 말씀처럼 수구는 사적이익에 몰빵하므로 수구는 수구식으로 행동일치가 가장 잘되나 봅니다ㅋ
      이상 아무것도 모르는 넘이 재잘거렸습니다

    • 늙은도령 2014.10.01 22:31 신고

      이념적 깊이란 말과 행동의 일치를 불러옵니다.
      최소치가 아니라 최대치로요.
      정치적 기술만 늘뿐, 이념적 이해가 부족하면 정치는 언제나 기득권의 놀이터가 됩니다.
      국회에 다양한 계층의 정당이, 다양한 이해가 충돌하는 집단의 일원이 진입해야 하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는 합의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것들이 이루어집니다.
      헌데 거대 양당체제에서는 둘만의 이해만 일치하면 됩니다.
      아무리 첨예하게 대립해도 그들만의 이익만 왔다갔다 하는 것이어서 그 과정에 국민이란 없습니다.

    • 늙은도령 2014.10.01 22:34 신고

      그럼요, 태봉님.
      이념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확고한 실천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기득권이 만든 논리인 타협이 최상인줄 압니다.
      보수는 바꾸지 말고, 최대로 해도 기존의 것들을 바탕으로 한 혁신을 주장합니다.
      이미 벌어진 차이는 줄어들지 않거나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진보는 이것을 정치과정을 통해 줄이고, 줄이고, 그러다가 역전도 가능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이념적 이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영원히 승자와 강자의 세상만 계속됩니다.

  2. 지나는독자1 2014.10.02 09:58

    늙은도령님, 또 다른 지식인, 운동가들은 말고, 시민단체도 말고, 지금 야당 정치인들은 야당이 중도층 표를 얻어 집권"하려면 반드시 강교수 이야기를 새겨들어야 할 듯.... 싶네요. 진보가 되었건 좌파가 되었건 싸가지가 없으면 다른 건 몰라도 '집권'은 절대로 못합니다. 강교수 말은 쉽게 말해 그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쟤들은 더 심하잖아'라고 말하는 건 집권하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현실을 직시하라는 게 또 강교수 말이라고 봐요.^^

    • 늙은도령 2014.10.02 14:17 신고

      강준만의 진단은 단기적 승리를 위한 하책입니다.
      강준만은 국민의 수준이 그 나라의 민주주의의 수준이라고 하면서, 국민을 끌어올리야 한다는 방법으로 방법적 접근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또다시 무너질 수 있습니다.
      솔직히 보수와 진보 모두 차이가 없어졌습니다, 방법적으로는요.
      그래서 결국은 이념, 즉 가치를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
      강준만의 진단에는 일부 동의하지만, 그는 기본적인 것을 놓쳤습니다.
      기본이 흔들린 성공은 일시적이고 어쩌면 영원히 집권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진보보고 보수를 따라 하려면 절대 못 이기지요.
      진보의 강점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해요.
      강준만은 반대로 풀었습니다.



표상만 보면, 무능력한 새정치민주연합에게, 마치 개처럼 기어서 국회에 들어오라는 새누리당의 초강경모드가 도를 넘었다. 새누리당은 정치쇼로 보이는 자당 출신 국회의장의 사퇴 요구를 넘어, 제1야당의 정치적 선택과 전략까지 자신들이 결정하려 한다. 민주주의에는 대의민주주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민주주의도 있다. 국회의원은 그냥 국민을 대의만 할 뿐이다.



이런 것까지 아예 무시하는 새누리당은 초강경모드를 내세워 3자합의를 이끌어내고, 유족을 배제한 채 여야 원내대표가 협상을 하고 있다니, 새누리당의 초강경모드는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여기에 일당 독재국가나 전체주의 국가를 방불케 하는 대중매체의 일사분란한 보도행태가 더해지만 대한민국의 정치는 여당이 결정하고 여당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도록 만들어야 하나 보다. 





헌데 보는 것이 믿는 것인, 대중매체 중심의 미디어정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면, 권력과 자본 편향적인 대중매체가 송출하는 메시지만 가지고 판단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다. 온 국민을 분노시킨 오보를 시작으로, 무려 304명의 국민이 바다에 수장되는 것을 생중계로 지켜본 4월16일 이후, 한국의 정치가 멈춰선 것도 대중매체의 파괴력이 얼마나 큰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자신의 자식이 될 수도 있고, 부모, 형제, 친구, 연인, 이웃 등이 될 수 있는 304명의 국민이 차가운 바다 속으로 수장된 날부터 지금까지의 과정을 되돌아보면 그 중심에는 언제나 대중매체가 있었다. 이루 헤아릴 수 없었던 오보들이 분노를 더욱 키웠고, 조중동을 중심으로 세월호 참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자는 프레임이 설정되며, 국가개조론이란 거대담론이 떠올랐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국가개조를 위해 세월호 특별법 제정의 핵심이 수사권과 기소권 부여로 모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여기서부터 지독한 모순이 발생했다. 기존의 특검법을 넘어서는, 수사권과 기소권이 부여된 특별법을 제정하는 것은 여야의 합의가 필요한 철저히 정치적인 사안이다. 사법체계를 흔들 것이란 논리를 돌파하려면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헌데 세월호 참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면 안 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된 이후였으니, 특별법 제정이 당리당략적 차원으로 넘어가는 당연한 수순이다. 세월호 참사가 이명박 정부의 무차별적인 규제완화와 종교를 이용한 자본의 탐욕, 정경관유착과 대통령의 ‘7시간 미스터리 논란’ 등으로 이어지면서 정부와 새누리당이 방어해야 할 것은 늘어났다.



하지만 야당에게도 책임이 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이용해선 안 된다는 ‘세월호 프레임’은 새정치민주연합의 협상능력에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이런 과정에서 안철수-김한길 공동대표 체제의 새정치민주연합이 출범했으나, 연이은 선거 패배로 제1야당은 자신을 추스르기에도 역부족인 상태로 빠져들었고, 2차례에 걸친 여당과의 합의를 도출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분노가 극단에 이른 세월호 유족이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세월호 피로감이 증가하는 속에서도 국민의 여론은 재협상에 무게를 실어주었지만, 최소한 여야 간에는 공수가 바뀌었다. 느닷없는 유병언의 죽음이 공식적으로 확정됨에 따라 진상규명은 더욱 멀어졌고, 조중동을 비롯해 TV조선과 채널A, MBC, MBN, 연합뉴스, YTN 등이 세월호 피로감을 부추기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모든 것이 뒤엉켜 한 치의 앞도 보이지는 않는 혼란이 가중되며 세월호 참사는 바다에서 산으로 옮겨갔다. 본말이 완전히 전도됐다. 이를 지켜만 볼 수 없었던 유족이 단식에 들어갔고, 교황 방문을 거쳐 동조단식의 확대까지 이어졌지만, 대통령과 정부, 새누리당에게 유리한 국면으로 넘어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집권 1년차를 국정원 때문에 날려버린 대통령과 정부가 강경모드로 돌아선 것은 당연한 수순, 대통령의 지시로 특별법 정부안까지 만들었던 세월호 정국 초중반과는 180도 달라졌다. 세월호 유족과 시민의 반발이 거세지는 것은 당연한 반작용, 국면전환을 위한 대형이슈들이 필요했다. 민생과 경제활성화 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이명박의 집권과 7.30재보궐선거의 승리를 이끌어낸 것도 결국은 경제 아니었던가.



무려 41조원에 이르는 경제활성화 대책을 내세운 것까지는 좋았는데, 재원이 문제로 등장했다. 집권세력은 전통의 지지층인 부자들과 천문학적인 사내유보금을 쌓아둔 재벌과 대기업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보다 유리지갑을 터는 것과 담뱃값․주민세․자동차세 인상으로 대표되는 서민증세, 공무원연금 개혁 등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는 것을 선택했다.





TV조선과 채널A, MBC 등의 광기어린 보도를 통해 세월호 유족의 대리기사 폭행사건을 극대화시켰지만, 서민증세에 대한 국민적 반발이 거세졌다. 여기에 법외노조로 만든 전교조의 기사회생과 반발, 의료영리화에 따른 의료노조의 반발, 새누리당이 간을 본 극단적인 공무원연금 개혁안에 대한 공무원과 가족들의 반발, 인터넷 검열에 대한 사이버 망명이란 부작용까지 겹치면서 현 집권세력이 궁지에 몰렸다.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든 세월호 프레임이 여전히 유효한 상태에서 임기가 정해져 있는 박근혜 정부보다 새누리당에 발등의 불이 떨어졌다. 여기저기서 표가 날아가는 소리가 천둥벼락처럼 내리쳤다. 남은 임기 동안 치적을 쌓아야 하는 대통령과 정부와는 달리 표를 먹고사는 새누리당으로서는 정치적 탈출구와 명분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게다가 세월호 유족을 반국가적 파렴치범으로 몰고 갈 수 있었던 대리기사 폭행사건의 방향도 김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책임으로 방향이 틀어졌다. 국민의 관심을 돌려놓아야 할 인천아시안게임마저 국제적 망신거리가 전락했다. 이 모든 것들을 대부분의 방송이 단신처리하고, 침묵해서 그렇지 국민 여론은 새누리당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다.





결국 새누리당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적 탈출구는 지리멸렬한 정당에서 한 걸음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새정치민주연합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것(자당 출신 국회의장 비판을 기반 삼아) 말고 달리 선택할 것이 있겠는가.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4050세대의 반란(또는 보수화)이 결정적 역할을 했는데, 당장 이들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방법도 없으니 무능력한 새정연을 물고 늘어질 수밖에.



