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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민주주의의 최전선, 청춘의 시민주권 행동주의


전체주의의 정반대에 서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는 크게 세 가지 쟁점으로 구분되곤 합니다. 민주주의를 사회가 추구해야 할 원리나 목표라는 보편적 이상으로 접근할 경우 '무엇을 위한 민주주의냐'가 핵심 쟁점이 됩니다. 민주주의를 제도나 절차로 이해할 경우 '민주화 과정과 민주주의 달성의 방법'이 핵심 쟁점이 됩니다. 민주주의를 주체의 입장에서 접근하면, '누구에 의한 민주주의와 누구를 위한 민주주의의 실현이냐'가 핵심 쟁점이 됩니다(박호성 외 《한국 민주주의 어디까지 왔나》와 로버트 달의 《민주주의》을 참조). 





이 세 가지는 민주주의의 발전단계와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역사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의 민주국가에서 일정 부분 혼합된 채 일어나며 최근에 들어서는 시민주권 행동주의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문자폭탄과 18원 후원금은 물론, 최순실 청문회의 최고수훈자인 주겔, 일본과 한국 정부에 맞서 부산동구청의 소녀상 설치를 관철시킨 등 불의한 권력에 저항한 시민주권 행동주의는 '민주주의를 주체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이면서도 '일상에서의 정치행동주의의 실천'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 반민운동의 대부로 오바마에게 큰 영향을 준 시민사회 조직론과 행동론의 대가였던 사울 D. 알린스키의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을 거쳐, 러셀 J. 달톤의 《시민정치론: 선진 산업민주주의 국가의 여론과 정당》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졌고, 한국에서는 조기숙과 안병진, 안수찬, 김만복, 주성수, 정상호 등이 연구하고 있는 디지털시대의 민주주의입니다. 



이들이 주목하는 것은 인터넷, 팟캐스트, 쇼설 네트워크, 자아 실현, 자기 노출, 유연한 가치, 자유주의적 감수성(개인주의), 정책결정의 신속성, 온오프를 연동한 플랫폼정당, 정당정치의 모든 단계에서 시민과 지지자의 참여, 일상에서의 민주주의, 플래시몹과 다양한 방식의 집회 같은 축제로서의 혁명(재미 이데올로기), 성공지상주의에 매몰되지 않은 탈물질주의,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동물의 권리를 중시하는 생태민주주의, 사회적 평등, 성적 평등, 소수자의 인권 보장, 핵에너지 반대 등을 표방하는 디지털 청춘과 미래세대들의 적극적 정치참여와 시민주권의 실현입니다. 



이들은 소수 엘리트 위주로 편성되는 공산당이나 사회주의 정당의 전위 같은 엘리트 위주의 정치에 부정적입니다. 이는 이대생의 투쟁과 소녀상 지키기 등에서 명확하게 드러났습니다. 이들은 정당이나 시민단체에 의해 동원되지 않고 자발적으로 참여합니다. 이슈와 인물에 따라 반응하는 경향이 강한 이들은 거창한 혁명을 말하지는 않지만, 반칙과 특권, 불평등과 차별에 항거해 정의와 상식, 보편타당함을 실현하려 하며, 그렇게 일상에서의 시민주권 행사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지키며 즐거운 투쟁을 이어갑니다. 세월호유족과 함께 하고, 촛불집회에 나오는 시민들의 대부분이 자발적 참여자인 것도 시민주권 행동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시민주권 행동주의를 주장하는 전문가들에 비해, 당비를 내는 진성당원이나 권리당원을 중시하는 조직으로서의 정당정치와 계급적 대립에 의한 대중정당을 선호하는 브루스 에커만, 최장집, 박찬표, 로버트 달, 아담 쉐보르스키 등이 반대편에 서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나 아렌트가 《공화국의 위기》에서 일원론적 민주주의의 한계와 타락을 성찰하고 고발한 이후에 논의를 이어간 달과 쉐보르스키, 최장집 등은 이념과 계급적 이해(물질주의)를 중시하고 시민적 항쟁의 요구를 제도권 정당에서 흡수하는 조직으로서의 정당을 중시합니다. 



