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들이 행복의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우리는 아직 초기 가설을 만들어내고 적절한 연구방법을 찾는 단계에 머물고 있다. 확과한 결론을 채택하고 논의를 마무리 짓기에는 너무 이르다. 논의는 아직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수많은 접근법을 되도록 많이 알고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대부분의 역사서는 위대한 사상가의 생각, 전사의 용맹, 성장의 자선, 예술가의 창의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책들은 사회적 구조가 어떻게 짜이고 풀어지느냐에 대해서, 제국의 흥망에 대해서, 기술의 발전과 확산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개인들의 행복과 고통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의 역사 이해에 남이 있는 가장 큰 공백이다. 우리는 이 공백을 채워나가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위의 인용문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 나오는 내용이다. 《사피엔스》가 인류의 역사를 다룬 이전의 책들과 구별되는 것은 인공지능과 생명공학, 로봇공학(나노봇 포함)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지적 창조물은 인류에게 지난 40억 년 동안 이루어진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바로 이 시점에서 유발 하라리는 모두가 알고 있어서 누구도 알지 못하는 '행복'을 들고나왔다.



왜 하필 이 시점에서 '행복'이냐 하면 인공지능과 생명공학, 로봇공학이 창조해낼 미래ㅡ그때까지 인류에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다시 말해 그때까지 인류가 멸종하지 않는다면ㅡ 지금까지의 모든 것들이 적용되지 않는 세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과 생명공학, 로봇공학은 신의 창조를 대체할 것이며, 사물의 법칙도 바꿀 것이며, 인간을 우주적 차원에서 영생(죽지 않는 것과 다른)이나 무적의 존재로 만들어줄 것이다.



헌데 인간이 그런 존재에 이르면 정말로 행복해질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불의의 사고로 죽는다면 영원히 사는 나는 행복할까? 인류가 동시에 그런 존재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순서가 앞일수록 행복할까? 돈이 있어야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면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적은 돈으로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는 사람부터 순서가 결정되면 인정할 수 있을까? 이렇게 질문은 끝도없이 이어질 수 있다. 



이전에는 갈망만 했던 것들이 현실이 됐고, 되고 있고, 될 것으로 보인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유인원이었던 인류가 신에 근접하는 존재(유전적 조작이나 사이보그 포함)가 되는 것이 짧게는 10년, 길게는 100년 정도를 보는데, 우리는 어떤 준비도 되어있지 않다. 세월호유족 중의 일부나, 단원고 생존학생들이 1000년을 살 수 있는 존재가 된다면 그들은 세월호참사의 비통한 기억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까?



우리가 1000년을 살 수 있는 존재가 된다면 국가와 민족, 인종, 성, 젠더 등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결혼과 출산, 가족은 무슨 의미를 지닐까? 부와 성공, 철학과 종교, 인문학과 사회학은 어떤 역할을 할까? 창조와 사물, 우주의 법칙에 통달한 인공지능이 모든 발전을 주도할 텐데, 인간은 1000년 동안 무엇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야 할까?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주장한 것처럼 인류는 과거만 회상하며 사는 존재가 될까? 





인류는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극단적 불평등과 차별을 감수해야 했지만, 1000년을 사는 존재가 되면 똑같은 '자유'를 위해 똑같은 희생을 감수할 수 있을까? 무엇에 의미를 두고 무엇을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일까?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다면, 결국 자유보다 개개인의 행복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신이 준 최고의 선물이라는 자유의지는 죽는 존재에게만 절대적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부처는 기쁨과 고통을 느끼는 존재에 집착하지 말라고 했지만, 인공지능과 유전공학, 로봇공학의 도움을 받은 인간은 (100년을 사는 존재였을 때보다는 줄어들겠지만) 기쁨과 고통을 느끼는 존재로서 1000년을 살아야 한다. 그 오랜 시간을 불행하게 산다면 그것만큼 지옥 같은 세상이 어디 있겠는가? 지금부터 행복에 천착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의외로 자기자신에 대해 잘 모른다. 자신을 규정하는 것은 타인에 의해 이루어지기 일쑤다. 일할 권리가 무엇보다 중요해진 지금에는 자신을 돌아볼 시간조차 없다. 이런 상태에서 일을 거의 하지 않고 1000년을 사는 존재가 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직하다. 먹고 사는 것도 중요하고, 남들보다 잘살고 성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고도 행복하지 않다면 그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류는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왔다. 평등을 중시했던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도 최종 목적지는 자유였다. 인류는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노력을 행복을 찾기 위해 투자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행복이란 무엇인가? 나는 지금 행복한가? 내가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세 가지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 그렇게 하지지 않는다면 《사피엔스》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미국 사람들이 해마다 다이어트를 위해 소비하는 돈은 나머지 세상의 배고픈 사람 모두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 액수다. 비만은 소비지상주의의 이중 승리다. 사람들은 너무 많이 먹고(적게 먹으면 경제가 위축될 테니) 다이어트 제품을 산다. 경제성장에 이중으로 기여하는 것이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6.08.24 08:22 신고

    저의 행복 기준은 "마음의 갈등이 없는것 "입니다^^

  2. 이슈큐레이터 2016.08.24 08:50 신고

    사피엔스에 관한 글을 쓰셨군요 ~

    참 어려운 책인데.. 견문을 넓히려면 이런 종류의 책도 읽어야겠죠

    • 늙은도령 2016.08.24 15:28 신고

      재미있더군요.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 부담없이 읽기에는 최고였습니다.



책을 없애버리려는 자만이 비평할 수 있다.


                                                                  ㅡ 발터 벤야민의 《일방통행로》에서 인용




인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질서를 세우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기에, 모든 이들을 굴복시키고 배제시키는 완벽한 독재란 그 자신마저도 독재의 희생양으로 만든다. 자신의 세계를 제외하고는 모든 곳을 인간이 살 수 없는 사막으로 만드는 것은, 사막에 들어온 사람이나 사막을 떠나는 사람 모두에게 필요한 오아시스마저도 마르게 하기 때문에,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그렇게도 강조했던 어떤 시작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곳에 머물 수 있는 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뿐이다. 카네티도 자신을 노예로 만들었던 칼 크라우스의 실체가 모든 존재를 죽이는 완벽한 독재라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그의 유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음과 같은 성찰과 함께.





나는 이때부터 개개의 인간에게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시켜주는 언어적 형상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또한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를 하고는 있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또 그들의 말은 다른 사람들의 말과 충돌하여 튀어나가는 일종의 반동체라는 사실과 언어가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의 수단이라는 견해보다 더 큰 환상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상대방은 우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면 그는 더욱더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외치면, 그들도 되받아 외친다. 이렇게 되면 문법 속에서 초라한 삶을 꾸려나가는 감탄사들이 언어를 지배하게 된다. 여기저기서 외침의 소리들이 마치 공처럼 이리저리 튀면서 지면에 떨어진다. 다른 사람들 안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란 거의 없고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그러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 아름답고, 추하고, 고상하고, 천박하고, 성스럽고, 속된 온갖 종류의 말들이 모두 이 떠들썩한 말들의 저수지로부터 끄집어내어 사용한다. 그리고는 그 말들이 알아들을 수 없게 될 때까지, 그리고 완전히 다른 어떤 것, 즉 그것이 전에 의미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 될 때까지, 그 말들을 되풀이해서 사용한다. 언어의 왜곡은 창세기적 혼돈에까지 이른다.



결국 칼 크라우스는 세상의 모든 것을 들으려 했던 그의 자발성과는 달리, 그의 언어 사용은 그에게도, 그의 추종자에게도 어떤 자발성도 허용하지 않았다. 비트켄슈타인과 한나 아렌트가 누누이 강조했듯이, 말과 언어는 경험의 산물이며 모든 사유의 출발점인데 칼 크라우스의 강연과 글들은 그 자체로는 너무나 완벽했기 때문에 어떤 추가적 경험도, 무궁무진한 사유의 자유도 허용되지 않았다. 톱니바퀴처럼 맞아 떨어져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그의 세계는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버릴 운명이었다.





칼 크라우스가 살아 있는 동안 이런 치명적 모순을 깨달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완벽한 독재를 꿈꾸는 절대 권력은 피지배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판단하고자 하는 의지의 일반적인 감퇴현상”을 초래하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복종이 아니면 어떤 권위도 누리지 못하고, 지속되는 어떤 질서도 세우지 못한다. 자기 것이 아닌 것으로 타인을 현혹하고 흥분상태로 만들어 자신의 추종자로 만드는 독재자는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 피지배자들은 자신만의 밀실에서도 독재자가 가하는 공포와 폭력에 압도당해 어떤 사유도 이어갈 수 없기 때문에 노예나 가축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설사 독재자가 무엇을 이루었다 해도 남의 것을 차용해 끌어 모은 추종자의 에너지ㅡ자발적인 희생으로 포장지만 실제로는 착취당한 것ㅡ로 이룬 업적이기에, 그것은 단지 신기루일 뿐이다.