이유 없는 무덤이란 없듯이, 의회정치를 극단까지 몰고 가고 있는 새누리당의 초강경모드에도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다. 일베충과 서북청년단의 만행처럼, 새누리당의 초강경모드들 대중매체가 대량으로 쏟아내는 메시지에 따라 판단하는 것은 시청자와 국민들의 몫이다. 새정연이 새누리당의 초강경모드에 어떻게 화답하던, 그들의 결정에 대한 최종 판단도 국민과 유권자의 몫이다. 



그나마 세월호 유족이 용암처럼 들끓는 분노를 가슴에 묻은 자식들 옆으로 잠시 밀어놓은 뒤, 진상규명을 위한 길고 힘겨운 과정을 받아들인 것은 최악에서 차선으로 가는 슬픈 전환점이 되리라 믿고 싶다. 자유가 앞에 붙어야만 민주주의가 되는 대한민국에서, 세월호 참사의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려면 선거에서 이기는 방법밖에 없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중용투자자 2014.09.29 09:45

    선거에서 이기고 투표에서 지는 부정선거를 발본색원할 대안을 야당은 하루속히 찾아야 할 것입니다. 스콜틀랜드도 결국 부정선거로 반대여론이 승리했다고 유튜브 동영상이 명백히 보여주네요.

    • 늙은도령 2014.09.29 16:24 신고

      스코틀랜드는 독립의 요구가 강한 나라입니다.
      특히 스코트랜드의 지시인들과 노동자들이 강합니다.
      영국 사람들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에이레의 순서로 엄청난 지역차별이 심합니다.
      이것은 직접 형경해 봐야 압니다.
      영국은 지역 차별이 엄청난 나라입니다.
      경상도와 전라도 그런 수준을 넘어섭니다.

  2. 공수래공수거 2014.09.29 15:34 신고

    세월호의 교훈이 쉽게 잊혀지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힘을 내야 합니다

    • 늙은도령 2014.09.29 16:25 신고

      네, 이제는 국민이 나서야 합니다.
      세월호 유족은 쉬게 해주고 우리가 나서야 합니다.
      다만 야당이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야 하고, 이를 유족이 신경써야 합니다.

  3. 잉여왕국 2014.10.01 19:13

    여자들이 쓰는 왕따 수법을 새누리당을 쓴거 같네요
    유가족을 단원고 유가족과 일반인 유가족으로 분리하고 일반인유가족을 이용해서 단원고유가족왕따시키는데 이용한거 같네요
    그리고 종편을 이용해서 세월호 유가족이 노란완장을 찬다느니해서 권력을 행사한다느니 온갖 비난을 다퍼부어 댄거 같네요
    세월호유가족을 사회적으로 고립시켰습니다
    박근혜대통령은 처음부터 유병언한테 다집어 쒸울생각인거 같네요 여자들이 잘쓰는 회피전략입니다
    일반인유가족이참으면하는 생각이 듭니다
    단원고유가족이 없었다면 일주일안에 잊혀질사안이었습니다

    • 늙은도령 2014.10.01 22:40 신고

      전략에서 나온 부분 전술 중에서 긴 시간 동안 이루어지는 것이 왕따작전입니다.
      세월호 프레임으로 시간을 끌 수 있도록 만든 다음 왕따작전을 펼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종의 반작용, 혁명에 대한 반동을 창출한 것이지요.



수많은 정치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듯이, 현대 민주주의는 행정․입법․사법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보도나 해설 등을 통해서 여론에 절대적 영향력을 미치는 대중매체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거대 포털을 중심으로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의 영향력도 늘어나고 있지만, 아직은 거대 대중매체의 영향력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헌데 모든 대중매체 엄정중립을 지키는 것이 아닌 정치적 편향성을 띠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광고에 의해 돌아가기 때문에 자본과 정치권력에 맞서 언론의 사명인 권력 감시와 저널리즘 특유의 비판정신을 유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대중매체의 기술적 본질이 상류층과 오락화를 지향하는 것이어서 권력 편향성과 상업주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 더욱 강화됐다.



특히 한국 언론생태계의 지형도는 박정희와 전두환 독재시대를 거치면서 보수적이며 권력 편향적인 성향이 더욱 심화됐다. 보수정부가 일으킨 IMF 환란을 극복해야 했던 김대중 정부 시절 언론생태계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이 있었지만, 임기 중반부터는 보수언론의 대대적인 반격에 직면해야 했다. 조중동이 보도행태는 금도를 넘었고, 증오의 정치를 일상화시켰다.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시절에는 조중동의 집요하고 끈질긴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대통령 자신도 권력이 언론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야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한다는 언론철학을 가지고 있어, 임기 초반부터 조중동의 융단폭격에 시라렸다. 부동산거품 붕괴와 맞물린 중반에 이르러서는 거의 모든 대중매체로부터 집중포화를 당했다. 이것이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까지 이어진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여기에 새정치민주연합이 몰락한 두 번째가 이유가 자리하고 있다. 참여정부 중반부터 노골적으로 보수 성향을 드러낸 조중동의 공격에 더해, 낙하산 사장에 장악된 KBS와 MBC의 권력 편향성이 강화됐다. 최소한의 보도준칙마저 지키지 않는 무더기 종편의 등장은 진보 진영의 맏형을 자처했던 새정치민주연합은 극도로 악화된 언론생태계에 직면했다.



이렇게 해서 제1야당이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정치적 프레임이 설정됐고, 신자유주의의 번성에 따른 사회의 보수화와 맞물려 새정치민주연합은 조중동이 이끄는 언론생태계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없었다. 촛불집회가 전국에서 타오르던 시기를 빼면, 이명박 정부 내내 선정적이고 편향적인 보도들에 이 난무했고, 새정연(구 민주당)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안철수 현상의 등장도 언론생태계가 만들어낸 작품 중 하나였다. 노무현이 일으킨 바람과는 달리 이명박 정부와 새누리당에 대한 반발이 안철수라는 대중적 스타를 선택한 안철수 현상은 기득권 정치와 재벌로 대표되는 특권층에 대한 반발의 성격이 강했지만, 거대정당인 구 민주당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국민의 중도보수화에 대한 열망으로 안철수 현상을 해석(필자는 형편없는 왜곡으로 보지만)해야만 했다.





이명박 정부의 방송장악에 대한 노조의 장기파업이 참혹한 패배로 끝나면서 MBC의 종편화는 가속화됐고, 이것이 방송생태계에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손석희를 영입한 JTBC의 변화는 이를 만회할 정도는 아니어서 언론생태계 전체의 보수화는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계속했다. 



통진당의 투표부정과 폭력사태에 대한 선정적인 보도는, 정부에 의한 이석기의 내란음모죄 적용과 통진당 해산심판청구라는 반민주적인 행태까지 치달았다. 정부와 보수화된 언론들에 의해 진보정당과 종북세력이 이음동의어로 변질·왜곡됐다. 진보진영 전체의 위축과 이분법적인 사상 검열이 일상화됐고, 마침내 진보진영 전체의 몰락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만큼 총체적 보수화가 정점에 이르렀다.



조중동이 주도한 언론생태계의 보수화에 대한 극도의 피해의식과 거부감을 지니고 있는 구 민주당의 지지율 하락은 이런 사회적 분위기와 언론생태계 하에서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지지율 하락과 맞물려 안철수 현상은 세를 넓혀갔고, 잠재적 대선 후보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과 지방선거를 통한 친노의 부활도 오래갈 수 없었다.



보수화된 언론생태계가 주도한 사회의 보수화는 구 민주당의 연이은 선거 패배로 이어졌다. 패배 원인이 친노 강경파라는 언론몰이가 계속됐고, 친노라면 치를 떠는 의원들과 당내 비주류 의원들을 중심으로 중도보수화 주장이 난무했다. 그 결과 김한길 대표의 당선과 안철수 신당의 탄생 및 졸속적인 합당으로 이어졌다.





잠깐 동안의 지지율 반등이 있었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합당과정에서 보여준 절차적 민주성의 상실은 전통의 지지자들에게는 야합으로 보였다. 민주정부 10년의 흔적을 지워버리려는 정강 소동까지 벌어지면서, 60년 전통의 정체성마저 헌신짝처럼 내버릴 수 있다는 것이 합당의 실체라는 것이 알려졌다. 



당 내외에서 극도의 반발이 분출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합당을 했으면서도 분열의 강도는 내부화되며 계파별로 공고해졌다. 이는 새정연 내부의 정체성 혼란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진행됐음을 의미했다. 이때부터 진보 매체들마저 새정연에서 등을 돌렸고, 이것이 공천파동과 재보선 참패로 이어지면서 지도부의 리더십과 의원들의 팔로워십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새정연은 사분오열됐다. 



국회의원이란 공천권을 잃는 순간 잉여보다 못한 존재로 떨어질 수 있는 특수한 존재다. 반정치적 정서가 만연돼 있는 한국의 경우, 특히 야당 의원일수록 이런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야당의 국회의원이었다는 것이 족쇄로 작용해서, 모아둔 돈이 없으면 정치브로커나 그와 비슷한 것이 아니면 특별히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이것이 계파정치를 강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2014년에는 이것이 맞다



이 모든 것이 수십 년에 걸쳐 조중동이 설정해 놓은 정치적 프레임의 대국민 세뇌작용이 쌓이고 쌓여 이루어진 결과다. 열린우리당에서 구 민주당을 거쳐 새정연으로 이어진 제1야당이 권위주의와 독재에 맞서 민주정부 10년이란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던 60년 전통의 정통성을 잃어버린 채 보수화된 언론생태계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한 이유이다.



