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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우리는 지금보다 잘 살 권리가 있다



텔러비전과 고속도로와 주말여행과 편안한 아파트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한 순간도 인간답게 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지금은 오직 소수만이 분명히 보지만 언젠가는 전 세계가 눈이 안 보일 정도로 눈부신 섬광 아래에서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해도 좋다. 


                                                      ㅡ 이근식의 《서독의 질서자유주의, 오위켄과 뢰프케》에서 인용




위의 인용문은 1940~50년대에 신자유주의의 원형을 제공한 빌헬름 뢰프케의 말이다. 현재 미국식 신자유주의(거대금융과 초국적기업이 국제기구와 지역국가 정부와 손을 잡고 벌이는 부와 권력의 독점 현상과 대물림이 핵심)가 세상을 점령한 상태여서, 자유주의적 보수주의(우리나라 수구들은 이를 자유민주주의라 한다)의 원형을 제공한 독일 질서자유주의자(사회적 시장경제)의 대부인 뢰프케의 말은 현대의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불평등의 대가> 예고편에서 캡처



미국의 무정부적 자유주의가 시장경제의 공정한 경쟁마저 왜곡시킨 채, 미국이란 제국의 정치·경제·군사·외교적 힘을 빌려 전 지구적 시장을 구축한 다음부터 자유주의적 보수주의(유럽에만 남아 있다)의 가치마저 종적을 감췄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 전체주의적 자유주의 국가다. 미국에서 살고 자란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지만 유럽에서 자라난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미국은 돈의 논리 외에는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는 전체주의적 성향이 매우 강하다.



아무튼 이때부터 정확히 40년만에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밀림이 형성됐고, 세계 경제와 지역 경제는 초장기 대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처와 레이건이 한 일의 핵심은 공적 가치를 면영화하는 것이었으며, 제조업 위주에서 카지노 자본주의로 갈아탄 것이다. 이는 거대 금융자본의 주축인 유대계 고리대금업자와 군산복합체에 포진하고 있던 신보수주의 백인들이 원했던 미국의 모습이다. 



무려 60년 전에 이를 내다본 뢰프케의 성찰은 놀라울 지경이지만, 푸코의 지적처럼 독일의 질서자유주의와는 달리 미국식 신자유주의는 무한경쟁을 장려하기 때문에, 정글에서 사는 것처럼 '위험을 등지고 사는 삶'을 양산한다. 무한경쟁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조장하기에 그곳에서 사는 개인들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시적인 위험에 시달리게 된다.  



또한 무한경쟁은 만인에 대한 승리를 요구하기 때문에 승자독식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상위로 올라갈수록 독점의 수준은 가파르게 높아진다. 바로 이런 경쟁과 독식의 메커니즘 때문에 부와 기회의 독점이 가능해지고, 경제가 아무리 많이 성장해도 극소수의 승자와 절대다수의 패자를 양산한다. 소위 1 대 99 사회라는 것도 이런 과정이 쌓이고 축적됨에 따라 초래된 결과라 할 수 있다. 




                                                      경향신문에서 캡처



이처럼 자유방임 시장경제가 잘 돌아가도록 국가의 공권력과 법률, 대통령령과 행정지도 등을 통해 국가의 전 분야를 재구성하는 신자유주의 통치술이 만연되면 인간은 단 한 순간도 존엄한 존재로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신자유주의가 경제담론인지 알지만 사실은 시장논리로 다루면 안 되는 분야에까지 경쟁논리를 강제함으로써 국가와 사회, 시민들을 시장경제에 종속시키는 통치담론이다.

                                                           


독일의 질서자유주의(사회적 시장경제)는 물가 안정과 최소한의 복지와 최저임금제를 통해 노동자의 인간적인 삶을 보장하지만, 미국식 신자유주의는 이것마저 허용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것이 의료와 철도, 교육 같은 공적 영역의 민영화, 비정규직과 임시직을 양산하는 노동유연화, 최저임금제의 무력화, 기업 위주의 규제 완화, 관세 철폐와 증세 반대, 유치산업(다른 나라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산업분야를 말하는데 한국의 경우 농축산업이 대표적이다)에 주어지는 보조금 금지 등이다.