카네티의 고백성사는 이렇게 종결되는데, 그가 《말의 양심》에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모든 창조의 근원인 사유의 자유가 사라지면 인간의 삶은 그 자체로 영원한 휴면상태인 죽음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누군가의 노예였다가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힘겹게 자유인으로 돌아온 카네티 같은 깨달음이 없으면 ‘모든 창작은 인식의 조급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필자를 현대의 쓰레기로 전락시킨 폭력적인 세계와 혼돈의 시대, 1%의 희망 때문에 99%의 절망을 감내해야하는(조셉 콘래드의 소설에서 인용) 운명을 이해하고자 시작한 모든 지적 여정이 칼 크라우스와 비슷한 필자도 이것이 두려웠다.





한 때 자살만 생각할 정도로 최악의 상황에 처했던 필자는 모든 지적 여정을 홀로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그 방향과 사유가 올바른지, 원하는 목표에 이를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보니 수많은 분야의 책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어나갔다. 한 마디로 내 지적 여정은 거의 모든 것에 대한 잡식성 특징을 띠었다. 어떤 책을 읽다가 인용에 많이 나오는 책들을 구입해 읽었고, 신문에 나오는 신간들 중에서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들을 구입해 읽었다. 그 과정에서 나만의 세계가 구축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나, 누구하고도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기에 그것이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특히 카네티가 칼 크라우스에게 사로잡혔던 것처럼, 필자 역시 위대한 저자들에게 사로잡혀서 한 동안 그들의 세상에서 머물러 있어야 했다. 수많은 석학들의 사유와 성찰은 나에게 상당한 시간을 투자하도록 만들었고, 지적 여정의 곳곳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와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는데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고, 서로 충돌하는 부분에서 극심한 혼란을 주었다. 필자가 몇 번 집필에 도전했다 접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인식의 조급함의 결과였고, 끝내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체 하던 일을 접어야 했다. 나는 석학들의 사유와 성찰을 내것으로 녹여내, 완전히 새로운 창조물을 내놓기에는 준비가 부족했던 것이다.    




P.S. 신경숙의 표절논란을 지켜보면서 더욱 참담했던 것은 그녀를 옹호하는 평론가들의 주장이 너무나 형편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작가들이 제대로 된 창작물을 내놓게 하려면 평론가가 제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평론으로 먹고 살기 힘든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론의 기본도 갖추지 못한다면 한국 문학은 발전할 수 없습니다. 작가와 평론가의 선순환적 구조가 구축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5.07.22 08:21 신고

    문제가 왜 생겼냐는 원인을 풀어 생각해보면
    답이 나옵니다
    읽은 기억은 없고 기억을 믿을수 없고..
    대단한 모순입니다

    • 늙은도령 2015.07.22 15:59 신고

      표절에 해당하는 부분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글의 끝에 이런 저런 책의 도움을 받았다거나, 인용을 밝히면 됩니다.
      소설과 시는 창조의 작품입니다.
      앞선 위대한 작가들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겠지만, 신경숙의 경우는 그 정도가 지나칩니다.
      그래서 문제인 것입니다.

  2. 耽讀 2015.07.22 13:09 신고

    누구나 표절할 수 있지만, 누구도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생각하면 저 역시 자유롭지 못하는 삶입니다.
    자신을 향한 채찍질, 끝없는 지적 훈련을 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표절할 수밖애 없습니다.

    • 늙은도령 2015.07.22 16:00 신고

      표절은 밝히면 됩니다.
      " "로 표시하면 그대로 옮겼음을 말하고 ' '로 표시하면 수정해서 인용했음을 말합니다.
      얼마든지 표절이 아닌 인용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오세훈은 충북대 강연에서 “복지의 본질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노하우를 가르쳐주는 것”이라며 “우리의 재정 형편으로 부자 급식을 하는 건 정치이지 복지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서울시장에서 물러난 뒤 4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의무급식을 바라보는 그의 편향성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보편적 복지를 반대하는 오세훈의 논리는 단순함을 넘어 폭력적이기까지 합니다. 오세훈이 말한 ‘노하우’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정도면 국가와 복지의 본질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을 넘어 사실왜곡에 해당할 정도로 위험천만한 발언입니다.



현대성은 개개인이 처한 다양한 삶의 조건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방향으로 발전해왔습니다. 쉽게 말해서 돈이 없으면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것이 현대에서의 인간의 조건입니다. 교육을 통해 학생들이 자신이 처한 사회경제적 조건들을 돌파하기에는 현실의 장벽이 너무 높습니다.



초중고를 넘어 대학과 대학원을 나와도, 심지어는 박사학위를 딴 사람들도 현실의 장벽을 뛰어넘을 만큼의 노하우를 쌓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교육제도가 그런 개인을 만들어내지도 못하는 것을 넘어, 신자유주의적 체제가 개인으로 하여금 삶의 문제들을 돌파해나갈 기회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더 엄격하게 말하면 개인이 신분상승의 사다리에 올라탈 수 있을 정도의 노하우를 쌓도록 나두지도 기다려주지도 않습니다.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을 부추기는 현대사회란 개인(과 가족)으로 하여금 삶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충분한 기회와 수단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의 재정’ 운운하는 것도 사실왜곡의 전형입니다. 국가의 재정이란 어떤 조세제도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오세훈의 주장은 부자와 재계에게 유리한 현재의 조세제도를 손볼 수 없거나, 손대지 않겠다는 전제 하에서만 성립할 수 있습니다.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인정하고 들어갈 때만이 오세훈의 주장은 타당성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이해가 충돌하는 다양한 종류의 갈등을 조정해서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하는 정치의 필요성은 사라져버립니다.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이 갈등의 해결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공존이 불가능할 정도로 부의 불평등이 심화된 현실을 그대로 두자는 것이 오세훈의 주장입니다. 이처럼 선별적 복지를 주장하는 자들의 논리에는 한 가지 숨어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명확한 기준이 없어 정하기 나름이다)에게 선별적 복지혜택을 주는 대신 무한대의 부를 가질 수 있는 부자도 동시에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극소수에게만 가능한, 그래서 절대다수를 가난하게 만드는 무한대의 부를 인정하는 것이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노하우를 가르쳐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가난은 교육을 받았음에도 노하우를 깨우치지 못한 개인(과 가족)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의무교육과 선별적 복지를 제공했음에도 개인이 각자의 삶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노하우를 깨우치지 못했기에 가난은 큰 재산을 모은 부자과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는 제도의 책임이 아니라 개인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주어지는 복지는 선별적이어서 혜택이 되지 권리가 되지 못합니다.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삶의 노하우를 깨우쳐서 부를 쌓은 것이기에, 국가의 복지와 사회의 공적 부조를 받는 것은 성공한 자들에 비해 국가와 사회의 혜택을 받는 것이라 굴종적 인식에 사로잡힙니다. 가난이 곧 창피함이 될 뿐, 국민이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가 되지 못합니다.  



선별적 복지는 그래서 국가가 사회가 지출해야 하는 비용이 됩니다. 퇴임시 83%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빈국이었던 브라질을 중진국 반열로 끌어올린 룰라 전 대통령이 '부자를 돕는 것은 투자라며, 왜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왜 비용이라고 하느냐며 불만을 표출한 것도 같은 연장선상에서 나옵니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선별적 복지는 슈퍼리치와 초국적기업, 거대 금융자본을 위한 공개적인 면죄부입니다. 모든 부는 누군가의 빈곤을 전제로 하는데, 선별벅 복지는 수백만에서 수천만 명이 나눠가질 수 있는 거대한 부를 독점한 자들에게 세속적인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역할을 할 뿐, 부의 불평등을 줄이지 못합니다. 





선별적 복지는 또한 복지의 사각지대를 만들어냅니다. 이들의 숫자가 소위 부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숫자보다 많습니다. 극소수에 불과한 부자급식을 반대하다 송파모녀 같은 이들을 양산합니다. 복지의 사각지대는 맞춤형 복지로 커버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에 성공한 국가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이들은 또한 학부모의 자산과 소득을 파악하기 위한 엄청난 행정비용도 고려하지 않습니다. 어떤 나라도 지하경제 규모가 20% 정도를 차지하는데, 그것을 일일이 파악해서 투명하게 만드는 행정비용(부당수급되는 비용도 행정비용이다)이면 보편적 복지의 최소한인 의무급식을 중단할 이유조차 사라집니다.





오세훈과 홍준표 같은 자들은 가난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무한대의 부를 허용하기 위해 선별적 복지를 주장할 뿐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성공한 자들이 가지는 편협하고 반인류적인 현실인식은 자신의 경험을 전체에 투사시켜 모든 사람을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지옥으로 밀어 넣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너무나 많은 돈을 가진 슈퍼리치와 초국적기업과 재벌의 오너와 경영진, 거대 금융자본에게 지금보다 더 탐욕적인 부의 사냥에 나설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줍니다. 개천에서는 용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개천에서 용이 나려면 개천을 용이 나올 수 있는 수준까지 만들어줘야 하는 것이지, 용이 살지 않은 개천에서 용이 나오라는 것은 대국민사기극입니다.



