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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세력의 몰락과 부활을 위해

강준만류 진보 비판, 차라리 싸가지 없는 것이 낫다



진보좌파는 자신의 정체성(이념)을 사회와 국가의 절대다수를 차지하지만, 자본주의와 자유방임 시장경제, 대중매체 등이 만들어낸 결과들이 소수의 기득권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절대다수의 비기득권에게 불리하기 때문에 이를 최소화하거나 극복하는데 정치적 목표를 둔다.



민주주의와 대중매체가 보편화된 20세기 후반부터 사실상 폭력적 혁명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좌파는 정치행위를 통해 이념적 가치인 다양한 방식의 차별을 줄이고 부와 기회의 불평등을 줄여야 했다. 폭력 혁명의 필요성을 놓을 수 없었던 좌파의 투쟁방식은 설 자리를 잃게 됨에 따라, 진보라는 투쟁방식의 정치적 변화를 선택했다.





여기에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그냥 시장의 확대에 불과하다)가 더해지자, 이념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공론장의 구조변동’이 이루어졌다. 공동체나 지역 단위의 공론장은 국가 전체와 세계를 거의 동시에 보여주는 대중매체의 속도에 의해 무너졌다. 인식의 출발점인 시각적 단위가 커지면 전통의 공동체는 너무 작아서 무의미해진다.



기본적으로 대중매체의 테크놀로지는 현실의 피폐함보다는, 꿈이나 희망처럼 좋아 보이는 것, 재미있어 보이는 것, 낙관적이거나 긍정적인 것, 대세(특히 대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드라마와 각종 쇼, 연예인 스캔들 등)를 이루고 있는 것 등을 보여주기 마련이다. 대중매체는 전파를 타는 콘텐츠가 시청자를 중독(인터넷은 재접속)시킬 수 있어야 이익을 만들 수 있다.



이 때문에 대중매체는 시청자와 이용자들이 보기에 좋은 것, 재미있는 것, 복잡하지 않는 것 그래서 깊은 생각 없이 표피적인 인스턴트 쾌락에 빠져들게 하는 것들을 양산한다.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치열한 토론과 장기적인 노력이 필요한 정치적인 것들마저 몇 초 만에 판단할 수 있는 즉시성을 띠어야만 대중매체를 탈 수 있다. 시청자들이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죄악이다. 





인터넷과 SNS 등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은 이런 경향을 더욱 심화시켰다. 단문 위주의 재잘거림인 트위터나, ‘좋아요’에 따라 글의 가치가 정해지는 페이스북, 말의 결핍을 불러오는 카카오톡 등은 정치의 몰락이나 정치철학, 즉 이념이 추구하는 것을 질식사시킨다. 정치는 늘어나지만 이념적 정체성은 희박해진다.



무엇보다도 정치의 본질인 말(토론)이 메시지와 영상, 단문 등으로 대체됨에 따라 상징조작이 일상화됐고, 욕망과 감성을 자극하는 것들이 여론을 형성하고 선거의 승리를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내는 정치의 역할에서 치열한 토론과 냉혹한 현실 인식이라는 공익을 창출하는 과정이 힘을 잃었다.



이때부터 세상의 보수화가 압도적인 우위를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욕망과 쾌락에 대한 상징조작이 난무하는 미디어정치가 이념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상대와 치열한 토론을 거쳐, 보다 유리한 합의에 도달하는 과정으로서의 정치가 갈수록 피곤한 것이 된다. 즉 쿨하지 못한 것이 정치가 됐다.



사회경제적 평등이 전제될 때 ‘자유의 왕국’으로서의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좌파의 이념(전체화하는 경향과 개인화하는 경향이 있는 국가의 특성과 함께 봐야 한다)은 무용지물이 됐다. 태생과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방임적 자유를, 법이나 제도에 의해 보장되는 자유로 제어하지 않으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무한경쟁과 적자생존이 절대적 힘을 발휘한다.



헌데 이런 인식이 대세를 이루면서 강준만류의 오류가 발생한다. 무한경쟁과 적자생존을 막기 위해서는 기존 질서와 제도를 인정하는 상태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전제를 이룬다. 이런 현실 인식은 현재가 최선의 결과이고, 기득권을 인정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에 가장 보수적이다.





‘정치가 타협’이라는 강준만의 진단은, 폭력 혁명이 불가능해진 20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 좌파적 이념을 정치적으로 풀어보려는 진보진영에게 끝없는 양보라는 정치적 타협을 강제하는 올가미로 작용했다. 신자유주의와 미디어정치의 약자인 진보진영이 좌파적 가치를 실현하려면 기득권을 인정하는 ‘싸가지’부터 갖춰야 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치에 대한 이해가 생긴 이래, 이념의 다른 말인 정치철학이 추구하는 것은 탄생과 함께 결정된 불평등을 정치라는 과정을 통해 공익이라는 사회적 합의를 도출함으로써, 후천적인 평등을 이루는 것이었다. 동서양과 종교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제시되는 행동의 황금률이나 사회적 정의가 바로 그것이다.



