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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도령이 본 근현대사

늙은도령이 본 근현대사 비판ㅡ들어가는 글2



공식적으로 알려진 전 세계의 빚이 120조 달러(13경원, BIS가 발표한 것을 기준으로 했음)에 이른다고 한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숨겨진 재산(거의 다 비상장 개인기업의 형태)이 알려진 것에 비해 무려 수십 배(5경)에 이른다는 주장에서 보듯, 비공식적인 것까지 합치면 전 세계 빚은 300~400조 달러를 훌쩍 넘을 수 있다. 무엇이 진실이건 간에 분명한 것은 전 세계적으로 매년 수천조 원에 이르는 이자가 발생하며, 그것의 상당 부분이 로스차일드 가문처럼 최상위 0.1%의 수중으로 넘어간다는 사실이다. 



전 세계의 노동자들은 자신이나 소속 기업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고리대금업자의 배를 불리기 위해 죽어라고 일하는 꼴이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모든 제품과 서비스의 원가에 이자가 포함되니, 경제가 활성화될수록, 즉 소비의 규모가 늘어날수록 0.1% 고리대금업자들의 금고는 공간을 끝없이 넓혀야 한다. 신용은 파생상품 등의 방법으로 얼마든지 뻥튀기가 가능하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유통되는 유동성은 신용이 창출해낸 천문학적인 빚이 대부분이다. 인류의 경제에는 엄청난 정도의 거품이 끼어있는 것이다.   



전형적인 불로소득인 이런 천문학적인 돈은 비상장 회사나 조세도피처, 계열사간 일감몰아주기나 차명계좌과 무기명채권, 장부외 거래 등의 형태로 진행된 각종 변칙적이고 불법적인 증여, 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로비를 통해 감세정책이나 각종 세금감면조치나 면세조항을 만들어 그들의 자손에게 세습되고 있다. 그렇게 전 지구적 특권그룹은 금융 분야를 축으로 영속적인 권력을 이어갈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하지만 이런 행태는 그 잘난 공리주의 경제 원리(최대 다수에게 최대의 행복을)에도 어긋나고, 공존의 핵심인 조세정의와 무엇보다도 사회경제적 평등에서 출발하는 민주주의에 반한다. 이 정도의 돈이면 하루 2달러  이하로 연명하고 있는 30억 명의 극빈층을 사회적인 결핍과 빈곤, 착취와 박해의 악순환에서 구할 수 있다. 이것만이 아니다. 최소 수천만에서 최대 수억 명에 이르는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는 지구온난화의 속도를 늦출 수 있고, 전 지구적 현상인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 및 석유전쟁을 대체할 것으로 보이는 물 부족 사태를 최소화할 수 있다.



작금의 현실을 기준으로 할 때, 산업혁명 이후 인류는 고도의 성장을 이룩한 것이 아니라, 무차별적인 개발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부정적 세계화)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미래세대의 것이기도 한 천연 자원을 고갈시키고, 모든 생명의 보고인 환경과 생태계를 파괴하고, 개발할수록 가난해지는 '거대한 역설'을 초래한 채 천문학적인 빚만 늘렸을 뿐이다. 우리가 TV나 영화, 사진과 현실에서 보는 거대하고 화려한 현대적 건물과 건축물은 거의 다 빚더미 위에 세워진 사상누각일 수도 있다.  



철저히 고리대금업의 신용 창출 논리를 대변하는 '빚도 자산'이라는 악마의 금융공학과 1960년대까지는 소수파에 불과했던 신고전파 경제학(신고전파 경제학)의 잘못된 처방 때문에, 인류는 미래세대도 함께 누려야 할 개발과 성장의 결과들을 상위 0.1%에게 이자로 지불하고 있는 셈이다(개발과 성장의 부작용들은 나머지에게 분배되며, 하층의 하부에 속할수록 치명적인 타격에 무방비로 놓인다. 이것은 일종의 사회적 살인행위이다). 이런 구조적 부정의 때문에 인류는 더 이상 성장의 과실을 누릴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며, 최악의 시나리오도 각오해야 할 만큼 초위험사회로 접어들었다. 오죽했으면 현존하는 최고의 경제학자 중 한 명인 조지프 스티글리츠가 《불평등의 대가》에서 작금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다고 경고했겠는가? 