바로 여기에 총체적 차별을 당연시하는 능력주의와 시장경제를 위한 최소한의 통치라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의 무서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도 놓쳤고 케인즈도 놓쳤던, 그러나 허버트 스펜서는 꿰뚫었던 정치의 역할이 최소로 축소되는 신자유주의 우파의 이데올로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2부 개인은 어떻게 제도의 노예로 전락하는가?로 이어집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5.04.11 11:37 신고

    개인적으로 오세훈 시장은 평가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저는 여당내에서는 그래도 생각이 괜찮은 사람이었다라고
    기억합니다

    • 늙은도령 2015.04.11 16:48 신고

      오세훈법이 있는데 그것은 돈 없는 진보정당을 죽이는 법입니다.
      보수세력들은 기득권들이라 진보정당보다 자금 운영에 애로가 없는데 진보정당은 오세훈법이 정한대로 하면 선거에서 이길 가능성이 희박해집니다.
      오세훈이 한 일은 겉으로는 정의를 표방하지만 기득권에게 유리한 것만 해놓고 간 시장입니다.
      그가 한 일을 조금만 살펴봐도 그가 얼마나 무서운 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2. 유태준 2015.04.11 22:24

    선별적 무상급식이 오히려 부의 대물림을 제제하는데 도움이 될것 같은데요..
    저만그렇게생각하나요? 제가 초등학교 다닐적에는 가난해서 밥못먹는 친구들이 있으면 나눠주고 도와주면 도와줫지 따돌림하거나 하는건 12년 교육과정동안 본적이없어서그런지 선별적무상급식의 반대의견논리에는 도통 공감할수가 없네요

    • 늙은도령 2015.04.12 01:01 신고

      최소한의 보편적 복지는 부자가 가난한 자를 나누지 않는 대신 부자에게서 누진적 과세를 받아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부를 나눠야만 자본주의 세상에서 비슷한 기회와 출발의 환경이라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가족의 부와 건강, 지역, 사회, 국가 등등에 따라 불평등하게 태어납니다.
      최근에는 그런 불평등을 고착화시켜 부와 기회가 세습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물려주는 부와 기회의 차이는 너무나 커서 절대 공정한 경쟁이 불가능합니다.
      최소한의 평등도 이루지 못합니다.
      의무급식을 선별적으로 해서 마련되는 비용으로 빈곤층 아이들에게 교육비를 지원한다 한들 기존의 부자들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차별은 그렇게 커지고 공고해집니다.
      아이들이 부의 크기에 따라 친구들마저 달라집니다.
      최소한 아이들이 그런 차별과 불평등을 점심 먹을 때만이라도 느끼지 않게 해주자는 것이 의무급식의 정신입니다.
      국가란 모든 국민에게 똑같은 복지를 제공하는 것이지 차별적 복지를 제공하기 위해 결성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출발시의 불평등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가 발전했고, 그것이 인간의 가치를 짐승과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인간은 불평등하게 태어나지만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평등해집니다.
      그것이 정치가 하는 일이고 국가의 역할입니다.

      당신이 지금의 교육현장을 가보지 않아서 하는 말입니다.
      초등학교 1~2학년만 되도 자신이 살고 있는 동내에 따라 차별되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일들이 수두룩하게 벌어집니다.
      요즘의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그런 차별에 익숙해져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게 현실이에요.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현실입니다.

  3. BGG뚜벅이 2015.04.12 20:58 신고

    하위 50%까지 지원한다고 했을때, 50.1%에 속하는 사람은 지원을 안 해줘야하는지, 49.9%사람들이 꼭 지원받을 필요가 있을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네요. 기준이 있다면, 오히려 그 기준을 악용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늙은도령 2015.04.12 21:28 신고

      네, 그것이 복지의 사각지대가 됩니다.
      선별적 복지는 극소수의 부자를 핑계로 서민, 특히 빈곤층의 삶을 지배하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이란 종으로서는 평등하게 태어나지만, 주어진 환경에 따라서는 불평등하게 태어납니다. 우리는 천부인권을 지닌 존엄한 존재로서 평등하게 태어나지만, 무한경쟁과 적자생존의 자본주의 시장경제 하에서는 수없이 많은 면에서 불평등하게 태어납니다. 지적 존재로 진화한 인간은 그 지적 작용의 결과 때문에 철학적 개념인 존재론적 차원과 정치적 개념인 민주주의의 차원에서는 평등합니다. 



하지만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승격시킨 그 지적 작용이 만들어낸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메커니즘을 거치면, 개인이 된 인간은 현실과 환경에 따라 출발부터 철저하게 불평등한 존재로 변질됩니다. 부가 쌓여서 축적돼 세습하는 단계가 되면 어떤 것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는 견고함(압도적인 권력)을 지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불평등도 쌓여서 축적돼 세습되는 단계에 이르면 어떤 것으로도 타파할 수 없는 견고함(가난의 대물림)을 지니게 됩니다. 두 견고함 사이에는 영원히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자리합니다.





‘미생’의 장그래는 태생적 불평등의 견고함을 타파하고자 평생을 거쳐 사용해야 할 에너지를 쏟아 붙고 있지만, 그는 언제나 자신의 출발점에 뿌리내리고 있는 불평등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인식과 태도의 차원에서도 불평등을 수용하는 것에 익숙한 장그래는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의 정규직마저도 거대한 심연입니다.



장그래는 정규직이라는, 실제 그 자리에 올라서면 별반 다를 것도 없는 정규직이 되기 위해 몸부림을 칩니다. 그는 다시 오지 않을 현재를 다가가면 그만큼 멀어지는 미래의 전당포에 저당 잡힌 사회적 불평등의 포로입니다. 정규직이 목표인 그는 수없이 많은 ‘YES’를 자신에게 주입시키고 또 주입시킵니다.



장그래의 눈에는 오 차장이 아득히 멀게만 보일 것인데, 최 전무에 이르면 하늘보다 더 높아 보일 것입니다. 그런 장그래가 재벌2세인 조현아 부사장을 보면 어떻게 보일까요? 서비스가 회사의 매뉴얼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항공기를 멈추게 만든 조현아의 행태는 어떻게 보일까요?





회사의 경영을 책임진 임원에게도 재벌의 오너와 일족은 제왕이자 왕족이고 성골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주인이고 생사여탈권을 지닌 현실의 절대자입니다. 마음속으로는 온갖 욕을 퍼붓고 빈정거린다 한들 현실에서의 오너와 일족은 영원히 건널 수 없는 거리에 있는 태생이 다른 존재들입니다.



이런 식으로 철저한 위계가 정해진 경로에 따라 말단 계약직까지 내려오면 둘 사이에는 어떤 방식으로도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자리하게 됩니다. 만일 장그래가 대한항공의 계약직 사원이고, 기내 서비스에 투입됐으며, 오너의 딸인 부사장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담당이었다면 그는 어떻게 됐을까요?



인간이란 종으로서의 장그래와 조현아는 성별만 다른 평등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전혀 다른 환경에서 태어난 장그래와 조현아 사이에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불평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장그래는 항공기에서 내리자마자 계약이 해지됐을 것이고, 조현아는 늘 그렇듯 목적지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언론의 집중포화에 노출된 조현아의 ‘슈퍼갑질’은 정치적 판단(절대 사법적 판단이 아니다)에 따라 최소한의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당분간 조현아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여론의 질타를 받을 것이고, 대한항공의 서비스는 더욱 강화돼 직원들을 힘들게 만들 것입니다.



해당 스튜어디스는 알아서 사표를 낼 것이고, 그녀의 상사들과 기장과 부기장에게는 불이익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딱 거기까지입니다. 정치적 판단이 제대로 내려지지 않는 한, 아울러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런 불평등과 부조리를 정치가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 한 딱 거기까지입니다.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과 《정치의 약속》에서 말했듯, 인간은 불평등하게 태어나지만 올바른 정치에 의해 평등을 향해 나아갑니다. 계약직인 장그래의 눈으로 본 조현아는 까마득한 높이에 자리한 존재일지 모르겠지만, 정치적 존재로서의 장그래의 눈으로 본 조현아는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할 피고인에 불과합니다.





사회적 관계에 의해 견고해진 불평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그것을 미래의 세대까지 넘겨주지 않는 것, 그것이 정치의 역할입니다. 대한한공 조현아 부사장의 ‘슈퍼갑질’을 뉴스를 통해 접하며, 고군분투하고 있는 ‘미생’의 장그래와 그 보다 더 열악한 '카트'의 주인공들을 떠올려 봅니다. 