근대이성이 '계몽의 변증법'으로 산업혁명 이후의 역사를 욕망과 쾌락의 실현에 방점을 두면서 이념적 분할이 이루어졌다(프랑스혁명도 이념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시민권의 확대와 현대적 의미의 역사도 이때를 전후로 해서 이루어지고 정립됐다. 언제나 기득권의 이익에 봉사했던 정치가 공평, 공정, 정의, 평등의 구현이라는 철학을 되찾은 것이다.



이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달라진 것이란 과학기술의 발전과 대중매체의 보편화에 따른 신자유주의적 통치의 발전뿐이었다. 공간을 시간으로 점령하는 세계화란 이 두 가지의 지원 하에 정치에서 철학적 가치를 담고 있는 이념을 배제시키는 과정이었다. 마키아벨리적 추문을 정치의 전면으로 끌어올린 것도, 정치를 마케팅으로 바꿔버린 미디어정치다. 한국의 경우 언론인(특히 기자와 앵커)이 정치로 옮기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대중매체가 보수적 가치를 지향하기 때문에 강준만식의 진보 비판이란 그 자체로 보수화를 의미한다. 대중매체가 주도하는 미디어적 시각에서 보면 ‘풀뿌리 민주주의’가 진보의 정답인데, 그것을 이루는 방식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국민의 수준이 그 나라의 정치 수준’이라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국민의 수준이 높다고 정치가 이념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차별을 조장하는 엘리트주의가 부활하고, 노력보다 능력이 중시되고, 결과의 평등을 강제하는 것들이 갈수록 힘을 잃는 부정의로 가득한 현실에서 국민을 계몽시키면 정치와 민주주의의 수준이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강준만식의 진보 비판과 시대 진단은 그저 지식인을 자처하는 자들의 언어적 유희일 뿐이다.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정치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적당한 타협이 아니라, 사후적 평등을 추구하는 정치과정을 통해 모든 개인이 또 다른 시작을 할 때, 다음세대들이 본격적으로 출발을 할 때, 공정하고 공평한 경쟁과 공존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자유와 평등에 의해 균형과 견제가 가능하도록 사회와 국가를 제도화하고 투명하고 예측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게 만들되, 어쩔 수 없이 참사가 일어나면 가장 민주적인 대처가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게 인류가 민주주의를 지배적 체제로 선택한 이유다.  



거의 모든 국민들이 삶에 찌들어 있도록 만들어, 풀뿌리 민주주의조차 불가능하도록 만든 것이 20세기 후반부터 정치권에서 이루어진 타협의 산물이었다. 다시 말하면 20세기 후반부터 정치권에서 이루어진 타협이란 우파적 가치를 강화하는 것이었다는 뜻이다. 



달라진 것이란 20세기 후반보다 모든 면에서 불평등이 늘어나 풀뿌리 민주주의는커녕, 자식의 죽음을 대중매체를 통해 생중계로 보았지만 부모들이 목숨을 건 단식이 아니면 진상규명에조차 다가갈 수 없는 정치적 타협을 가장한 야합이 늘어난 것이고, 진보 지식인을 자처했던 자가 타협하라고 유족들에게 대목을 박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정치적 타협과 투쟁의 방식을 바꾸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철저하게 보수화되고 재봉건화된 세상에서 진보가 싸가지라도 없으면 무엇으로 버틴단 말인가? 진보에게 싸가지 없다고 욕하기 전에 진보를 싸가지 없게 만드는 대중매체와 극단의 불평등이 초래한 현실의 부정의함부터 제대로 인식하라. 역사상 최고의 추문으로 유명해진 마키아벨리적 접근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싸가지 없는 진보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싸가지다. 진보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가 말이라는 것을 되살려내고, 보수진영은 애초부터 정체성이 없어 상황에 따라 변신하는 기회주의적인 집단이며,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욕망과 쾌락을 잘게 나눠 분할해서 지배하는 집단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인류가 선택한 민주주의는 일정 수준 이상의 사회경제적 평등을 보장하기 때문이며,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최종적 결과의 불평등을 끊임없이 최소화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진보진영에 필요한 것은 이념의 본질을 되찾는 것이며, 유시민처럼 싸가지가 없어도 정치의 본질이 말에서 출발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행동은 말보다 일관성을 유지하기 쉽다. 그래서 자본주의와 자유방임 시장경제, 신자유주의적 통치가 각종 불평등을 양산하고 인류를 공멸의 위기로 내몰았다는 것이 판명난 지금, 보수가 토론을 피하고 대중매체를 동원해 상징조작에 전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보수 비판에 적용해야 할 것을 강준만 교수는 진보에게 적용했다. 최소한 지금까지의 대중매체 인터뷰와 기사와 칼럼 등을 기준으로 하면. 즉 강준만은 더 이상 진보 지식인이 아니라 보수 지식인이다. 세상이 변했다고? 아니, 더 나빠졌을 뿐이다. 현재의 대한민국에선 아우성치며 시끄럽고 싸가지 없는 것이 차라리 낫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