시장 시스템이 갈수록 서민들의 생활수준을 하락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서민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는 참된 민주주의가 보장된다면 지금처럼 개방화, 세계화된 형태의 시장 시스템은 유지될 수 없다. 결국은 정치 시스템이 무너지든가, 경제 시스템이 무너지든가, 둘 중 하나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



특히 정치 시스템의 마비는 늘어나는 불평등을 완화하거나 보완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마저 빼앗아갔다. 이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불평등의 심화에 따른 각종 사회적 병폐와 부작용들이 속출했고, 작금에 이르러서는 지속가능한 성장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됐다. 장기간에 걸친 각종 통계를 살펴보면, 보다 불평등한 국가일수록 가계소득 대비 부채율이 높아졌고, 행복지수가 떨어졌고, 교육과 취업의 기회가 불평등하게 배분됨에 따라 각종 차별이 늘어났고, 신분 이동이나 상승의 비율의 줄어들었다. 



10대 범죄율과 출산율이 높아졌고, 실패의 책임이 개인에게 전가됨에 따라 패자부활전이 거의 불가능해졌고, 가족의 해체가 중하위층에 집중됐고, 빈곤한 1인가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며, 평균기대수명이 늘어난 만큼 각종 질병과 만성질환이 늘어났고, 사회적 스트레스의 증가에 따라 정신질환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집이 차압돼 홈리스들이 양산됐다(리처드 윌킨슨과 케이트 피켓의 《평등이 답이다》를 보라).





거의 모든 국가에서 사적 이익과 기득권에 유리한 자유민주주의를 중시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이 집권했을 때 사회경제적 평등이 악화됐고, 정치적 자유가 줄어들었다. 통상적인 상식과는 다르게 중장기적으로 성장이 둔해졌고, 이익이 상위 1%에 집중됐고, 교육이 차별을 구조화했다. 그 결과 하위 90%의 삶은 악화됐고, 갈수록 패자부활전의 기회가 줄어들었다. 이에 대한 연구들은 너무나 많이 이루어져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지만 개선의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독일의 파시즘과 일본의 군국주의 같은 극우, 레닌과 스탈린 같은 극좌, 대처와 레이건처럼 무한경쟁과 승자독식, 작은 정부와 공기업의 민영화, 금융 위주의 경제체제가 성장의 원천임을 확신하는 정치인과 정당이 정권을 잡은 국가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국가에서 동일한 결과가 나왔다. 또한 각종 국제기구와 국가들의 통계수치를 분석한 결과, 1968년 이후의 노동생산성은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는 반대로 꾸준히 하락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주요 석유수출 국가들의 모임인 OPEC가 주도한 석유가격 인상(오일쇼크)을 미국과 영국 등의 선진국이 제압해 ‘자원의 저주’를 고착화한 1973년(또는 1975년) 이후로는 1인당 GNP가 떨어졌다는 연구들도 나오고 있다(대니얼 롤링의《불의란 무엇인가》를 보라). 미국의 사회학자인 리처드 로티는 1973년을 기점으로 세계 최고의 부국인 미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바우만의 《유동하는 공포》에서 재인용). 