그들 사이에도 존재하는 불평등은 '비즈니스 프렌들리'에서 '줄푸세'로 이어지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조현아의 '슈퍼갑질'에 정규직의 임금을 삭감하고 해고 요건을 완화하려는 박근혜 정부의 친재벌적 정책이 오버랩되는 것은 저만의 과잉반응일까요? 



학교 주변에 호텔을 건설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하려는 법률이 대한항공을 위한 ‘생애 맞춤형 재벌복지’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 '땅콩 부사장' 조현아의 ‘슈퍼갑질’이 더욱 불쾌하게 다가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소득과 삶의 질이 보장되지 않는 곳에서는 진정한 자유와 다양한 선택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4.12.09 08:38 신고

    권력은 사용연한이 있고 몇년마다 평가를 받지만
    재벌은 평가를 받지 않는 무소불위의 힘을 과시합니다

    어떻게 보면 정치 권력보다 그 집단에서는
    제왕적으로 군림합니다

    차제에 이런것도 없어질수 있도록 해야됩니다

    • 늙은도령 2014.12.09 17:53 신고

      정치가 그래서 필요합니다.
      경제민주화를 추진하려면 정치가 의회를 법을 제정하고, 정부를 통해 강제함으로써 이룰 수 있습니다.
      기업이란 권위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 형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조직입니다.
      경제민주화는 그런 조직의 논리를 민주화하는 것이고, 그럴 때만이 조연아의 땅콩 회항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2. 박지숙 2014.12.09 09:30

    좋은 글 읽고 갑니다. 우리나라가 갈수록 골품제 사회로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항하기도 힘든 세상입니다. 모두가 그렇게 가는 사회 체제에 반기를 들지 않고 수용을 하고 있는 분위기니 말입니다. '인간은 불평등하게 태어나지만 올바른 정치에 의해 평등을 향해 나아갑니다'란 말이 가장 마음에 들어오는군요.

    • 늙은도령 2014.12.09 17:54 신고

      네, 정치의 역할이 매우 필요합니다.
      철학이 분명한 정치가 제 역할을 다하면 인간은 태생에 따른 불평등을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경제민주화도 정치가 하는 것이지 기업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3. 동의합니다 2014.12.12 01:31

    오래 전 읽었던 명상서적에서
    민주주의가 발달한 오늘날에도 노예제도는 엄연히 존재한다는 말에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그 제도가 현재에도 계속 이어지게 하는 것은
    신분이 아니라 돈이다라는 말에서 고개가 끄덕여 지더군요.
    요 며칠 동안 그 말이 더욱 절실하게 와 닿습니다.

    이제는 정말 돈이면 다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군요.
    그리고 이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올바른 정치의 힘이다라는 말씀,
    정말 크게 동의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우리의 살림을 맡아서 제대로 일을 하는
    정치인을 뽑는 일에 소홀히 하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계속 좋은 글 기대합니다.

 

근대이성이 창출해낸 현대성이란 즉각적인 만족을 위한 소비지상주의와 무한투쟁을 장려하기 때문에,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가 왜곡돼 전달될 수 있었다. 하지만 앞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인간이란 이기적인 유전자의 횡포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우리는 그저 복잡한 생존기계가 아닌 스스로 운명을 창조할 수 있는 위대한 종이자, 모든 생명체가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지적 존재이다. 신이라는 존재와 무한이라는 개념을 추상할 수 있는 인간이란 종은 그래서 한 명 한 명이 작은 우주이며, 곧 신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예언자로서 나서는 대신 우리의 운명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최선을 다해 일을 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우리의 오류를 항상 눈여겨보도록 우리 자신을 길들여야 한다. 권력의 역사가 우리의 심판자라는 생각을 우리가 내던져 버릴 때, 역사가 우리를 정당화해 줄 것인가에 대해 염려하는 버릇을 끊어 버렸을 때 그 때에야 비로소 아마도 우리는 권력을 길들이는 데 성공하게 될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역사를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정당화를 너무나 절실하게 요청하고 있다.”

 

 

거의 모든 면에서 진보좌파인 나는 합리적 자유주의자인 칼 포퍼와는 몇 가지 면(특히 경제적 관점과 변증법적 유물사관)에서 일치하지 않지만, 정치권력의 역사에 대한 그의 인식과 그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래서 역사는 단순한 사실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나와 모든 사람의 것이어야 한다. 혼자만의 역사와 이미 결정된 역사란 아무런 의미도 없고, 승자와 강자의 역사란 폭력의 만연으로 짐승으로 되돌아간 인간이란 종의 비극을 보여줄 뿐이다. 민주주의란 그런 세상에선 무용지물이 될 뿐이다.



만일 위정자가 국민의 뜻에 반하는 통치를 하면, 그를 끌어내릴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며, 열린사회가 지향하는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라고 했다. 위정자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것도 국민이고, 그의 탈선을 막기 위해 그를 끌어내리는 것도 국민이 권력을 회수하는 것이라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 전 세계의 위정자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며, 이럴 때만이 열린사회는 점진적인 발전을 할 수 있으며, 다양한 형태의 발전이 가능하다.

 




알렉시스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인간은 권력의 행사나 복종의 습관으로 타락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스스로 부정하다고 믿는 권력을 행사하거나, 부정하게 탈취되고 억압적이라고 스스로 여기는 통치에 복종하게 되면 타락하고 만다”고 한 것도 매우 중요한 성찰을 제공한다. 이는 승자와 강자의 공적독점을 대체한 사적독점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더구나 사적독점이 공적영역마저 사유화하는 이 시대에는 더욱더 유효하다.



‘억압과 착취 속에서도 세상은 돌아간다’고 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진정한 자유는 불멸의 가치로서 영원한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자유가 없다면 인류의 존엄성은 사라진다. 하지만 그것이 사회경제적 평등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인류의 역사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리고 육체적이던 정신적이던 사회적이던 간에 평등이라는 것이 탄생과 함께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불평등한 부조리에 저항하고 투쟁해야 한다(생명의 침해불가능한 존엄성과 탄생의 불평등은 다른 얘기다. 이 둘을 혼동하면 안 된다).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자로써 살아가지 않는 한 나는 타인에게 비쳐진 나일 수밖에 없다. 타인이 지옥일 수는 있어도 존재 자체와 관계를 거절할 수는 없다. 죽음마저도 자신의 삶의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아 스스로 선택하는 가장 극단적인 저항이라고 말한, 자본주의 사회가 철저하게 배격한 위대한 철학자 쇼펜하우어(우리나라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과소평가된 철학자로 스피노자와 함께 진정한 의미의 자유주의자이자 진보주의자였다)의 말을 잠시 빌려보자.

 

 

“타방이 있어야만 일방이 있으며, 타방이 없으면 다른 일방도 소멸되어 버린다. 양자는 서로 직접 접경하여 객관이 시작되는 데서 주관은 끝난다. 양자의 경계가 공통된 것은 모든 객관의 일반 형식, 즉 시간·공간·인과율이 객관의 인식이 없이도 주관에 의해 안전히 인식”될 수 있다.

 

 

인간은 뉴런거울신경을 지니고 있어 사전 접촉이 없었던 상대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인식할 수 있다. 나와 타인의 경계가 공통된 것은 나와 타인을 구별하는 것이 오히려 인위적이라고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나는 상대가 있어야 존재하며, 상대 또한 내가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주관이 타인의 주관을 억압해서는 안 되고, 나에 대한 타인의 주관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사실이라는 객관적 팩트(시간과 공간, 인과율에 의해서 시계열 상으로 진열되는 역사의 단편들)는 의미라는 주관적 판단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만, 내가 소중한 것만큼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없다는 생각과 믿음이, 역사에 적시될 팩트를 결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역사는 모든 사람의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왜곡이 없는 절대 다수의 삶의 이야기들. 최초의 모든 이들과 그 후손들 모두가 주인공인 보편적 역사의 탄생. 

 

 

이번에는 인류의 위대한 현인이며 공화국의 부활을 꿈꾸었던 정치학자의 입을 빌려보자. 그녀는 인간은 늘 출발할 수 있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인간의 조건』, 누구나 상황에 따라 악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악마가 될 수 있다는 『예루살렘의 아히이만 -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와 인류 최악의 범죄를 저질렀던 히틀러의 나치를 파헤친 『전체주의의 기원』 등을 쓴 한나 아렌트다. 좌파와 우파를 떠나 오직 인간에만 집중했던 그녀의 사상은 네그리의 비판을 떠나서도 인류의 자산임에 틀림없다. 하물며 다음과 같은 통찰은 어찌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겠는가.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확신은 역사를 상투적인 틀로 해석하는 길로 이어질 수 있다. 이해란 잔악무도함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례에서 전례 없는 일을 추론하거나 현실의 영향과 경험의 충격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도록 만드는 유추와 일반화를 통해 현상들을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이해는 오히려 우리의 세기가 우리 어깨에 지운 짐을 검토하고 의식적으로 떠맡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짐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그 무게에 패기 없이 굴복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 이해란 현실에, 그것이 무엇이든, 미리 계획하지는 않았지만 주의 깊게 맞서는 것이며 현실을 견뎌내는 것이다...현실을 아무런 편견 없이 감연히 맞서 이겨내는 것이다. 