신자유주의자의 주장에 따르면, 이 모든 것들이 개인과 기업의 생산성을 최대로 높이기 때문에 생산자와 소비자를 최적의 가격으로 연결시켜주는 시장의 기능에 따라 시장참여자 모두에게 최대의 이익을 보장해준다고 한다. 실제 현실에서는 시장이 최적의 가격을 만들어내지도 못한다는 것이 증명됐음에도,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실패가 완전경쟁을 방해하는 정치사회적 요인(규제가 대표적이다)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테면 신의 섭리 같은 보이지 않는 손 때문에 국가의 실패는 있을지언정 시장 실패는 없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은 원래 없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며, 완전 시장이란 것도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허구의 유토피아임에도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유방임적 무한경쟁만 보장하면 언제난 최대의 이익을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음이미지 캡처



지금의 2030세대들이 경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경쟁만이 개인과 기업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여 국민경제가 풍요로워진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인류의 발전이 최고조에 이른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70년대 말까지다. 1979년과 1980년에 영국에서 대처가 집권하고, 미국에서 레이건이 집권하면서 사회경제적 평등이 확보한 상태에서 경쟁하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라는 사실이 강제로 폐기됐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신자유주의(무정부적 자유주의)가 들어서며 경쟁이 근대의 자연법처럼 당연시되는 세상이 도래했다. 지난 40년의 세상이 이러했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태어나서 자란 2030세대는 민주주의 기초가 사회경제적 평등에 기초한 정치적 자유와 공존의 박애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별도의 글로 다루겠지만 《불의란 무엇인가》, 《슈퍼브랜드의 진실》을 참조하라) 



1930~40년대의 나치의 독일, 군국주의의 일본, 사회주의의 소련이라는 좌우의 전체주의적 파시즘의 반작용 때문에 자유주의와 자유시장과 자본주의의 부활이 가능했고, 대처와 레이건의 집권을 기점으로 해서 인류의 부흥과 민주주의 확산을 견인했던 사회경제적 평등의 가치가 폐기됐다. 오직 자유방임의 가치만이 중시됐고 식민지 통치에서 해방된 아시아와 남미, 아프리카에서는 권위주의적 독재가 만연했다.  



                                                     정경유착의 폐해



전체주의적 파시즘과 권위주의적 독재의 시대에는 정치와 경제의 유착에 따른 공적 독점이 문제였지만, 자유방임 시장경제가 득세하게 되면서 이번에는 사적 독점이 문제로 등장했다. 자유방임은 완전 시장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자본의 축적과 규모의 확대, 자유무역의 활성화로 인해 전 지구적 차원의 사적 독점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자유방임 시장경제는 무정부적 자유주의를 추구하기 때문에 사적 독점을 막을 방법이 없다.       



신자유주의 40년 만에 1 대 99 사회의 등장이 현실화된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신자유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않은 한 풍요로운 삶과 극도의 불평등을 완화시킬 수 없다. 공존과 상생이 무한경쟁보다 효율성과 생산성이 높다는 연구결과들이 최근에 들어 전 세계적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줄어들지 않는 것도 신자유주의저 사고가 대세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중요한 성찰이 자리하고 있다. 독일의 질서자유주의가 원형인 신자유주의는 국가가 자유방임 시장경제의 활성화와 최대화를 위해 적극적인 개입을 했다는 사실이다. 즉, 좁히기 힘든 작금의 불평등이 자연스러운 경쟁이 결과가 아니라 통치권력의 인위적인 개입(적극적 자유주의라고도 한다)의 결과라는 것이다. 실제로 자연의 질서가 작용하는 어떤 생태계에도 승자독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보다 더 잘 살 수 있는 권리가 있다. 통치자의 권력이 피통치자의 동의(주권재민)에 근거할 때만 정치적 정당성을 가지는 것이 민주주의라면, 사적 독점을 초래한 국가권력이 부와 기회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은 이 시대의 과제이자 정신이다. 하물며 자유방임 경제학에서조차 부는 소수에게 독점되어 있을 때보다 만인에게 편재해 있을 때 더욱 효율적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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