이를 이원론적 민주주의(혁명의 시기와 평시를 구부하는 민주주의로, 혁며의 시기에는 거리에서 분출된 시민의 요구를 제도화하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으며, 평시에는 계급적 이해를 대표하는 정당이 정치를 주도한다. 혁명의 요구가 제도화되면 시민은 제자리로 돌아가 정치적 전망자 또는 수동적 지지자로 자리매김한다. TV가 발달했을 때의 청중민주의가 대표적이다)라 하는데, 효율적인 정당 운영을 위해 관료조직이 필수인 대의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의 혼합형이라고 보면 적당할 것입니다. 이들이 원하는 모범적인 시민은 "적극적인 시민이 아니라 잠재적으로 적극적인 시민"이었습니다. 더 간략하게 말하면 엘리트 위주의 고전적 의미의 정당정치와 마키아벨리적 민주주의의 혼합형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들이 있기에 시민주권 정치행동론이 새로운 주제로 등장할 수 있었고, 합의적 의사결정과 다수결원리를 중시하는 심의민주주의를 넘어 일상에서의 정치혁명을 창출하고, 즉각적으로 시민 이익과 공적 이익을 실현하는 시민주권 행동주의로 나아가는 디지털 시민정치의 서막을 열 수 있었습니다. 이대생의 투쟁과 시민과 함께 하는 세월호유족의 저항, 정부에 맞서 의사결정의 참여와 주도권을 관철 중인 성주군민과 김포시민 투쟁, 소녀상 지킴이와 국정교과서 반대모임 등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모든 것들이 촛불혁명의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시민주권 행동주의는 세계적으로 보면 1999년 시애틀에서 있었던 반세계화 집회(일방적이고 나쁜 세계화에 대한 반대)와 2012년의 '월가를 점령하라', 오바마의 선전략이었던 '풀뿌리 민주주의'의 활성화가 대표적이며, 우리의 경우 노무현 탄핵반대 촛불집회가 시초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학자에 따라 다르지만, 필자의 경우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를 시민주권 행동주의의 과도기로 분류합니다. 촛불소녀의 제안에서 시작된 광우병 촛불집회는 정당이 철저하게 배제됐고 시민단체의 주도 하에 대부분의 의제가 설정됐기 때문에 과도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연인원 1000만을 훌쩍 넘긴 현재의 촛불집회는, 시민이 명령하고 정당이 입법화하는 방식으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성숙기의 초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민정치론을 연구하는 전 세계 정치학자들이 촛불혁명을 주시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촛불혁명의 하루하루가 세계사적 의미를 지니는 것도 이 때문이고요. 민주정부 10년 동안에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위대한 후발국으로 칭송받던 대한민국이 이명박근혜 9년 동안 세계적 조롱거리로 전락했는데, 지난 11월부터 시작된 촛불혁명이 이 모든 것을 바라잡는 것을 넘어 뛰어넘고 있습니다.  



단, 이 모든 논의는 '사회적 권리(사회성)의 구현'을 기본으로 그 위에 좌우를 구별하는 유럽적 의미에서 보면 진보적 자유주의와 중도우파적 사이에서의 논의에 해당합니다. 공산주의의 부활이나 반세계화 및 무정부적 자유주의까지 주장하는 바디우와 아감벤 등의 《민주주의는 죽었는가?》와 민주주의에 대한 상반된 이해와 극단적 대립을 다룬 자크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등을 보면 이런 구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럽의 진보좌파는 우리로 치면 급진적 진보주의나 교조적 구좌파에 해당하기 때문에 시민주권 행동주의를 주시하고 있지만, 비폭력적 방식과 느린 행보에는 회의를 보내고 있습니다. 





필자가 진보적 자유주의를 표방하고 실천했던 노통과 지금도 실천하고 있는 문재인 전 대표와 유시민, 김경수 등을 지지하는 이유가 이런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이념적 스펙트럼 하에서입니다. 노통을 비판하는 자들의 수준이 형편없는 것도 이 때문이며, 그들에게서는 이원론적 민주주의를 뛰어넘는 촛불혁명의 시민주권 행동주의와 재미 이데올로기, 의사결정의 속도, 정치과정의 모든 곳에 시민이 개입하는 디지털 네트워크적 원내정당의 출현, 당원과 지지자가 정책결정의 모든 단계에 지속적으로 개입하는 시민개입주의의 출현을 받아들이기 힘든 것입니다. 



이런 소셜 정당화는 진보정당의 명판으로는 권력을 잡을 수 없음을 깨달은 구좌파 출신들(이를 테면 민주노총과 통진당, 손가혁 등의 대거 유입)이 당원으로 가입하는 역풍을 자초할 수도 있습니다. 당원의 수가 수백만 명에 이르면 모를까, 200만을 조금 넘는 수준이라면 이들에게 당권을 내줄 수 있습니다. 당원들 중에서 실제 투표에 참여하는 비율이 50% 전후에 머물고 일반시민의 경우에는 10%를 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10만 명 정도만 가입하면 지역 하나는 통째로 삼킬 수 있습니다.  