 


내가 나의 능력에 비해 너무나 과분한 일인 인류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역사에 대한 이해가 유치하고 깊이가 턱없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나는 가능한 한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 최대한 알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럴 때만이 강자와 승자 위주의 현실에 대해 아무런 편견 없이 맞설 수 있을 것이며, 나와 생각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하나씩 늘어나 연대를 이룰 때 그들에 맞서 싸워 이길 수도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아무리 과거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미래를 알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있는 것인데, 그것 때문에 오히려 나는 더욱 분명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 권력의 결정체인 새로운 제국과의 싸움이 어찌 간단할 수 있겠는가? 제국의 체제 논리 때문에 전 세계가 상시적 전쟁 상태에 빠져든 상황까지 고려하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이 어찌 그에 대적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노력하고 연대한다 해도 무적의 제국을 무너뜨린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나는 모든 제국과의 싸움에 임해, 그 투쟁의 지평선을 최대한 넓히고자 한다. 더하여 이런 투쟁이 더 많은 곳에서 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그리고 그 투쟁들이 인터넷을 통해 소통하고, 삶의 현장에서 네트워크 식으로 연결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서로의 특이성을 인정하며 공통의 가치를 창출해가기를 희망한다. 

 

 

만일 내 터무니없는 희망이 현실이 된다면 그 파급력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내가 다시 쓰고자 하는 약자들의 역사이며, 평범한 사람들이 주인공인 세계사의 진정한 모습이다. 부디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강자와 승자의 역사에서 사라진 수많은 약자들과 평범한 사람들의 안식처이자 재발견이 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지상에서 보고 싶은 수없이 많은 이름 모를 사람들의 성지의 일단이라도 보여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



마지막으로 T.E.로렌스의 《지혜의 일곱기둥》에 나오는 인용문으로 글을 마칠까 한다. 새로운 출발점에 선 내 마음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며, 세월호 유족들의 입장에서 역사를 쓰면 똑같은 마음에 이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ㅡ특히 지식인들은 반드시 세월호 유족의 입장에서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슬프고도 참혹하며, 좌절하지 않는 위대한 역사를 써야 한다, 그들의 성지로 가는 순례자의 마음으로.



“나는 문득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이 바로 순례자들의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대에 걸쳐 북쪽의 민족들은 성스러운 유물에 대한 신앙심을 가슴속에 품은 채, 성지를 방문하기 위해 이 길을 지나갔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아랍 혁명은 순례자들의 귀환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이상을 대신하여 또 하나의 이상을, 계시에 대한 과거의 믿음을 대신하여 자유에 대한 믿음을 품고, 북쪽으로, 시리아로 돌아가는 것이다.” 




"모든 철학이 죽었다"는 비트켄슈타인의 절망적인 선언이 나왔던 시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철학과 사회학이 죽어버린 시대가, 신자유주의 통치와 거대 미디어의 세상인 지금이기 때문입니다. 생각 자체가 사라진 채 끊임없이 이동하고 접속하며, 단 한 번의 클릭으로 자신의 과거를 삭제하고, 현재의 나를 끝없이 업그레이드하는 모바일기기의 특징으로 인해 지금-당장이라는 소비지상주의가 만연된 시대적 특징을 감안하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비판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의 지식인들이 현실비판에서 멀어지면 화석의 존재처럼 변해버린 존재의 근거마저 사라져버립니다. 포기는 쉽고, 타협은 탈콤하며, 전향은 부를 제공합니다. 지식인이 꼭 가난할 필요는 없지만, 비판정신을 잃을 만큼 많은 부를 쫓아가면 나태한 정신이 비판정신을 부패시키기 일쑤입니다. 타협과 타락의 시작은 늘 비슷한 것에서 비롯되기 마련입니다.  





유대인을 대량학살한 홀로코스트의 행정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본 한나 아렌트(그녀도 유대인이다)가, 인류사의 최대 악으로 지탄받고 있는 나치의 핵심인물 중 한 명이었던 아이히만이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ㅡ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를 출간한 뒤, 좌우로부터 융단포격을 받고 자신의 주장을 더 이상 펼치지 않았던 것을 떠올리면, 동시대의 주류에서 벗어난 사상을 꿋꿋하게 밀고 나가는 것은 자살행위에 다름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좌우의 융단포격을 받은 한나 아렌트가 자신의 사상을 끝까지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지식인의 역할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지식인(모든 개인도 마찬가지이지만)에게 주어진 삶이 사막처럼 척박하고 황량해도 끝끝내 시작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던 것을 철회하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며, 휴머니즘을 가득한 정치철학의 부활을 위해 끝까지 노력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한국 지식인의 표상이었던 리영희 교수와 최근에 생을 달리한 신영복 교수가 그렇게 살았지만, 그들의 뒤를 이을 행동하는 지성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한국의 지성사는 각자도생의 퇴로에서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김대중과 노무현에 필적하는 지도자가 나오지 않는 것도 결국은 언론과 지식인의 권력과 자본에 대한 치열한 비판이 종적을 감췄기 때문입니다.  



비록 큰 돈을 벌 수도 없고, 권력과 자본과 결탁한 사이비 지식인들과 다른 관점을 지닌 올바른 지식인들에 의해 많은 공격에 시달리겠지만, 비판이론을 업으로 삼고 있는 지식인이라면 '병 속의 편지' 같은 편법에 빠져드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부르디외가 《세계의 비참》의 추고에서 말한 것을 지식인(특히 철학과 사회학을 전공하는)이라면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합니다.



사회적 세계를 연구하는 데 인생을 바칠 기회를 얻은 사람은, 세계의 미래가 걸려 있는 투쟁 앞에서 무관심하거나 중립적으로 있을 수 없다.         

 


부르디외의 성찰처럼, 이번에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슴에 단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를 기리는 벳지를 달고 다니는 것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여지가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인간의 고통 앞에서는 중립이란 없다"고 말한 것은 동일한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과 지상에서의 삶을 구원해야 하는 성직자와, 인류에게 무엇이 진실이고 정의인지 알려야 하는 지식인들은 인간에 사랑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합니다. 

  


헌데 교황이 '죽음의 문화'라고 말한 부정적 세계화가 지구의 곳곳을 가로지르며 전 지구적 시장으로 끌어들여 뼈속까지 빨아먹고 있는 지금/현재, 돈이 되는 것은 모두 다 전문화돼 일반인들은 접근하기 힘들고, 그들의 주장을 이해하기도 힘듭니다. 전 지구적 지배계급과 거대 자본 및 초국적기업에 봉사하는 지식에는 국경이 없어졌고, 지식인들도 비슷하게 행동합니다. 세계화의 주역들을 위해 치외법권적 지위를 누리며 계급화된 엘리트로 자리매김한 현대의 지식인들은 부정적 세계화를 위해 시민을 소비자로 변질시키는 상징제작자와 상징조작자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 부정적 세계화의 정도가 심화된 대한민국에서는 족벌신문과 정권의 나팔수를 자처하는 방송들을 맴돌며 정치권만 기웃거리는 사이비 지식인들이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영혼도 철학도 없는 그들은 오로지 돈과 권력만 쫓아 불나방 같은 행태를 서슴지 않습니다. 지식인의 업무가 현실비판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돈과 권력의 맛에 길들여진 이들은 사실과 진실은 물론 진리와 공리마저 왜곡하고 있습니다.  





그 가치와 진실 여부는 전혀 검증되지 않은 정보들이 지식의 이름으로 홍수처럼 밀려오는 디지털 세상에서 지식인이 할 일이란 자신의 사상이 경고하는 미래상이 틀리기를 바라면서 부정적 세계화의 현실과 사회비판에 물러섬이 없어야 합니다. 성장과 개발이 불러온 현실이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비대칭적 종말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망가져 버렸지만, 모름지기 철학과 사회학을 업으로 삼고 있는 지식인이라면 실낱같은 희망을 잉여에서 쓰레기로 버려지고 있는 현 시대의 난민과 미래세대에게 제공해야 합니다. 



비판이론을 평생의 업으로 삼은 지식인이라면, 지그문트 바우만이 《유동하는 공포》의 마지막에 했던 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사회경제적 평등과 돈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진보좌파의 가치가 민주주의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확고하게 믿는 지식인이라면 더욱더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깨어 있고 행동하는 시민에서 소비하는 개인으로 파편화된 일반인들이 비판이론을 정립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진리와 정의 및 자유와 평등에 대한 부단없는 탐구와 기득권의 탐욕을 고발하고 경고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지식인들이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비전을 제시할 수 없다면,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폭력적인 현실은 지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득권의 탐욕에 지식인이 침묵하면 언론도 침묵하고, 교육도 무너지고 권력은 오만방자해집니다. 그럴 경우 바우만의 마지막 희망과 프란치스코 교황의 호소도 아무런 역할을 못할 것입니다. 