세 번째 요인으로 다룰 조중동의 안보상업주의와 종북몰이까지 더하면, 새정연으로서는 제대로 된 대응이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 보수화된 언론생태계에 맞서 제대로 된 대응을 한다는 것이 진보(자유주의적 진보라 해도)를 표방한 정당으로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독히 강화된 반정치적 정서와 공적 영역이 사적인 것들로 점령된 상태에서 어떤 정당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겠는가?



사실 새정연의 몰락과 지리멸렬함은 그들만의 잘못이 아닌, 우리 모두의 잘못이며,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잘못된 만남이 만들어낸 정치의 몰락이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몰락이다.



                                       


  1. 덕산 2014.09.22 09:00

    늙은도령님 주말 잘 보내셨나요?
    정치도 공학이라는 말이 생각이 나네요.

    • 늙은도령 2014.09.22 09:27 신고

      공학은 공학인데, 철학이 바탕이 된 공학이어야 합니다.
      지금의 정치인들은 하나같이 철학적 부재가 너무 큽니다.
      상당수가 시정잡배 모리배 수준이에요.
      그래서 어떤 사람도 권력을 잡은 지배자, 권력을 잡지 못하면 범죄자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최악이 될 때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2. 태봉 2014.09.22 09:13

    옛날부터 드는 생각이었는데 보수와 진보라는 단어를 다시 재정립한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거어 모든 국민은 보수와 진보라는 개념을 너무 혼동하고 잘못이해하고 있습니다 위 도표는 한눈에 누가진보고 보수이고 수구인지 잘 보여주네요 늙은 도령님이 보수와 진보에 대한 개념을 재정립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늙은도령 2014.09.22 09:29 신고

      제가 새로 연재하게 된 진보의 몰락과 부활을 위해 에서 다루게 돨 것이빈다.
      그 동안 머리속으로만 정리해놓은 것들이 이제는 풀어낼 시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정말 사람들이 구분을 못해서 이런 혼란이 생기는 것이고, 자신의 권리도 다 요구해서 받아내지 못합니다.
      일단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에 대한 글을 최대한 빨리 올리도록 할게요.

  3. 중용투자자 2014.09.22 10:27

    자본이 곧 진실이 되어버린 듯한 형국입니다.

    • 늙은도령 2014.09.22 15:54 신고

      지금의 시대가 바로 그러합니다.
      자본주의는 정신을 죽이기 때문에 물질적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돈이 곧 권위입니다.

  4. 참교육 2014.09.22 10:58 신고

    언론이 바뀌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그림의 떡입니다.
    이제 언론도 지지하는 정당을 명시하고 당당하게 주관을 펴야할 때도 됐습니다.
    공정이니 중립이라는 외피를 쓰고 찌라시 역할을 하는 모습이 꼴볼견입니다.

    • 늙은도령 2014.09.22 15:59 신고

      종편을 없애야만 방송생태계가 제 자리를 찾습니다.
      종편 등장 이후 방송생태계는 아예 추락 평준화됐습니다.

  5. 공수래공수거 2014.09.22 12:35 신고

    힘을 얻어야 할 언론들이 있는데
    힘을 좀 모았으면 합니다
    뉴스타파,국민TV,팩트 TV등등...

    • 늙은도령 2014.09.22 16:01 신고

      제도권 방송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인터넷 방송으로는 절대 역전시키지 못합니다.
      반드시 제도권 방송생태계를 제대로 돌려내야 합니다.

  6. 피닉스 2014.09.23 14:37

    명바기와 시중이 십세이 장마철 먼지가 나도록 패 쥑이고 싶습니다.

  7. 마틴 2014.09.26 22:36

    맹박씨를 옹호하고싶은 마음은 없습니다만, 현재 가장 큰 국민적 이슈인 공무원 연금 개혁에 대해 제1야당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하는짓을 보십시오. 진보라고 하는 것들이 본인들의 의지도 말도 못하고 눈치만 보고있다면 여당이랑 다를게 뭐 있을런지요. 가장 큰 원인은 새민련 본인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미 기득권임으로 결코 진보는 될수 없소.

    • 늙은도령 2014.09.27 05:03 신고

      맞는 말입니다.
      뿌리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민주주의의 근간이 사회경제적 평등입니다.

      공무원연금은 개혁하는 것이 맞습니다.
      다만 하후상박으로 가야 합니다.
      박근혜가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하려면 모든 것을 실패합니다.

      전 증세에 찬성합니다.
      순서는 부자부터 해야지만, 그것이 안 된다면 동시에라도 해야 합니다.
      다만 증세로 늘어난 세수를 복지와 사회안전망에 투자해야 합니다.
      그것이 유일한 지속가능한 성장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국민TV가 확보한 CCTV 영상(원본이라고 한다)에 의하면, 세월호 유족의 폭행사건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TV조선, 채널A 등의 일방적인 보도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모든 방송들이 이에 대해 일방의 주장만 내보내거나 단신 처리하고 있어, 국민TV의 보도가 폭행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는 계기로 작용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국민TV를 보는 시청자와 나머지 방송을 보는 시청자의 수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 크고, 지리멸렬한 상태인 제1야당의 목소리는 초라하기 그지없어 인천아시아게임이 끝날 때쯤이면 상황 종료에 이를 수도 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던 여론의 흐름이 역전된 것에서 보듯, 국민TV의 힘으로는 마녀사냥식의 언론재판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뒤집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다만 기존의 뉴스9이 ‘100분 뉴스룸’으로 확대개편되는 첫 날에 맞춰 휴가에서 복귀하는 손석희 앵커가 국민TV 보도를 다룬다면 상황이 달라질 가능성은 남아 있다. 무엇이 실체적 진실에 가까운지는 경찰과 검찰의 수사에 의해 결정되고, 지루하게 이어질 법원의 판결에 의해 최종 확정되지만, 최소한 지금처럼 마녀사냥식의 언론재판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물론 국민TV가 확보한 CCTV만으로 폭행사건의 전말을 밝히는 것이 힘들 것으로 보이고, 인터넷 뉴스 신문고의 보도에 따르면 영등포경찰서 형사과장의 이름으로 CCTV와 TV조선의 보도를 반박하는 해명자료도 나왔지만,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의 경우에서 보듯, 경찰과 검찰의 수사를 거쳐 기소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언론재판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최악의 경우 경찰과 검찰의 수사에서도 실체적 진실이 확실하게 가려지지 않은 채 법정싸움으로 넘어간다면, 최소한 1심판결이 나오기 전까지 유족들은 초법적 행태도 서슴지 않는 폭행범이라는 인식이 굳어질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이럴 경우 또 다른 증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손석희의 ‘100분 뉴스룸’도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고 다루지도 않을 수 있다.



세월호 유족이 초법적인 폭행을 일삼는 자들이 될수록 세월호 피로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고, 세월호 특별법마저 여야의 합의 하에 국회를 통과할 가능성도 덩달아 높아진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도 유병언의 죽음에 준하는 수준에서 세월의 저편으로 넘어가고, 유족들은 힘겨운 싸움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높아진다.





때로는 거짓이 진실보다 더 진실답게 보이는 법이다. 모든 언론이 금과옥조로 떠받드는 팩트(사실)라는 것도 판단을 거치지 않으면 진실이 될 수 없다. 모든 진리가 판단을 통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동의를 얻은 것이듯, 언론이 보도한 팩트도 판단을 통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동의를 얻어야 진실이 된다.



하물며 보는 것이 곧 믿는 것인 대중매체의 시대에서 보도의 양이 보도의 질을 압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또한 대중매체가 정치적 해석과 입법적 근거, 사법적 판단을 좌지우지하는 현대의 민주주의에서는 팩트(사실)를 진실로 만드는 판단이 방송에 의해 대체되기 일쑤다. 판도라상자의 밑바닥에 희망이 있었던 것이 최첨단의 시대에서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이 99%의 절망 속에서도 살아남아 아주 가끔은 뒤집어버릴 수 있었던 것도 그 빌어먹을 1%의 희망 때문이었음을 손석희의 100분 뉴스룸이 증명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일까, 9회말 투아웃 풀카운트에서 나온 역전의 만루홈런일까, 세월호 희생자와 실종자, 유족들에 대한 측은지심과 동병상련의 발로일까?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여강여호 2014.09.21 09:34 신고

    물론 이런 폭행사건에 연루된 것 자체가 잘못이지만
    이번 사건 보도를 보면서 한가지 의문이 들었던 것은 자세한 과정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마치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마녀사냥식 보도 같아 찜찜하기도 하고요.

    • 늙은도령 2014.09.21 09:49 신고

      세월호 유족에게 특별법 제정에 대해 양보를 받는 것과 연관되면 최악이 될 것입니다.
      이미 언론이 판결을 내린 상태라 100분 뉴스룸이 마지막 희망입니다.
      진상규명도 이렇게 물거넌 가나 봅니다.