누구를 지지함에 있어 절대적 기준을 들이대고 교조적 폭력을 일삼는 이들은 시민주권 행동주의자들의 문자폭탄과 18원 후원금을 '친문패권주의(죽어도 문재인의 능력이라고는 하지 않는다!)'라고 규정한 채 비판의 칼날을 휘두릅니다. 문자폭탄과 18원 후원금이 문재인 전 대표에게 도움이 될지, 더민주의 정권교체에 도움이 될지 이런 것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시민주권 행동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표현을 통해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이들의 행태가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비난을 받았지만 더민주 후보들 사이에서의 날선 비난과 자기파괴적 공격이 줄어들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신분상승과 중산층의 꿈'이라는 정형화된 공식이 무너져내린 시점에서 태어난 이땅의 청춘들은, 안철수와 법륜스님 같은 멘토를 찾아가던 과도기를 거쳐 스스로 해답을 찾아내고 길을 만들어가는 창조적 행동주의자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이들은 99%의 압도적인 절망에 굴하지 않고, 1%의 빌어먹을 희망에서도 비전과 행복을 찾아내는 순례자이자 실천가이고 개척자입니다. 진보적 가치(사회적 시장경제)와 자유주의적 감수성(개인주의, 공정으로써의 정의)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최초의 세대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무한대의 정보와 상호인정의 교류,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는 수평적 연대를 만들어내는 디지털공간을 활용함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기성새대가 만들어놓은 세상을 분해해 다시 조립할 수 없기 때문에. 기성세대는 꿈도 꾸지 못했던 문자폭탄과 18원 후원금, 소녀상 지킴이, 촛불혁명(최초의 촛불집회를 소녀들이 제안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이런 시대적 변화에서 나온 정치행동주의이며, 경제적으로는 사회적 민주주의(사회적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버니 샌더스류의 한국판 경제혁명에 가깝다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모두 다 노무현 지지자는 아니지만, 이런 방식으로 그의 진보적 자유주의는 발전하고 있습니다. 광화문광장을 지켜준 박원순 시장이 문재인 전 대표가 노무현의 참여정부를 재현하려 한다고 비판하지만, 필자 같은 친노와 문재인 지지자들은 노무현의 '좌절과 성공'을 초석으로 꾸준히 연구하고 발전해왔음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문재인 전 대표가 기득권을 구축해 참여정부를 재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발전적으로 재구성하려는 것입니다. 친노(모든 친노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는 그렇게 발전하고 변화하고 있습니다. 두 번의 좌절을 경험할 것이라면 참여정부 5년을 끊임없이 되돌아보며 현재와의 대화를 통해 미래를 만들어가려는 노력을 할 이유가 없겠지요. 



개헌을 소리 높게 외치는 전문가와 정치인, 기성세대들에게 '현대의 시민들은 지배적 엘리트에 도전하고, 이슈 및 정책범주들에 적극적으로 투표하고 자신이 뽑은 그들의 대표들에게 더욱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위기 상태에 있다는 일반적 속설과는 달리 그것은 제도적 위기지 시민들이 지닌 민주주의 정신의 위기는 아니다'라는 러셀 달톤의 말을 전합니다. 절망의 땅에서 희망을 만들어가는 청춘들의 시민주권 행동주의는 제도적 위기는 있을지언정 그들의 민주주의 정신은 용광로처럼 들끓고 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노무현 죽이기'에 이어 '문재인 죽이기'가 본격화된 현 시점에서 시민행동주의자들의 행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서둘러 쓴 글이고, 통계학적 의미를 지닐 만큼 많은 청춘들과 미래세대를 만나지 못한 관계로 글의 내용이 조금 어렵고 난해하다면 저의 부족함이고 자세히 풀어내지 못한 게으름이라 탓해 주십시오. 솔직히 민주화 세대로써 이땅의 청춘들과 미래세대를 쫓아가기에도 너무 벅차거든요, 배가 너무 나온 것에 비해 다리의 힘이 빠르게 줄어들어서. 게다가 다리도 짧답니다^^. 



#새누리가박근혜다 

#박근혜하야하라 

#바른정당도박근혜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