다가오는 세기는 궁극적인 재앙의 시대가 될 것이다. 아니면 지식인과 민중 사이에 새로운 협약이 이루어지는 시대가 될 것이다. 희망을 갖자. 이 두 개의 미래에 대해, 아직도 우리에게 선택의 기회가 남아 있으리라고.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달빛천사7 2014.08.20 05:51 신고

    잘보고 감니다. 좋은하루되셔염

  2. 태봉 2014.08.20 08:41

    좋은 날이 올거라 희망해 봅니다
    잘 보고 가요 화이팅~~!!^^

  3. 유머조아 2014.08.20 15:58 신고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무척 철학적이십니다..

  4. 새벽을기다리며 2014.08.20 17:38

    좋은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오래오래 건강하십시오.




아래의 인용문은 플라톤보다 반세기 전의 철학자(소피스트)였던 페리클래스의 추도문이다. 그는 이 추도문에서 초기 민주주의의 원형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아테네 정치철학의 핵심을 제시했다. 실제 아고라로 대표되는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일종이 지배계급인 남성 시민에게만 허용(20세기 초까지 이어졌는데 남녀불평등의 기원이었다)됐지만, 그들 사이에서는 완전한 평등이 보장됐기에 자유로운 의견 개진과 상대에 대한 설득 및 공익에 합당한 합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공자가 말을 빌리자면, 수신제가(자신을 다스리고 가족을 부양하는데 성공한, 경제적 관념이다)에 성공해서 치국평천하(나라를 다스려 천하를 평안하게 만드는, 정치적 관념이다)에 나선 남성 시민들의 공론장이 아테네의 아고라다. 이곳에서는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고 상대를 설득하거나, 설득당해서 공적 이익에 합당한 합의에 이르는 과정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원형이자 민의의 전당을 의미한다. 페리클래스의 추도문은 이를 가장 잘 담아냈다.    



우리의 정치체계는 다른 곳에서 시행되고 있는 제도와 경쟁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모방하지 않고, 하나의 표본이 되고자 한다. 우리의 행정은 소수 대신에 다수를 옹호한다. 이것이 민주주의라 불리는 이유이다법률은 개인들의 사적인 분쟁에서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정의를 행사한다. 그러나 우리는 탁월한 자의 주장을 무시하지 않는다. 어떤 시민이 뛰어나면, 그는 다른 사람에 앞서서 국가에 봉사하도록 요청된다. 그러나 그것은 특권으로서가 아니라 그의 장점에 대한 보상일 뿐이다. 


가난은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는다. 우리가 향유하는 자유는 일상적인 생활에까지 확장된다. 우리는 서로를 의심하지 않으며, 우리의 이웃이 그들 자신의 길을 선택한다면 그를 성가시게 하지 않는다......그러나 이러한 자유가 무법적인 상태를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행정장관들과 법률을 존중하도록 배우며, 피해 입은 자에 대한 보호를 잊지 않도록 배운다. 그리고 우리는 역시, 그 강제력이 옳다고 느끼는 보편적 감정에서만 존재하는, 불문율을 준수할 것도 배운다. 우리 국가는 세계에 개방되어 있다. 우리는 결코 외국인을 추방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대로 살 수 있는 자유가 있으며, 그렇지만 언제나 위험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사랑하되 환상에 빠지지 않으며, 우리의 지성을 향상시키고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의지를 약화시키지 않는다......자신의 가난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불명예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가난을 면하고자 노력하지 않는 것은 불명예로 여긴다. 아테네 시민은 개인적인 사업에 몰두할 때에도 공무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우리는 국가에 관심이 없는 자들을 무해한 인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쓸모없는 인물로 생각한다. 비록 소수의 사람만이 정책을 발의할 수 있다 해도, 우리 모두는 그것을 비판할 수 있다. 우리는 논의를 정치적 행위에 대한 장애물로 보지 않고, 현명한 행위를 위한 하나의 불가피한 예방행위로 본다. 우리는 행복은 자유의 열매이고, 자유는 용기의 열매라 믿으며, 전쟁의 위험에 위축되지 않는다.


종합적으로 말한다면, 나는 아테네는 그리스 세계의 학교이며, 모든 아테네의 개개인은 적절한 재능을 기르고 위기에 대처하며 자립적일 수 있도록 성장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바이다. 



헌데 페리클래스가 플라톤보다 반세기나 앞서 정립했던 아테네 민주주의의 정치철학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부정되고, 그리스에 패한 트로이의 후예들이 세운 로마제국의 정치철학으로 이어지지도 못했다. 아테네의 아고라로 대표되는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 정치철학이 로마에 들어서는 법률(공법학자의 몫이었다)로 대체되고, 제국의 등장으로 이어진 것도 민주적인 정치철학을 죽여버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이 지대하게 작용했다.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과 《정치의 약속》을 보면 이런 아테네의 정치철학이, 플라톤이 제시한 '억제된 국가'의 정치철학에 의해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종말을 고하는 과정이 자세히 나와 있다. 좌우를 막론하고 지상의 천국인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은 플라톤(철인왕에 의한 통치)과 아리스토텔레스(비례적 평등 개념이란 차별주의)에서 정치철학과 윤리학, 형이상학 등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은데, 필자처럼 어떤 유토피아도 전체주의적 성향을 띤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늘 긴장을 늦추면 안 되는 위대한 철학자들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혁명인 프랑스대혁명이 자신들이 일소한 구체제를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로 끝을 맺은 것도, '자유, 평등, 박애'라는 모든 근대 민주주의의 울림을 제공했음에도 유토피아에 대한 지나친 강박관념이 결정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전체주의의 일종인 공포정치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혁명을 주도한 혁명가와 공화주의자들이 새 체제의 엘리트가 된 이후에는 정치 참여의 폭을 넓히는데 반대했고, 좌파를 배제했으며, 구체제의 귀족들을 끌어들여 과두정치로 접어들었다.  





프랑스대혁명을 다룬 저서 중 최고로 평가되는 알렉시스 토크빌의 《앙시앙 레짐과 프랑스혁명》을 보면 이런 대혁명의 변화를 지켜본 미라보가 구체제의 왕에게 보낸 비밀 편지가 실려 있다. 혁명가와 공화주의자들의 변화는 절대군주의 회귀를 불러왔고, 이런 구체제의 귀환은 1차세계대전에 이어 2차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까지 지속됐다. 미라보의 비밀 편지는 다양한 변수가 존재하는 세상사란 처음에 의도한 대로 흘러가지 않으며, 기득권의 힘이란 권력의 본질을 이루는 핵심임을 보여준다. 



현재의 상태를 구질서와 비교한다면 안심하고 희망을 찾을 만한 특징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국민의회가 발표한 칙령 대부분은 왕정에 분명히 긍정적입니다. 의히와 시 정부와 강력한 사제단과 특권과 귀족이 여전히 존재하는데 잘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평등의 원칙에 기초한 하나의 시민집단이라고 하는 근대적 발상은 분명 리슐리외를 기쁘게 했을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표면적 평등은 권력의 행사를 용이하게 하기 때문이지요. 왕의 권위를 위해 수 세대 동안 이어져온 절대주의 체제도 하지 못했던 것을 혁명 1년 동안 성취해놓았습니다.       



바로 이런 역사의 아이러니가 최근에 들어 진보좌파들이 가장 많이 성찰하는 것이다. 통치라는 것, 이른바 기득권의 힘으로 대체되기 일쑤인 권력의 작용에 대해 21세기의 진보민주진영은 다시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마키아벨리의 추문과는 달리 현대적 의미의 통치술에 천착한 미셀 푸코가 공론의 영역 위로 꺼내올린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이 바로 그것이다. 딜뢰즈와 가타리, 네그리와 하트가 생명정치/삶권력(민생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 생활정치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도 이런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모든 권위를 해체하는 놀이(자크 데리다의 《문학의 행위》에 자세히 나와 있다)에 열중하는 동안, 공적독점을 밀어낸 사적독점의 새로운 권력들이 일체의 권위가 사라진 진공상태로 변해버린 모든 공간들을 파고들 수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시장논리가 적용되서는 안 될 교육의 현장에도 기업의 광고와 제품들이 넘쳐나게 됐다. 나이키로 대표되는 이런 방식의 마케팅을 통해 초국적기업들과 거대 금융자본들은 교육과 문화, 전통과 관습까지 파고들 수 있었고, 전 지구적 시장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른바 초국적기업과 거대 자본이 지역 정부와 국제 기구, 급진적 신자유주의자들과 공모해서 진행한 부정적 세계화란 후기구조주의자와 포스트모더니스트로 이루어진 신좌파가 일체의 권위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으니, 그들의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다고 할 수 없으리라. 이들은 국가와 권력의 독점과 억압과 착취에만 집중하는 바람에 사적독점의 세력들로 등장한 세계화 특권그룹의 무한 질주를 가능하게 만들어주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지배세력들은 일제 강제합병 36년 동안 부를 축적하고 제도권 언론을 수중에 넣은 자들의 후손들이다. 부와 언론이 곧 권력이 세상에서 이들이 만들어낸 담론들이 미국의 제국적 이익과 보수적 시장근본주의(신자유주의)와 어루어지며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무슨 짓이라도 해도 되는 천민·세습자본주의로 이어졌다. 이들이 대한민국의 지배세력으로 있는 한 부정적 세계화의 온갖 폐해들이 사라지지 않을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필자가 참여정부의 각종 개혁입법들과 정책 및 미래비전이 새누리당과 족벌언론, 뉴라이트로 대표되는 식민지근대화론자와 급진적 신자유주의자 및 기독교 근본주의자에 의해 좌절된 것이 두고두고 아쉬워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참여정부가 '좌측 깜박이를 켜고 우회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이들의 집중포화 앞에서 지지율이 계속해서 하락하는 상황에 직면했고, 그런 상태에서 개혁을 이끌어나갈 국정동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혁의 결과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도, 일제 강제합병 36년의 결과가 미국의 오판(특히 미 국무부와 맥아더로 대표되는 국방부)으로 이승만의 집권으로 이어진 이래, 박정희와 전두환을 거쳐 김영삼으로 이어진 권위주의적이고 수구적인 보수 기득권세력의 집권을 저지할 수 있었던 것은 민주정부 10년(특히 참여정부 전반기)밖에 없다. 