  2. 달빛천사7 2014.09.21 11:03 신고

    세월호 문제가 너무 오래가네요. 2014년은 세월호가 가장 큰 사건이었고 오래가는 큰이슈네여

    • 늙은도령 2014.09.21 18:54 신고

      방법이 바뀔 것입니다.
      좀더 장기전으로 가되 국가운영에 부담을 줄이는 방법으로 갈 것 같습니다.

  3. 공수래공수거 2014.09.22 12:41 신고

    보도 방향에 따라 파장이 엄청나게 다르다는걸
    또 한번 느낍니다

    이번 건은 정말 심각합니다

    • 늙은도령 2014.09.22 16:02 신고

      조중동과 종편이 주도하는 것이지요.
      이들이 모든 것을 증오적 이분법으로 몰고갑니다.

  4. 빙고 2014.09.22 19:28

    유가족중 한명은 이빨 1개부러지고 또한명은 이빨 6개부러진거보면 폭행죄를 넘어서 상해죄로 가는거 같은데요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프락치가 아니면 어떻게 이빨을 저렇게 부숴버릴수 있는지 이상하네요
    유가족이 입은 피해정도가 너무커서 유가족보고 사과하라는게 납득이 안됩니다

    • 늙은도령 2014.09.22 20:53 신고

      이 문제는 김현 의원이 키를 쥐고 있습니다.
      김현 의원이 자신은 살고 유족을 죽일 생각이라면 문제는 더욱 커집니다.
      유가족에게 일방적으로 언론폭력을 가하고 있는 것은 독재국가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진실 여부를 떠나 이런 보도행태는 인권 유린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첫 번째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새정연이 몰락하는 과정을 복기해 보면 계층구조와 이념구조의 변화가 중첩되는 것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들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이후로는 일관되게 나타났다. 그 시발점은 누구나 알고 있는 1997년의 외환위기다.

 


수출 일변도의 압축성장의 폐해가 외환위기로 폭발하자, 신자유주의의 첨병인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대가로 대규모 구조조정을 동반한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돌이킬 수 없는 해부학적 외과수술이 단행됐다. 복지와 사회안전망이 불충분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구조조정은 수없이 많은 해직자를 양산했고, 노동유연화의 본격화에 따라 노동의 몰락이 촉진됐다. 



그 결과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장기적으로 볼 때 민주주의의 퇴행으로 이어지는 출발점이 됐다. 민주정부 10년 동안에도 절차적 민주주의는 강화됐지만, 질적인 민주주의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결과 부와 소득 수준에 따라 계층구조는 10 대 90로 악화되고 있고, 이념구조도 보수3 : 중도3 : 진보4에서 보수4 : 중도4 : 진보2로 재편되고 있다. 







현 제1야당의 갈지자 행보의 기원을 추적해보면 여기에 이른다. 참여정부 후반부터 오늘의 새정연에 이르기까지 제1야당이 외연을 넓히겠다고 변화를 모색하는 과정을 보면, 계층구조의 90%를 이루고 있는 중하위층 중에서 중도(이중이념)와 합리적 보수 성향을 띠는 유권자를 지지층으로 끌어들여 한다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다. 7.30 재보권선거의 참패로 이어진 안철수 신당과의 합당과 이상돈 교수의 비대위원장 영입추진이 가장 대표적이다.



시민이 개인을 거쳐 소비자로 변한 상황에서 공통의 정체성이 없는 계층들은 사실상 세대로 대체된 상태다. 계급적 의식을 대표했던 노조도 노동유연성이 대세가 됨에 따라 전통의 영향력을 상실하며, 한국노총의 경우 아예 보수화됐다. 대형사업장 노조들은 귀족화됐고, 정작 노조가 필요한 사업장은 비정규직으로대체됐다. 



여기에 성별의 차이(차별)와 지역적 환경, 학력과 이주민, 직종과 노동의 분화까지 더해지면서 중하위층 90%는 수없이 분열되고 파편화됐다. 좌파와 우파, 보수와 진보라는 개념이 삶정치적 영역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이는 반정치적 정서의 확대와 투표율 하락에 따른 민주주의의 퇴행으로 이어졌다. 정치를 얘기하는 것조차 시대에 뒤쳐진 자들의 특징이 됐다.  



소비자로 떨어진 시민은 민주주의의 보루로서 어떠한 영향력도 갖지 못한다. 그에 따라 디지털 시대의 유목민처럼 정착하지 못하고, 정치경제적 연대감을 형성할 수 없어 공통의 의식을 형성하지 못한다. 네트워크의 과잉은 네트워크의 무력화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에 따라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집단으로 세력화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그때그때의 사안에 따라 단기적이고 즉물적인 이합집산만 보여준다. 



네그리와 하트가 꿈꾸었던 이합집산이 자유로운 수평적인 떼처럼 '다중'으로서의 세계시민적 네트워크는 이루어지지도 않고 이루어질 수도 없다. 시민적 자유와 계급적 의식이나 공토의 이해를 구축하지 못하는 극도로 파편화된 소비자의 시대에는 유럽적 의미의 신좌파란 마르크스와 스피노자의 어색한 동거에 불과할 뿐이다.





이런 형태의 네트워크적 유목민은 자본과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기득권에 의해 여론 조작의 대상으로 최적화된다. 민주주의란 사회경제적 평등을 기반으로 정치적 자유와 각종 권리가 제도적으로 보장되는데, 정착하지 못하는 디지털 유목민은 신빈곤층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권리들을 제대로 행사하기 힘들다.



저임금 비정규직과 임시직의 젖줄인 잉여들이 포화상태를 넘어 삼포세대처럼 ‘쓰레기로 버려지는 삶’의 전 단계까지 추락을 거듭한다. 이들에게는 빈곤의 대가로 떠들어댈 수 있는 자유, 사회에 진입하지 못하거나 아예 진입을 거부하는 자유, 사회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자유, 기타등등의 자유들이 주어진다. 



1인가구와 빈곤가구의 증가는 평균수명의 확대와 중첩되며, 필연적으로 신빈곤층이 늘어난다. 청년 실업자의 증가와 교용 형태의 악화는 노인 빈곤과 낮은 수준의 복지, 저임금 여성노동자와 이주민 및 외국인노동자의 확대와 삼중사중으로 중첩되며, 세대간 갈등과 성적·인종적 차별과 저임금 노동의 고착화로 이어진다. 



중하위층을 중심으로 사회적 스트레스와 만성질환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부와 기회의 불평등이 강화되며 계층간 이동이 최소화된다. 신분상승을 위한 사다리는 공교육의 붕괴와 사교육의 확대와 맞물려 최소화되고, 새로운 형태의 차별주의와 엘리트주의가 강화된다. 모든 분야에서 구조적 부정의가 눈덩이처럼 커진다.  





이에 비해 상위 10%는 부와 기회의 대물림과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1%의 특권층과 9%의 상류층을 이루며 두터운 기득권층으로 자리 잡았다. 경제적 여력이 부족한 중하위층이 이익 집단과 특정 단체에 가입하는 것이 1이라면 상위층은 10에 이르고, 최상위 1%는 20~25에 이른다. 



그 결과 상위 10%와 중하위 90%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이 갈수록 벌어진다. 정치자금 제공과 각종 기부를 통해 이들의 영향력은 더욱 커지고, 고액의 광고비와 대규모 협찬 등으로 대중매체를 독점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의 영향력은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해 특권층으로 접어든다. 마침내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인 1인1표가 1원1표로 대체되며 민주주의가 쇠퇴하는 만큼 금권정치를 강화한다.



국가와 사회의 보조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신빈곤층은 복지의 사각지대로 떨어지거나, 이들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정규직에 들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들도 이들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정보통신기술의 결과물인 빅데이터가 구축됨에 따라 프라이버시가 축소된다. 감시받는 사람들이 기득권에 맞선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중산층도 언제든지 하층민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상류층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아이를 키우는 일에 너무나 많은 돈이 들어가고 노후대책도 챙겨야 한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가족이 해체되고, 계층구조가 10 대 90으로 재편됐음에도 이념구조가 4 : 3 : 3으로 고착화되는 이유다.





여기서 진보의 가치가 정체성인 새정연의 중도와 보수화의 논리가 힘을 얻는다. 안철수 신당과의 통합과 이상돈 교수의 비대위원장 영입이 가능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보수화의 시발점이 됐던 신민주당 플랜이나, 신당과의 합당 과정에서 당의 강령을 정할 때 4.19와 5.18 정신과 10.4선언 계승 등이 빠지는 해프닝이 벌어졌던 것도 마찬가지다.



헌데 새정연의 주류는 진보고, 고정 지지층의 대부분도 진보적 성향이 강했다. 이들에게는 새정연의 보수화가 달갑지 않았고, 당의 정체성마저 약화되고 혼란은 가중됐다. 계파의 난립이 강화된 것도 이런 과정에서 나왔다. 누가 대표가 되더라도 정치적 리더십이 약화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고, 이는 대여 투쟁이나 협상에서 연전연패로 이어졌다.



또한 고착화된 이념구조인 4 : 3 : 3도 진보세력을 대변하던 새정연의 쇄락으로 인해 4 : 4 : 2로 변화될 조짐마저 강화되고 있다. 새정연이 진보적 가치를 강화하고, 시대에 맞게 발전된 정치적 리더십을 제시할 수 있으면 계층구조의 변화 때문에 진보의 범위가 넓어질 수밖에 없음에도 새정연은 정반대로 간 것이다.

외연 확장은 고사하고 정치적 영향력만 급속도로 떨어졌다.