1973년 이후, 육체노동을 하는 미국인 부부는 집을 소유할 수 있어야 하며, 만약 부인이 원한다면 전업주부로서 아이를 키우는 일에 전념해도 생계가 유지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비현실적이라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이제 문제는 정규직 맞벌이 부부가 연간 3만 달러 이상의 소득을 올릴 수가 있느냐로 바뀌었다. 부부가 현재의 평균 임금으로 비관리직 노동(시간당 7.5달러)을 연간 2천 시간 한다면, 그 정도의 소득을 올릴 수 있다. 그러나 연간 3만 달러는 자기 집은 갖거나 여유 있는 삶을 누리기에는 부족하다. 대중교통이나 국민 건강보험에 대한 인식이 없는 나라에서, 이런 소득은 4인 가정에서 그저 겨우 연명할 정도의 삶만을 허용할 뿐이다. 그런 소득으로 살아가야 하는 가족은 또한 임금 삭감이나 구조조정의 공포에 끊임없이 시달리며, 잠깐만 병을 앓아도 심각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불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롤링에 따르면, 1973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인류가 집단 퇴행하는 문제의 한 해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경제적 평등을 중시하는 정권들에 의해 경제 성장의 과실이 골고루 나눠지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미국과 영국의 부자들과 보수 세력들이 우익 성향의 연구소들(아담 스미스 재단이나 헤리티지 재단이 대표적)에 대규모 자금을 후원한 해 민주당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연구들을 무더기로 쏟아냈고, 방송을 통해 사회주의를 연상시키는 정치적 상징조작에 들어간 해가 1973년이다. 



이미 억만장자에 올라 있던 부자들의 반격은 1975년에 정점을 찍었는데, 이들은 단기 이익을 신앙처럼 떠받드는 주류 경제학자들이자 최초의 직업적 경제학자들ㅡ리처드 피트 공저의 《불경한 삼위일체》에 따르면, 이들은 60년대 내내 미국과 영국의 부자들과 월가의 지원 하에, 뉴딜정책을 추진해 대공황을 극복하고, 미국의 전성시대를 열었으며, 사회경제적 평등의 수준을 높였던 민주당 정부의 재무부를 점령했고, 70년대에 이르러서는 월가와 런던금융가,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와 함께 탐욕의 커넥션을 완성시켰다ㅡ을 앞세워 사회주의 정책을 중시하는 민주당 정권 때문에 경제성장률이 떨어졌고, 노조의 권한은 지나칠 정도로 강해졌으며, 노동생산성은 중진국 수준으로도 떨어졌다고 주장했다.  



경쟁이 제한돼 성장이 둔화되고, 성장을 견인하는 엘리트들의 능력이 제한받으며, 퇴직 후에도 제공되는 각종 복지비용 때문에 국가 재정이 파탄지경에 이르렀으며, 수출이 줄어들어 경상수지 적자가 위험 수준에 이르렀다고 주장하며 전통의 보수 성향 유권자들과 특정 세력들을 선동했다. 이는 건국의 아버지들이 세운 미국적 가치에 반하며, 그 결과 개인의 자유와 이익이 현저하게 위협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방송과 라디오를 이용한 세속화된 교회들도 이에 동참했으며, 우파들의 방송 점령도 차근차근 진행됐다. 





그 중심에 시카고학파의 본산인 시카고 대학과 자유주의 경제학의 산실인 하버드 대학을 중심으로 한 아이비리그대학, 영국의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 프라이부르크 학파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정치경제학자들과, 서유럽의 특권층을 이루고 있는 세습적인 엘리트들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억만장자들에 합류하거나 그들의 두뇌를 자처한 이들은 ‘무한경쟁과 불평등이 성장 동력이며 신의 뜻이자 자연의 섭리’라는 연구와 이론들을 발표하도록 만들었다. 



억만장자들이 대주주로 있고 대기업의 광고로 움직이는 대중매체와 미국의 주류를 미화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할리우드가 이를 확대재생산하는데 동원됐다. 미국과 영국 등의 선진국과 주류 경제학자(95~100% 남성들이다)가 지배하고 있던 세계은행(IBRD)과 국제무역기구(WTO)와 국제통화기금(IMF)은 물론, 부국들의 모임인 경제협력기구(OECD)와 그 핵심국가인 G7(G8을 거쳐 최근에는 G20으로 확대됐다)과 UN의 경제 관련 기구와 각종 경제연구소 등을 통해 대규모 개발과 성장의 담론을 퍼부었다.