산업화의 주역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압축성장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같은 기간 동안 유럽의 선진국들도 압축성장과 함께 민주주의와 복지국가라는 삼중의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압축성장은 대한민국만의 전유물이 아니었으며, 산업화 주역들의 자랑거리도 아니다. 이에 대한 연구들은 '신 비교사 정치경제학'을 통해 유럽의 발전모델로 알려진 자생적 발전과 제3세계의 빈곤을 초래한 종속적 발전이 2차세계대전 전까지는 동일했다는 것을 밝혀냄으로써 분명하게 입증됐다.  



따라서 민주정부 10년 동안, 특히 참여정부 5년 동안 진보적 성향의 정부들이 하자고 했지만 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민국의 미래가 달려 있고, 이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세상이 변했다 하지만 막상 권력과 자본의 본질을 들여다 보면 실제로 변한 것은 신좌파와 진보적 자유주의의 가치가 민주주의와 배치되는 것으로 호도된 것 뿐이다.   




실제로 권위적이고 수구적인 보수정권들이 남겨놓은 IMF 환란(6.25전쟁에 버금가는 혼란을 야기했다)을 극복하느라 김대중 정부는 과거청산을 할 수 없었고, 개혁의 역할이 보다 급진적인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로 넘어가자 이 땅의 보수 기득권세력들이 총궐기해서 무차별 융단폭격을 가했다. 그 압도적인 화력에 무력화된 것이,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의 본질이자 실체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저질러 놓은 수없이 많은 병폐들 중 일부를 국민적 인기가 높은 김대중을 통해 해결하도록 함으로써 국민적 차원의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정권 탈환을 위해 정면대결을 펼쳤음에도, 바보 노무현이 일으킨 거대한 바람에 패하자 그를 식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총체적인 반격에 나섰고,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족벌신문들과 대형교회가 선두에서 보수세력들을 이끌었다. 그들의 융단폭격에 노무현 대통령은 국정 동력을 상실해 탄핵까지 당했지만, 각종 수치와 통계를 놓고 보면 민주정부 10년, 즉 보수세력들이 그렇게도 국민에게 주입시키고, 세뇌하고, 다시 환기시키곤 했던 '잃어버린 10년'이 대한민국을 제도약시킨 시기였다. 





필자는 페리클래스의 글을 볼 때마다, 이석기를 통해 통진당을 해체하기 위해 현 집권세력이 문제 삼은 진보적 자유주의에 대한 터무니없는 논쟁의 본질을 떠올리게 된다. 진보적 자유주의란 용어는 유럽의 정치학 서적들을 보면 수시로 등장함에도 이것이 마치 북한의 노선인양 포장하는 종북몰이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양한 사상적 스펙트럼을 인정하지 않는 민주주의란 사이비 민주주의이자 권위주의의 부활을 뜻할 뿐이다. 



게다가 이석기도 통진당도 현 집권세력이 낙인을 찍은 진보적 자유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진보적 자유주의자는 노무현 대통령처럼 진보의 가치(사회경제적 평등에 기반한 자유)가 민주주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신념을 지닌 정치인을 말한다. 인권변호사로서, 대통령으로서 노무현이 보여준 한결같은 모습은 강남좌파와 겹쳐지기 일쑤인, 그래서 온갖 오해를 불러일으켰던 진보적 자유주의자가 보여줄 수 있는 국정 운영에 담겨 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그것 이상의 것이 하나 이상 남아 있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연재를 시작한 '늙은도령이 본 근현대사'의 후반부에서 다루겠지만, 모든 민주주의의 원형을 제공한 페리클래스의 추도문을 떠올릴 때마다 바보 노무현이 떠오르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라 믿어 의심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궁극적으로 꿈꾸었던 세상이 노동생산성이 최고조로 올라 완벽한 평등이 이루어진 '자유의 왕국'이었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음을 바보 노무현에서 볼 수 있다. 



그가 꿈꿨던 세상은 하부구조(정치와 문화 같은 상부구조를 결정하는 사회적 생산방식을 말한다. 즉, 마르크스는 경제의 형태가 정치와 문화의 형태를 결정한다는 것이다)에 집착했던 마르크스가 변증법적 유물론으로는 파악할 수 없었던(그것이 옳고 그름, 한계를 논외로 치더라도), 반칙과 특권으로 돌아가는 권위적 기득권 정치를 타파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만이 진보적 가치가 밑바탕이 되는 온전한 민주주의의 실현이 가능하며, 진보적 자유주의의 가치를 폄하하는 자들이 매일같이 얘기하는 민생도 해결될 수 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태봉 2014.08.06 20:56

    휴가지에서 댓글을 답니다
    강원도 동해는 비가 부슬 부슬 내립니다
    늙은 도령님의 글 잘 보고 갑니다
    볼 글들이 많이 밀렸네요
    조금만 쉬면서 써주세용^^~*ㅋ

    • 늙은도령 2014.08.06 22:21 신고

      네, 조금씩 쉬어가면서 쓰려고요.
      너무 많은 글을 한 번에 올리니까, 되려 독자들이 주는 것 같습니다.
      많은 정보들 드리려고 그랬는데 과했나 봅니다.
      휴가지에서도 글을 봐주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2. 희망의 끈을 잃지말자 2014.08.29 13:25

    팩트 보다는 주위 선동에 더 놀아나는 생각없는 국민들이 오늘의 사태를 만들었다고 봅니다.
    더욱 우끼는 것은 그런 자신의 행동들이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북한을 보며 비웃으면서 자신들은 세뇌당한지 모르는 일부 역사를 모르는 국민. 그래서 제대로 된 역사 교육이 필요합니다.
    연대기를 외우는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바른정치 나쁜정치로 역사가 어떻게 심판하였는지 직시할수 있는 교육이 필요한데 우리나라는 역사도 암기과목, 점수따기 위한 과목이 되고 말니 일베같은 사이코 집단이 탄생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럴수록 올바른 민주주의 대한 염원을 가지고 잘못된 정보에 세뇌된 사람들을 일깨워 주는것이 주어진 책무라 생각하며 한자 남깁니다.

    • 늙은도령 2014.08.29 16:47 신고

      보수단체 회원들의 행동은 민주주의를 제대로 경험하지도 못한 사람들의 행태입니다.
      그들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그저 선거만 자신이 할 수 있으면 민주주의로 압니다.
      일당 받고 움직이는 사람들이고, 권위주의 독재시대에도 살았던 사람이라 민주주의가 되는 것이 질서의 파괴로 봅니다.
      한 마디로 빨갱이스러운 자들입니다.
      정치부터 그밖의 것까지 전혀 공부하지도 않은 사람들이고, 늘 강자의 편에 빌붙어 사는 버러지 같은 인생들입니다.

  3. chemica 2016.05.29 09:25 신고

    잘 보고 갑니다 .


자신들과 그들의 정신을 권위와 편견의 감독에서 해방시키고자 하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름 모를 사람들의 소망이다. 그들은, 오랜 전통이든 새로운 전통이든, 자유와 인간다움과 합리적 비판의 기준에 맞는 전통은 보존하고 발전시키고 확립하려고 노력하면서도, 단지 확립된 것이거나 그저 전통적이기만 한 절대적 권위는 거부하는 열린사회를 건설하고자 한다. 그들은 팔짱을 끼고 앉아서, 통치의 책임을 인간적 권위나 초인간적인 권위에 전적으로 지워버리려고 하지는 않으며,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없애기 위해 일할 각오가 되어 있다.  