이는 세월호 참사를 통해 명백히 드러났다. 참사 초기에 국민이 보여준 분노의 분출은 자본과 권력의 탐욕에 대한 사회경제적 평등과 민주주의의 강화에 대한 욕구가 얼마나 강한지 단적으로 보여줬다. 참사 초기에 보수 세력을 대표하는 조중동이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여야 모두에게 떠넘김으로써 정치적 프레임 설정해 전력을 다한 것이 이 때문이며, 그 결과는 정치적 접근의 원천봉쇄였다. 



새정연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첫 번째 요인이 다음 글에서 다룰 두 번째 요인에 휘둘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정치적 행위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세월호 유족과 새정연은 이렇게 갈라졌고, 박영선 대표의 연이은 실족이 이어지며, 제1야당의 몰락이 역사상 최악으로 치달았다. 그 과정에서 가장 좌측에 있는 진보정당들은 목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새정연의 중도보수화는 진보 진영 전체를 무너뜨린 위험천만한 도박이었다.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무능함과 그에 대한 정치적 무책임이 겹쳐져 일어난 퇴행이었다. 중도와 합리적 보수를 놓고 새누리당과 일전을 불사한다면 고정지지층마저 잃게 되는 필패의 과정일 수밖에 없었고, 전략적으로도 이길 수 없었다. 



                                     


  1. 중용투자자 2014.09.19 08:22

    넘어야 할 산들은 많으나 이번기회에 바닥을 잘 다져서 위기극복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줬으면 좋겠네요 ^^

    • 늙은도령 2014.09.19 14:59 신고

      네, 이번 연재를 시작한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다.
      제가 다른 것을 뒤로 미루고 이것에 집중해 글을 쓴 후 추가로 조사를 한 다음에 출판할 생각입니다.
      모든 순서를 바꿀 생각입니다.

  2. 공수래공수거 2014.09.19 13:04 신고

    언론이 제일 무섭습니다

    • 늙은도령 2014.09.19 14:58 신고

      종편부터 없애야 합니다.
      그러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그런 다음에 MBC를 원래의 상태로 돌려놓으면 됩니다.

      나머지는 그러면 자연히 무너집니다.
      방송부터 제 자리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목표와 민주주의 출발을 오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국가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전체화하는 경향과 개인화하는 두 가지 상반된 경향과 중첩되며 일어나는 전형적인 인식의 오류입니다.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를 통해 1%를 위한 전체주의적 세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대중매체를 수단으로 만들어내는 이런 인식의 오류는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민주주의는 체제에 참여하는 구성원들이 공적인 이슈에 관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경제적 여력을 갖추고 있을 때 시작됐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목소리란 공적 영역에서 공익에 대한 자유로운 의견 개진과 상대의 의견에 대한 진지한 청취, 서로에 대한 합리적 설득과 민주적 절차에 의한 구속력 있는 합의에 이르는 전 과정을 말합니다.



고대 아테네의 아고라가 그랬던 것처럼, 민주주의는 사회경제적 평등이 일정 수준에 이르렀을 때 가능한 정치체제입니다. 인간이란 불멸의 존재가 아니어서 생존선 이하의 상태에서는 짐승과 다를 것이 없는 존재로 전락하기 마련이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가 법과 행정력을 동원해 모든 구성원에게 제도적으로 일정 수준의 사회경제적 평등을 보장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란 사회경제적 평등을 제도적으로 보장한 데서 출발해 자유의 왕국으로 향해 가는 부단한 과정을 말합니다. 이를 보장하는 것이 법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법이 만인에게 평등해야 한다는 것도 민주주의가 본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가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양대 축이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헌데 민주주의의 파트너로 등장한 자본주의가 시장경제를 절대화하는 과정에서 제도적이고 보편적 합의의 산물인 자유를 태생적으로 주어진 자연의 법칙이자 신의 선물인양, 어떤 제한도 가해질 수 없는 자유방임으로 대체하면서 민주주의는 퇴행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제한된 자유가 방임적 자유와 혼동되면 강제적으로 보장된 사회경제적 평등이 개별적 능력의 결과물로 변질됩니다. 능력이 자유의 원천이자 민주주의의 보루로 둔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능력이란 불평등한 환경에서 나오는 차별적 요소의 산물임에도 이것이 사회경제적 평등을 대체하면, 자유란 제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경쟁의 결과로 획득하는 것이 됩니다. 이럴 경우 승자나 강자만이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것도 힘의 크기와 범위에 따라 무한대의 자유를 독점할 수 있게 됩니다. 자유에 따르는 사회적 책임이란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에서나 누릴 수 있는 것이 됩니다.



마르크스의 착각이 여기서 나온 것이지만, 그래서 과학적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본질은 유전자 나선처럼 이어져 있는 것이면서도 뫼비우스의 띠처럼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민주주의의 퇴행은 제도적으로 주어진 자유가 일체의 제한을 거부하는 방임적 자유로 왜곡된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자유가 방임으로 대체되면 민주주의의 토대인 사회경제적 평등은 기하급수적으로 축소됩니다.



민주주의가 국가의 개인화하는 경향인 자유와, 전체화하는 경향인 평등을 두 축으로 균제와 견제로 이루어지는 것도 능력(힘 또는 권력)이 내포하고 있는 불평등의 확대를 막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삶이 동물의 세계처럼 타고난 능력에 따라 결정된다면, 적자생존의 법칙만이 유효한 원리가 됩니다. 이럴 경우 자유란 물리적이고 환경적인 힘의 우위에 따라 결정되는 정글로 화합니다.





허버트 스펜서가 다윈의 진화론을 왜곡해 사회에 적용한 사회진화론, 홉스가 자연의 상태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내세워 정립한 절대주권, 대처가 ‘사회란 없고, 있다고 해도 가족만이 있을 뿐’이라며 만천하에 선언한 신자유주의적 통치도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한 반민주적인 것들입니다. 신자유주의적 통치가 각종 불평등을 극단까지 몰고 가는 것도 방임적 자유가 제도적 자유를 대체한 결과입니다.



신자유주의 40년 동안 이런 대체가 일반화돼 방임적 자유가 제도적 자유와 동일한 것이 됐습니다. 그래서 태어났을 때부터 넘쳐나는 자유에 노출된 세대들은 민주주의와 자유의 범람을 혼동하기 일쑤입니다. 민주화 세대가 가장 비민주적인 세대로 보이는 것도 여기에 기인합니다. 민주화운동과 민주주의를 구별하지 못하는 일베충적 사고도 자유의 과잉이 초래한 인지부조화에 다름 아닙니다.





민주주의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엄밀히 구별하는 것에서 출발한 체제라는 것은 공적 영역의 사적인 것들로 대체된 것과, 동시에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사라진 시대의 본질이 무엇을 뜻하는지 말해줍니다. 사회경제적 평등을 포기한 대가가 자유의 과잉이라면, 그 끝에는 자유의 축소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적자생존과 승자독식을 인정하고 탄생의 조건과 환경적 요인에서 나오는 능력의 차이와 그 결과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의 정반대에 위치하는 것도 동일한 논리를 통해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의 과잉은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가 제도적으로 보장해온 사회경제적 평등을 희생시켜온 결과입니다.





신자유주의가 최고의 가치로 끌어올린 욕망의 정치가 민주주의를 대체하고 있는 것도 방임적 자유가 제도적 자유를 대체한 것에서 나온 부수적 피해입니다. 인류가 수천 년에 걸쳐 발전시켜온 민주주의가 조중동과 새누리당과 친일부역의 후손들이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와 동일한 것이 아님도 똑같은 논리에서 출발하면 얼마든지 설명이 가능합니다.



저들이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란 사회경제적 평등을 자유의 이름으로 희생시킬 때 나오는 극소수의 강자와 승자만이 누릴 수 있는 사이비 민주주의에 불과합니다.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한 나치가 우파 전체주의로 귀결된 것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종착역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자유가 강조되면 평등은 약화되고, 절대다수의 약자와 패자는 극소수의 강자와 승자의 먹이감으로 전락합니다.





그리고 최후에 이르면 절대다수의 약자는 잉여를 거쳐 쓰레기로 버려집니다. 대한민국이 바로 이 지점에 이르렀음은 국민적 합의도 거치지 않은 일방적인 서민증세와 이를 옹호하기 바쁜 대중매체에서 반민주적 보도에서 입증되고 있습니다. 현 상태의 민주주의란 자유의 과잉과 욕망의 정치에서 나온 과두정치와 전체주의의 혼합물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자유가 제도적 제한에서 벗어나 방임과 과잉에 이를 때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합니다. 정치의 몰락이 책임정치의 부재와 동의어인 것도 이 때문입니다. 대국민 약속인 공약이 집권의 수단일 뿐, 손바닥 뒤집듯 할 수 있는 것도 방임적 자유가 제도적 자유를 대체하는 민주주의의 퇴행에서 나오는 결과입니다. 지난 7년의 대한민국이 바로 그러했고, 최소한 3년은 더 그럴 것입니다. 