그 결과 1980년을 전후로 해서 신자유주의적 개혁과 배타적 애국심을 내세운 신보수주의자들과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의 지원을 받은 대처와 레이건, 슈미트가 영국과 미국, 독일에서 정권을 잡는데 성공했다. 이때부터 세계화라는 명목 하에 노조가 파괴되고 국가 업무가 민영화됐고, 새로운 차별주의 정책과 조치들이 난무했고, 지속적으로 개선되던 불평등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벌어지기 시작했다. 서민들 사이에서도 불평등을 지지하는 인식이 늘어났고, 교육과 문화는 또다시 엘리트주의를 지향했다. 



그에 따라 인종적이면서도 사회적인 차별과 배제와 소외가 늘어났고, 이런 경향은 2007년까지 계속돼 폭발 직전에 이를 정도로 한껏 부풀었다. 제품을 소형화하고 상품을 다양화해 성장을 견인하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정보통신기술의 발전과 승승효과를 일으켜 극도의 불평등과 파국적 위험을 중첩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국가와 사회에 대한 초국적기업과 거대 금융자본의 승리가 갈수록 분명해졌고, TV와 인터넷, 야외광고를 통해 인간이 다니는 모든 곳을 장악한 산업광고가 소비자의 두뇌에 세계적인 브랜드와 로고를 깊숙이 각인시킬 수 있었다. 





최근의 1020세대들이 광고의 범람과 마케팅의 홍수와 침투에 저항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광고와 마케팅의 홍수에서 한시도 벗어난 적이 없다. 그들은 2030세대에 이르면 거의 백만 번 정도 광고에 노출된다. 그들은 어머니의 자궁에 있을 때부터 광고와 마케팅에 익숙해져 있었을 것이고, 죽을 때에도 광고의 홍수 속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만족을 모르는 소비중독과 끝없은 신제품 구입은 그냥 생긴 것이 아니다(특히 나오미 클라인의 《No Logo》를 보라).



이로써 산업사회가 그토록 염원했던 물질만능주의와 소비지상주의 시대가 도래했다. 정착생활을 하면서 줄어들었던 인류의 평균수명과 신체적 조건이 강인하고 육체를 필요로 했던 유목시대의 조상들에 근접했지만, 그때와는 달리 온갖 만성질환과 차별에 시달리는 절대다수의 개인들이 탄생했다(이는 비교인류학자와 지리학자들의 업적이다). 결국 99%의 인류는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 부어 단 두 명의 인간을 달에 착륙시킨 1960년대 후반부터 퇴행을 거듭했을 뿐이다. 



198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는 그 속도가 급격하게 빨라졌으며, 1997년과 2001년을 거쳐 2008년에는 금융 대붕괴로 자유시자 자본주의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정도로 망가졌다. 최근에는 실물경제가 위축과, 전 지구적 차원의 개발과 성장의 후유증 때문에 각종 종말적 현상들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나고 있다. 지구온난화로 대표되는 이런 종말적 현상은 전 세계 차원의 대처가 있어야 해결이 가능하거나 피해를 줄일 수 있는데, 대륙 밒 국가 간의 불평등과 각국 내부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실현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전 세계 차원에서, 그것도 거의 동시에 민주적 방식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래서 2008년의 신용 대붕괴 이후에도미소금융이나 저소득 경제 집단을 시장 체제로 끌어들임(빈곤의 거버넌스라고 한다, 필립 맥마이클의 《거대한 역설》을 참조하라)으로써 새로운 동력을 얻어 다시 부활하고 있는 부정적 세계화를 저지하지 못하는 한 인류는 파국적 종말을 피할 수 없다. 최소한 지구적 단위에서는 대륙과 지역별로, 한 국가 내에서는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중심으로 비대칭적 종말을 피할 수 없다. 지구온난화와 물부족 사태, 토지의 사막화와 재생불가능한 오염, 열대우림의 대규모 파괴 등은 임계점에 거의 근접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