위의 인용문은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Ⅰ》의 서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위대한 과학자이자 철학자였으며, 불 같은 성격의 교수였으며, 인간에 대한 애정이 넘처나는 휴머니스트였던 그는 최근에 들어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진정한 자유주의자였다. 그의 대표작인 《열린사회와 그 적들Ⅰ》은 초기 기독교의 원형을 제공했으며, 좌우의 전체주의의 기원이 된 플라톤에 대한 비판서이다. 





19세기 중반까지 유럽의 지성사는 플라톤에 대한 해석이라고 말할 정도로 플라톤이 서구 문명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고대 그리스 철학의 최고봉을 이루지만, 그들이 미친 영향의 거대함은 19세기 중반까지 서구 유럽의 정부와 문명을 소수의 엘리트(귀족이나 선민의식의 형태로 나타난다) 수중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교육과 종교가 이들의 수중에 있었으며, 이는 2차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유지됐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모든 것의 기원, 즉 순수 그 자체이자 완전한 상태인 절대적 존재 혹은 형상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철학자가 완벽한 고독의 상태에서 깊은 성찰에 들었을 때 불연듯 보게 된 신의 모습이자 깨달음의 정화가 이데아(형상 이론이 여기서 나온다)다.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사막에 들었던 고행의 순례자가 죽음에 가까운 상태에 이르러, 몽롱한 가운데 환영이나 환청처럼 보거나 들은 것이 신이 섭리나 우주의 법칙이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그것은 일종의 체험이자 유일무이한 경험이어서 철학자는 완벽한 순수체인 이데아란 존재를 느낄 수 있거나 볼 수 있지만, 말이나 글로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데아의 경이로움을 경험한 철학자는 그것에 대해 알고 있다. 철학자는 이런 성찰에 이르지 못한 일반인들에게 이데아의 경이를 체험할 수 있게 만들지는 못하지만, 완전한 상태인 이데아의 세계를 체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이데아와 최대한 비슷한 사회(이데아의 세계, 천국에 있는 국가)로 인도할 수 있다. 이데아란 어떤 티끌도 없는 순수하고 완벽한 상태(형상)이기 때문에 이데아로부터 멀리 떨어질수록 타락하거나 부패하거나 악에 가까워진다. 





즉 이데아의 세계에서 멀어지는 '모든 사회적 변화는 타락이나 부패 또는 퇴화'라는 몰락이 법칙이 플라톤이 정립한 이데아론의 핵심이다. 플라톤이 《법률》에서 '악한 것의 변화를 제외하고는 모든 변화는 악하다'라고 한 것에서 이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이데아로부터 멀어지는 변화인, 모든 부패와 몰락이 도덕의 타락에서 나타나고, 최종적으로는 인종의 퇴화와 국가의 몰락으로 이어진다고 봤다. 



심지어 플라톤은 "변하지 않는 완전한 국가에 신념을 '모든 사물'의 영역까지 확대"해서 "일상적인 사물이나 부패하는 사물의 모든 종류에도 그에 대응하는 부패하지 않는 완전한 것이 있다"는 형상 이론이나 이데아 이론을 정립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우주적 차원에서 인간사를 거쳐 사물의 차원까지 적용되는 거대한 몰락과 부패의 법칙이 완성됐고, 그의 사상과 정치철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존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일반적인 부패의 우주적 법칙이 인간사에 나타"나는 것을 막기 위해 사회의 타락과 부패를 막고 악의 번성을 저지하기 위해 이데아의 경이로움을 체험한 철학자는 동굴에서 나와 사회(당시에는 도시국가, 즉 폴리스를 말함)를 구원해야 한다포퍼의 주장처럼, "플라톤은 역사적 운명의 법칙, 부패의 법칙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지탱되는 인간의 도덕적 의지로 붕괴될 수 있다고 믿었다."





플라톤은 《정치가》에서 "일반적인 부패의 법칙이 정치적 부패를 몰고 오는 도덕적 부패로 나타나는 것과 똑같이" 이데아를 체험한 위대한 법률가(철인왕)의 "이성의 힘과 도덕적 의지로 이 정치적 부패의 시대를 종결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변화가 없는 이데아의 세계를 이 땅에 실현하면 '악이 없는 최선의 국가이자 완전한 국가, 즉 황금시기의 국가이자 철인왕에 의해 일체의 변화가 '억제된 국가'인 천년왕국이 건설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철학자의 의무이자 책임이며, 특히 사회의 변화를 주도하는 정치를 통해 이를 이룩해야 한다. 이런 플라톤의 정치철학ㅡ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과 《정치의 약속》에서 발전적 변화를 추동해 후대에게 넘겨주는 정치의 역할과, 불평등하게 태어났지만 평등을 향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의지인 정치적 자유와, 어떤 척박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인간의 조건을 억제한 플라톤 때문에 그에게서 시작된 정치철학이 그에 의해서 끝났다고 비판했다ㅡ은 철인왕(이데아를 경험한 철학자, 현자)에 의한 통치를 최고의 체제로 자리매김시켰다. 


철인왕ㅡ플라톤은《정치가》에서 철인왕을 자신이나 자신과 비슷한 수준에 이른 철학자라고 했고, 공자도 비슷한 말을 했다ㅡ에 의한 일체의 변화로부터 멀어진 '억제된 국가'가 최선이자 최상의 국가가 된다는 것은 일체의 자유와 발전적 변화가 원천차단된 닫힌사회이며, 하나의 지도원리가 사물의 세계(길거리에 널려 있는 돌 하나)까지 지배한다는 점에서 히틀러의 나치즘, 즉 전체주의의 기원으로 작용했다(이것이 나치의 전체주의가 어디서부터 기원했는지 추적한,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의 주제이기도 하다).




이렇게 '억제된 국가'는 위계서열이 분명한 계급사회를 이룬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나누어지기 때문에 우월한 종족이 열등한 종족을 지배하는 인종적 차별도 허용된다. 물론 플라톤이 말한 계급사회는 마르크스가 말한 계급사회와는 다르다. 마르크스는 그 시대의 지배적 체제를 이루는 지배계급이 그 이하의 계급, 특히 노동계급을 무한 착취하지만, 플라톤은 지배계급의 착취에 제한을 둔다. 이는 '억제된 국가'의 안정과 이익을 위해서이다. 


"그러나 특권계급들의 착취를 제한하려는 이런 경향들조차도 전체주의에 상당히 공통되는 요소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전체주의는 단순히 도덕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닫힌사회, 즉 집단이나 부족의 도덕이며, 개인적인 이기주의가 아니라 집단적인 이기주의"라고 말한 칼 포퍼의 지적은 정확하다. 플라톤이 주장한 국가의 이익에 해가 되는 어떤 것도 선하지 않고, 도덕적이지 않으며, 정의롭지 못한 것이라는 주장도 집단적 이기주의에 불과하다.


이는 일종의 공생을 위한 공리주의(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생산에 방점이 찍힌 성장담론을 이룬다)이기도 하지만,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우리 조상의 홍익인간에 비하면 그 수준이나 방식이 저급하고 제한적이며 일방적이다. 플라톤이 주장한 선량하며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행위란 국가와 국민을 위한 이익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특권계급의 이익을 위한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국가를 통치하는 최종 지배자인 단 한 사람의 이익으로 귀결되는 전체주의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이익은 모든 이들에게 공정하게 나눌 때 가장 크지만, 국가의 이익을 앞세우면 권력을 움켜쥐고 있는, 그리고 후대에 세습하고 있는 소수의 집단에게 가장 많이 돌아가며, 최고의 권력을 지닌 자가 가장 많이 취하는 것이 인류의 보편적인 경험이다. 신자유주의 40년 동안 이런 경험은 더욱 강화돼, 인류가 다른 생명체와 함께 공존이나 상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음을 말해주고 있다. 


결국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모든 행위의 기반인 개인의 기본적이고 평등하고 인도적인 자유도 제한될 수 있다는 것이 플라톤의 주장이다. 양도불가능하기 때문에 침해불가능한 시민의 기본권이 제하받는 경우가 나타난다. 이런 과정이 중첩되고 강화되면 권위주의 독재가 등장하며, 플라톤의 주장대로 하면 '다른 시민을 해치지 않는 행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국가의 기본 목적이 성립될 수 없다. 


즉, 플라톤의 주장대로라면 "국가는 가능한 한 균등하게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되, 자유의 동등한 제한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것 이상은 넘어서"면 안 된다는 현대 민주주의의 원리가 무력화된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 시민의 자유와 권리가 과도하게 제한받게 되면, 모든 권력이 시민에서 나오는 민주주의는 작동할 수 없다. 우파 전체주의는 늘 이런 과정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독일의 나치,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일본의 군국주의, 한국의 권위주의 독재 등이 모두 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회경제적 평등에서 출발하는 민주주의를 무력화시켰다(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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