  1. 중용투자자 2014.09.17 00:30

    인간의 존재모드를 자유에서 자율로 전환할 때라야 인간은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는 도올 선생의 말이 생각납니다 ^^
    [

    • 늙은도령 2014.09.17 01:12 신고

      자율은 자유의 도덕적 형태이라 그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타자가 있어야 자아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유는 내 주먹이 미치는 곳에 상대의 코가 있다면 폭력이라 한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백순주 2015.09.22 16:25 신고

    민주주의가 뭔지,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지 배우지 못했습니다. 저는 민주주의가 정치하는 사람이 국민에게 해야 하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외우고 공부해서 시험은 보았으나 실체를 알지 못한 것입니다. 학교가 민주주의를 바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방임을 알수 있겠지요.ㅠ




문재인 의원님,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고 봅니다. 물론 순서라는 것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새정연은 카오스적 상태라 무엇부터 해야 할지 순서를 정하는 일이 가장 시급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본말이 전도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새정연은 어떤 사안이 주어지면 그것에 즉물적으로 대응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새정연의 행태를 보고 있으면, 자기보존의 욕망에 사로잡혀 본능적인 보호막을 치는 데만 급급할 뿐, 정당과 정치인이 지녀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과 정체성마저 상실한 것으로 보입니다. 요즘 세대들이 이념적 선명성으로 알고 있어 배척하기 일쑤인 정체성은 존재의 본질 같은 것이지, 이념적 경직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화와 민주주의가 동일한 것이 아니듯, 정체성이란 정치적 존재의 기초이자 출발점입니다.



지금의 새정연은 본질에 대한 정밀 진단과 현재에 대한 반성적 고찰, 미래를 위한 외과적 수술 없이, 오직 외연 확대라는 마약성 항생제로 일관해온 임시처방들이 임계점에 이르러 한꺼번에 터져 나온 복합적 후유증의 결과입니다. 그 과정에서 정당과 소속 정치인이라는 공통의 가치점이 사라진 폭탄돌리기의 연속된 과정입니다.





박영선 대표가 탈당을 하건, 안철수와 김한길 등이 이상돈 교수와 합류해서 제3의 세력을 형성하건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정연의 지리멸렬함은 과잉처방된 항생제가 불러온 치료불능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현 집권세력이 무엇을 하던 세상은 돌아가고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수는 없습니다. 304명의 국민이 죽었는데도 진상규명조차 안 되는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억압과 착취 속에서도 세상은 돌아갑니다. 행사할 뿐 책임지지 않는 자유가 넘쳐나도 시민의 삶은 독재 시대의 수준에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무엇인들 떠들어댈 수 있다 하여, 자유의 목적인 시민의 권리가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승자와 강자 위주의 세상이 바뀌는 것도 아닙니다.





자본주의가 극성에 이른 현대의 민주주의란 대중매체가 상부구조를 독점하는 우민화와 과두정치에 수단이자, 욕망의 정치를 부추기는 선전도구에 불과합니다. 이럴 경우 민의의 전당으로서의 국회란 꿔다놓은 보릿자루에 불과합니다. 민주적 정치란 야당이 제 역할을 할 때만 돌아갑니다. 야당이 국민적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분명한 정체성과 정치적 리더십을 가지고 있어야 함은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민주주의는 보수적 가치인 자유와 진보적 가치인 평등이 적절한 균형과 타협을 이룰 때만 돌아가는 체제입니다. 자유와 평등은 조화와 타협을 이룰 수는 있지만 그 본질이 합쳐질 수 없는 상극의 이데올로기입니다. 현재의 집권세력이 수구에 가까운 보수의 가치를 주장하는데, 야당이 이에 화답해 보수로의 외면을 넓힌다면 민주주의는 완전히 실종됩니다.



지금 새정연에게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의 두 개의 보루 중 하나인 진보적 가치, 즉 사회경제적 평등을 최대화할 수 있는 정치적 동력을 되찾는 것입니다. 그 부활의 출발점이 현실정치에서의 정체성 확립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념적 선명성이나, 행태의 경직성을 강화하는 것이 아나라, 자아 즉 주체의 본질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정체성 확립은 차별이 아니라 조화로 가는 첫 걸음입니다. 





그렇게 자아/주체에 대한 확고한 구축이 있을 때만 외연의 확대도, 유연한 정치적 실천도 가능합니다. 자아/주체가 없는데, 상대/타자와의 접점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으며, 민주적 토론과 정치적 합의, 다양한 이해의 충돌을 조정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지금의 새정연은 기초가 무너져, 자아의식도 존재의 근본도 없는 오합지졸의 집단에 불과합니다.



문재인 의원님, 현재의 대통령은 박근혜이지 문재인이 아닙니다. 설사 지난 대선의 불법성이 법적인 판결로 확정된다고 해도, 투표결과의 무효에 따른 재투표가 최대치입니다. 그렇다고 문재인 의원이 자동적으로 야권의 후보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의원님은 당대표도 아닙니다. 정치적 영향력이 야권에서 최대라 해도 그것은 간접적 힘에 불과합니다.





내려오십시오. 바보 노무현처럼 바닥까지 내려와서 새정연을 올려다보십시오. 현역 정치인이기 전에 진보적 가치를 믿는 시민의 눈으로 새정연을 올려다보십시오. 반드시 바닥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그래야만 올라가야 할 높이와 곳곳에 있는 장애물들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 리더십이란 바닥, 즉 기초에 뿌리를 둘 때 가장 강력하게 작용합니다. 



그 기초란 당연히 민주주의의 역사와 함께 해온 시민을 말합니다. 이제 다시 깨어나기 시작한, 자본과 권력의 노예적 삶을 받아들였지만, 세월호 참사를 기점으로 사람이 먼저임을 깨달은 시민들 말입니다. 새정연의 부활과 외연확대는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데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 시에 한결같이 그러했던 것처럼. 


                                   


  1. 태봉 2014.09.15 21:48

    이 글을 문재인 의원이,새정치연합이 봤으면 좋겠네요

    • 늙은도령 2014.09.15 22:11 신고

      지금은 이 글을 봐도 어쩔 수 없는 단계로 접어든 것 같습니다.
      문재인 의원을 향한 글을 몇 편 더 쓸 생각입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알려지겠죠.
      제가 다리를 다쳐 움직이지 못하니 광화문에 갈 수도 없고, 정치권에 있는 친구들에게 연락하기도 뭐하고....

  2. base 2014.09.15 22:27

    저도 늙은도령님의 생각과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이것이 문재인의원의 한계가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자주 드는데.. 참으로 안타깝군요.. 문의원이 제대로된 선장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대한민국에 그 분밖에 없나요?

    • 늙은도령 2014.09.15 23:40 신고

      일단 다음의 글을 읽어주십시오.
      문재인 의원은 지금 큰 착각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국정경험이 오히려 그에게는 독이 되는 것 같습니다.

  3. 중용투자자 2014.09.16 11:29

    정치란 쌈닭같은 저돌적인 면도 있어야 하는데 그게 좀 아쉽네요 ^^

  4. 한석봉 2014.09.16 16:04

    304명이죽었는데 진상규명이 안된다니 미친놈 아냐 배가 뒤집혀서 사고로 죽은거야 해운회사는 1999년 김대중때 설립되었고 뭔 진상조사 완전이 정신병자군

    • 늙은도령 2014.09.16 16:21 신고

      배가 왜 뒤집혔냐고?
      그것에 대해 확정된 것이 있습니까?
      대통령은 자신이 최종 책임이라며 눈을 흘렸으면서 뭐 한 게 있습니까?
      웬 일베충적 댓글이야!!!

  5. 허정호 2014.09.16 17:58

    그나마 가능성이 보이는 정치인에게 보내는 편지 같네요. 슬픕니다.

    • 늙은도령 2014.09.16 18:46 신고

      문재인도 몇 번의 위기를 겪을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나 실수는 하는 법, 그것을 극복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재인은 모두 다 함께 가야 현 집권세력과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잘못하면 숫자의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6. 이만영 2014.09.16 22:34

    슬픈 글이네요..
    하지만 난 대선 개표 하던 날, 선거 승복하고 고향으로 향하는 문재인의 뒷 모습에서 한계를 보았늡니다.
    거기까지 인 그냥. 좋은 사람이라는걸..

    • 늙은도령 2014.09.16 23:38 신고

      저는 그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재인이 직접 나섰다면 피해자가 엄청나게 많았을 것입니다.
      미래의 동력을 찾으려면 물러냐야 할 때와 싸울 때는 구별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그때의 행동에는 찬성을 표하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단식도 그러 면에서 보면 싸울 때를 구별한 멋진 행동이었습니다.

      헌데 이상돈 영입에 관해서는 너무 나갔습니다.
      안철수와 김한길이 물러난 이유와 이상돈 영입은 같은 것으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전형적인 예입니다.

      지금은 길게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단 한 발도 물러서면 안 될 시기였습니다.
      문재인은 국정경험으로 인해 너무 길게 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쉽기만 합니다.

  7. 구름속의 하늘 2014.09.16 23:45

    고 노무현 대통령께서 집권하실때도 안타까운 마음에 소주를 기울이며 했던 말들이 기억나네요. 양아치 불량배와 싸워야 한다면 도덕은 내려놓고 같이 맞붙어 싸워야하는데 너무 성인군자처럼 구셨던게 아닌가 하구요. 물론 그런것이 인간 노무현의 매력이긴 하지만 대통령이란 자리는 인간적으로 좋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재인님이 정권을 잡으신다 해도 과거와 같이 엄청난 반대세력의 양아치 짓거리에 부딫힐 수 밖엔 없는데 좀 더 강한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이 그나마 지지하는 국민둘 보기에 의지할 부분이 되지않을 까 싶습니다.

    • 늙은도령 2014.09.17 01:18 신고

      노무현 대통령이 죽음으로써 길을 열어주었는데 문재인이 생각보다 약한 것 같습니다.
      지금이 정치인에서 지도자로 도약할 수 있는 최후의 시기라 생각됩니다.
      문재인 의원이 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의견을 물었으면 합니다.
      지금은 자신에 갇혀 있는 것 같습니다.

  8. 다름맘 2014.09.16 23:45

    마지막 사진....너무..슬프고 그립습니다.. 정말 너무많이보고싶어요...

    • 늙은도령 2014.09.17 01:19 신고

      세월이 흐를수록 노통의 위대함은 커질 것이고, 그렇게 노통은 우리들 마음 속에서 부활할 것입니다.
      그것이 국민에게 전파될 때 대한민국은 진정한 민주주의국가로 접어들 것입니다.

  9. 답답 2014.09.17 01:50

    글 잘 읽고 갑니다..

    • 늙은도령 2014.09.17 04:13 신고

      글을 쓰면서도 답답하네요.
      문재인 의원이 반전의 역량을 보여주기를 바랍니다.

  10. 하늘봐 2014.09.17 07:29

    귀한 글 입니다
    문의원이 이렬수만 있다면
    국민들에게 야당에게 희망을 줄텐데
    그릇 자체가 노대통렁과 다른듯 합니다
    노통은 항상 자신의 삶과 행동이 명확했지만
    문의원은 뭔가 항상 분명치가 않는것 같네요
    애매모호~~란 단어가 생각나 안타깝습니다

    • 늙은도령 2014.09.17 07:43 신고

      이것보다 더 큰 문제가 박근혜의 작심발언에서 나왔습니다.
      제가 추가로 글을 올렸으니 한 번 보시지요.
      지금 저는 분노가 폭발하기 직전입니다.

  11. 프렌드 2014.09.17 19:17

    잠시 노땅을 보면서 눈시울을 불킵니다...
    계실때는 몰랐는데....않계시니 더 커보이고 그립습닏...

    • 늙은도령 2014.09.17 20:55 신고

      그렇게 남은 사람들이 과거의 기억들을 미래로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미래라는 것이 최소한의 희망이라도 가지려면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아메리카 사회의 전경은 민주주의의 표피를 덮고 있으나 그 표피 아래에서 귀족주의의 옛 색깔들이 간간이 얼굴을 내민다......이 나라 사람들처럼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없으며, 재산이 항구적으로 평등해야 한다는 이론을 이 나라 사람들처럼 경멸해 마지않는 사람들도 없다.


                                                                           - A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 중에서 인용




강준만의 <싸가지 없는 진보>를 읽지 못했기에 내 평가는 프레시안과 한겨레 등에 나온 기사들에 한정된다. 강준만은 진보세력이 연이은 선거에서 패배한 것이 “싸가지 없는 진보의 ‘무례함, 도덕적 우월감, 언행불일치’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진보가 논리와 이성에 집착하는 한 욕망의 시대인 21세기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읽을 가치가 없어 보이는 책



그는 논리와 이성에 집착하는 진보가 유권자들에게 싸가지 없는 놈처럼 보이고, 그것 때문에 표를 주지 않는다고 했다. ‘좋은 정책과 이념이라도 싸가지 없게 행한다면 유권자들을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강 교수는 진보세력의 ‘이성 중독증’이 ‘옳은 말이지만, 싸가지 없게 보여 부동층(20%)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고 말했다.



반면에 개인적 욕망에 감정으로 접근해 싸가지 있게 구는 부동층의 지지를 받아 선거에서 이겼다고 설명했다. 강 교수는 따라서 ‘싸가지 없는 진보가 집권하고 성공하려면 상대편을 존중하는 마음과 자세의 터전 위에 서야만 민심을 제대로 읽는 눈이 트이고, 그럴 때만이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또한 “상대에게 모멸감을 주는 행위, 담론에만 집중한 나머지 예의를 벗어난 표현, 위에서 내려다보듯 가르치려는 태도, 왜 진보를 좋아하지 않고 보수에 표를 찍느냐고 호통 치는 듯한 자세, 의견이 맞지 않으면 동료에게도 상처를 주는 행위, 번드르르하게 말해놓고 언제 그랬냐는 듯 태도를 바꾸는 태도 등”을 비판하는 진보의 행태를 비판했다.



                                   보수의 시각에서 진보를 비판한 것에 불과한 강준만



필자는 진보의 고리타분함과 경직성에 대해 여러 번 비판하는 글을 올린 적이 있다. 그런 면에서 필자의 주장은 강 교수의 진보 비판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있다. 하지만 프레시안 보도가 강 교수의 책을 제대로 압축한 것이라면, 필자의 답은 ‘아니올시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먼저 강 교수가 진보의 기원을 거론하며 ‘이성 중독증’을 말한 것은 분명한 오류다. 강 교수가 말한 이성이 근대이성에서 나온 계몽을 뜻하는 것이라면, 그의 오류는 너무나 치명적ㅡ근대이성에서 나온 계몽은 보수와 진보 모두의 기원이다ㅡ이어서 책을 읽을 필요조차 없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란 없듯이, 진보도 열심히 변하는 중이지만, 그렇다고 '이성 중독증'이라 하면 그것은 지나친 단자화다.    



반면에 그가 말한 진보가 추구하는 이성이 정의나 공정과 같은 ‘옳은 것’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 또한 오류다. 정의나 공정의 기원은 플라톤과 공자처럼 질서나 체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보수적인 관점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인권의 기원에서 보듯 ‘옳은 것을 말하는 것’도 보수에서 기원하는 것이지, 진보에서 기원하지 않는다.



또는 그가 말한 이성이 ‘자연의 법칙’이나 ‘우주의 법칙’ 같은 ‘역사의 법칙’이라면 이 또한 오류다. 마르크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말한 ‘역사의 법칙’이란 고전물리학과 사회진화론에 근거한 오류이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진보의 ‘이성 중독성’을 말했다면 오류에서 오류를 찾아내 비판했으니, 그것은 진리가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강 교수는 21세기를 ‘욕망의 시대’라고 하면서, ‘진보의 싸가지 없음’이 부동층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어 선거에서 진다고 했으니, 이는 부동층 전체를 ‘욕망의 노예’로 디스한 것이다. 그가 대중매체의 전문가여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진보와 보수를 넘어 인간을 형편없는 존재로 만들었다. 동아일보 김순덕 논설의원의 글까지 더하면, 칼 폴라니와 니콜라스 카가 말했듯이, 그들에겐 인간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부족하다.



읽다가 어이없어 덮어버린 책



강 교수의 이런 조짐은 ‘강남좌파’를 형용모순이라 비판한 시절부터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진보의 덕목을 가난으로 본 것인데, 이성도 그렇게 본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든다. 논리적 오류가 두 개에서 너무나 큰 간격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강 교수가 미국적인 것들에 물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최근에 내놓는 그의 주장을 보면 곳곳에서 오류가 출몰한다.



대중매체의 본질처럼, 미국적 자유주의자로 변신한 것이 분명한 강준만 교수의 주장은 부분적 표상과 수치들로 전체를 재단하려 한 것에서 나온 속도의 폐해이다. ‘모든 창작은 인식의 조급함’이라는 말이 있는데 강 교수가 그러한 듯하다. 그는 현대 대중매체의 화면ㅡ관점 또는 시각ㅡ을 통해 진보와 보수를 보고, 화면에 비쳐진 것에 좌지우지 되는 존재로서 부동층을 재단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든다. 



그의 최종 진단도 지극히 미국적 대중매체의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이토록 망가진 것은 진보의 ‘이성 중독증’ 때문이 아니라, 정치판을 욕망의 장으로 만든 보수의 극단적인 타락 때문이다. 이성은 도덕과 다르며, 보수의 타락은 미국 유학파들(정치, 경제, 사회, 언론)에 의해 주도됐으며, 그 핵심에 겉과 속이 다른 대중매체적 테크놀로지가 있다.



강준만 교수는 이제 마키아벨리적 보수 인사가 다 된 것 같다. 진보 세력한테 논리와 이성을 버리고, 욕망을 추종하는 정치쇼를 벌이라고 충고하니. 부동층의 표를 얻기 위해 진보에게 욕망이란 가면을 쓰라고 하니, 도대체 뭐하자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강 교수에 대한 진중권의 반론 중 “강 교수가 싸가지 소지 의무를 강조하는 걸 보니, 이 사회가 그 사이에 많이 보수화되긴 한 듯”이라고 한 것은 그나마 정확하다.

  1. 중용투자자 2014.09.04 02:11

    틀리다가 아닌 내 생각과 다르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

    • 늙은도령 2014.09.04 05:24 신고

      그럴 수도 있습니다.
      책을 보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프레시안과 한겨레의 기사를 기준으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책을 사서 읽다가 <강남좌파>와 똑같은 경험을 할 것 같아서 책을 구입할지 망설여집니다.
      강준만 교수의 주장은 좌파에서 전향한 신보수주의자의 주장과 너무 흡사합니다.

      일단 읽다가 처박아 놓은 <강남좌파>부터 마저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중반까지 읽다가 논리적 모순과 오류 때문에 접었던 책이라 마음이 내키지 않지만....

  2. 리야 2014.09.04 02:33

    다르다고 표현할려면 소위 신문칼럼이나 게재 해야겠죠..

    명백한 오류를 발견하고 틀린걸 다르다는 식으로 표현하면

    개인 블로그의 의미와 추구하는 이상이 글쎄요...퇴색되진 않을까요?^^

    • 늙은도령 2014.09.04 05:30 신고

      책의 내용을 보지 못했기에 <강남좌파>에서 보였던 것들이 프레시안과 한겨레의 기사에 똑같이 되풀이 됐기 때문에 틀렸다고 했습니다.

      만일 이번 책의 내용이 오류를 극복했다면 다르다고 할 수 있겠지요.
      헌데 기사 내용과 인터뷰들을 살펴본 것으로는 틀렸다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그의 책은 대중매체를 다룬 것들은 훌륭한데, 너무 다작이라 조급함이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제가 근현대사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일종의 짜집기죠.
      제가 쓰는 근현대사는 처음부터 짜집기를 방법으로 정한 것이라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강남좌파>처럼 강준만 교수의 책은 다르지요.

      저도 진보좌파와 보수우파를 재정의하는 것을 구상은 해두었습니다.
      문재인 의원을 만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확인할 것이 남아 있어 아직 집필로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것이 확인되는대로 글로 옮길 것입니다.

      진보좌파는 분명 재구성돼야 합니다.

  3. 도래 2014.09.04 10:31


    사실 이 칼럼 좀 실망입니다.

    이성과 욕망에 국한해서 정치판을 얘기하자면 볼 것도 없이 욕망이 이깁니다.
    정치에서 이성이란 이념과 편향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니까요.
    욕망이란 그것이 무엇이든 인간에게 본질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왕 정치판을 논하는 거라면 좀 고리타분한 학자풍의 서술은 피하셨으면...
    특히 인용이랍씨고 외국 유명 학자들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은 한국에서는 너무나 상투적입니다.
    사실 그런 것이 없으면 한국에서는 잰척을 할 수도 없는 현실이 있기는 하지만요.
    그거 일종의 노예 근성입니다.
    그래서 저는 끝까지 자기 생각 자기 말을 하라 이렇게 주장하겠습니다.
    님은 그 능력이 있을 수 있고 그 능력을 키울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무협소설의 잠재력을 본다면.

    만일 이 칼럼이 도령님 재주의 한계라면 한번쯤은 죽었다 깨나는 성장적 위기를 거쳐야만 무언가 진짜가 나올 것 같습니다.

    제 솔직함의 무례를 용서하시길...

    • 늙은도령 2014.09.04 15:24 신고

      내가 아닌 누가 한 말을 내말처럼 사용할 수 없는 것이지요.
      또한 강준만이 말한 이성이나 논리 등을 애기하려면 당연히 그 기원에서 찾아야겠지요.
      그렇게 한 다음에 그것을 어떻게 적용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전 그런 글 쓰는 것의 양심을 지켜야 했습니다.
      외국의 것이라도 그것이 옳다면, 우리나라에는 그 정도의 대가가 없다면 그들의 글을 인용할 밖에요.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정치철학자가 있는지요?
      제가 다른 나라의 정치철학자들을 인용하지 않을 만큼 그 정도의 석학이 있는지요?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인용을 빌리는 것이고, 요즘 지식인들 너무 책을 안 읽어요.
      시대가 빠르게 변한다면서.
      하지만 달라진 것이 정말 있느냐?
      과학기술적인 것 말고는 없습니다.
      오히려 퇴보에 퇴보를 거듭하고 있지요.
      강준만은 그것을 말했을 텐데, 그것이 싸가지로 표현되는 것은 지극히 단순환 논리입니다.
      또한 요즘은 남의 것을 자신의 것처럼 쓰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남을 것을 내것이라 할 수 없고, 그들의 것 이상을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하면 그것을 인용하는 것이 글쓰는 사람의 자세라 생각합니다.
      소설과 정치철학은 다릅니다.
      아직도 저는 배우는 중이고, 대가가 되려면 아직 공부해야 할 것이 많이 남았습니다.
      강준만의 글쓰기가 언제나 이런 식이어서 저도 같은 방식으로 대한 것이고요.

      두 번째는 이 칼럼은 프레시안와 한겨레 기사, 동아일보, 라디오 인터뷰 등을 기준으로 썼기 때문에 그 한계 내에서 글을 써야 논리적 비약이 없지요.
      또한 기사나 인터뷰 이상의 것이 첵에 들어있다면 그때는 제대로 된 비평을 하겠지요.

      주어진 것에서 지나친 상상은 비약이 됩니다.
      저는 그 한계 내에서 글을 쓴 것이고, 책의 내용에 따라 제가 틀리 수 있음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나라에서 진보와 보수의 정의부터 새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현장에 대한 이해가 병행돼야 한다고도 생각합니다.

      강준만이나 진중권을 보면 학자적 냄새는 나나 거대 조직에 대해서는 너무 몰라요.
      또한 과학기술에 대해서도 지식이 부족해요.
      그래 가지고는 절대 진보와 보수에 대한 이해와 변화, 우리나라의 상태에 대해 이해하기 힘듭니다.
      지금의 보수와 진보는 기득권과 비기득권의 논리가 변형된 것에 불과하게 가고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에 대한 출발부터 변화까지 그 역사에 대해 철저한 이해없이 글을 써요.
      그래서 뒤죽박죽이 됩니다.
      강준만도 진중권도 그런 면에서 다 틀렸다는 것이고, 그 이유는 다음 글들에서 밝힐 것입니다.

    • 도래 2014.09.04 21:21

      국내건 외국이건 석학이라는 부류들이 가르치는 것들, 도령님이나 나와 같은 고수라면 스스로 깨칠 수 없는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의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많이 읽되 나의 사고로 그들의 통찰력을 체내에서 소화시켜 내 말로 내 표현으로 출수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내공이 쌓이고 공력이 되는 것입니다.

      정계이건 학계이건 어디든 기득권이 있지요. 기득권이란 허물자고 있는 것입니다. 도령님이나 나나 변방에서 출도하는 사람들은 중앙을 쓸어버리겠다는 반골 기질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기개가 없다면 흔한 말로 시체지요. 변혁이고 혁명이고 다 포기해야지요.

      딴 말 필요없습니다. 땅과 하늘을 뒤엎겠다 하겠다, 이겁니다. 이 자신감을 볼 수 있다면 제 말의 의도를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도령님의 '내 이야기'를 전부 읽어보았습니다. 큰 한을 키울 수 있는 사람, 그 해원을 위해 초극할 수 있는 사람, 그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이었습니다. 어떤 미친 사람이 바람같이 왔다 스쳐사라진 셈 치십시오. 무협에 대한 미련으로 단순 독자로서는 계속 방문하겠습니다.

      건강하시고 분발하십시오.

      아 그리고 이 말 한마디는 추가하고 싶네요.
      노무현 대통령을 향해 느껴지는 뜨거운 마음, 여기에서 강한 동지의식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 늙은도령 2014.09.05 17:31 신고

      석학의 것들을 내것으로 만들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으면 벌써 했을 것입니다.
      저는 아직 내것이라고 내놓을 정도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제가 접한 사람들 중에 몇몇은 제가 넘을 수 없는 수준에 있어서 그들을 넘을 수준에 이르면 그때는 본격적으로 재 목소리를 낼 것입니다.
      헌데 그런 수준에 이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어차피 제 목표는 푸코와 벤야민인데 21세기의 제가 20세기의 그들만큼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를 높이 사준 점은 고맙습니다.
      지금의 제 수준으로도 누구와도 토론하건 내목소리를 내건, 어느 정도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 목표는 그 이상에 있기 때문에 지금은 더 공부하고 더 쉽게 글을 쓰는 법을 몸에 익혀야 합니다.

      지금까지 공부해온 것들을 한 번은 털고 가야 할 시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과정을 통해 제 소리가 나오겠지요.
      저는 건강상의 문제 때문에 느긋하게 갈 생각입니다.
      어차피 지금은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지구적 차원의 변화를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TV를 끄고 책을 읽는다면 모를까 그것 또한 불가능하기 때문에 조금은 천천히 갈 것입니다.

      때가 있으리라 봅니다.
      때를 만들어내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은 제 능력 밖입니다.
      저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지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건강상으로도 모두 그렀습니다.

      요 며칠 급성장염 때문에 너무 아프다 보니 다른 생각이 들지 않네요.
      일단 급성장염부터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
      이런 분이 다시 나오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헌데, 최근에는 문재인 리더십을 다시 보고 있습니다.
      어쩌면 진정한 강함이 무엇인지 보여줄 수 있는 리더십이 아닌지 조금 더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4. 여강여호 2014.09.04 20:03 신고

    미디어 전문가로서 철저하게 대중문화적 관점에서 정치를 분석한 듯 하네요.
    과거에 쓴 책을 상기해 보면
    강준만 교수의 정치 성향의 변화가 엿보입니다.
    근데 우로 너무 많이 갔네요.

    • 늙은도령 2014.09.05 17:35 신고

      엄청 나갔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수준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조급함이 느껴집니다.
      꼴통 좌파만이 좌파의 모든 것이 아니고, 민주주의를 놓고 좌우를 봐야 하는데 그것을 깨닫을 수 없을 만큼 경직된 것 같습니다.
      다작의 폐해가 스스로 바닥을 드러내는 것인데, 강준만의 경우 바닥이 보입니다.
      그가 숲은 나두고 나무를 갖고 이렇다 저렇다 하니 숲을 논할 차원에 이르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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