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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제2장, 전설의 장ㅡ또 다른 시작


이 모든 일은, 무려 천년 동안 얽히고 섞여서 부대끼며 싸울 수밖에 없었던 아픔과 회한의 여정(旅程)에서, 덧없이 사라진 수많은 죽음을 양산했고 그에 따른 복수의 대물림을 끝없이 만들어냈다. 삶과 죽음, 명성과 배신, 욕망과 탐욕, 정의와 협력 사이에서 이 모든 일은 하나의 전설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검강천을 만나 비무를 청한 것에서 시작하여, 그의 아들인 무영이 무대 위로 올라 임시주연이 아닌 진정한 주연임을 선언하는 순간 끝이 났다. 운명이 틀어버린 무림과 그에 얽힌 수많은 단상들의 허튼 꿈과 욕망과 처절한 몸부림의 물길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던 그 기나긴 여정은 하나의 전설에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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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전설이 있다. 그 전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 이후로도 존재하지 않았으니 그 전설을 고금제일이라 불렸으며, 그 전설의 주인이 홀로 나타나 건곤일척의 천하를 구했으되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당연히 전설이 되어버린 것.

 

 

무림의 역사에는 존재했으나 군림하지 않는 한 가지 전설이 있다. 하늘 위에 위치한 하늘, 절대 문파 천상천(天上天)과 그 천상천을 전설의 영역에 들게 한 오직 하나의 절대무공. 천상지무(天上之武)! 홀로 일어나 천하지혈난(天下之血亂)을 종식시킨 단 한 명의 영웅에게만 몸을 허락한 절대신공.

 

 

무인이라면 누구나 이르고자 하는 무공의 최후 경지. 무림 역사상 단 한 사람만이 이르렀다고 전해 내려오는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경지. 말로 들었으나 전해지지 않아 볼 수 없었고, 못 봤기에 상상하였으나 누구도 그려낼 수 없었던 전능의 위력은 오직 무림 역사 상 단 하나의 사건으로만 전해졌다.

 

 

천 년 전 무림 태동기, 정파의 무공이 뿌리내리기도 전에 마의 화신인 음양합일역천지마(陰陽合一逆天之魔) 화극연이 역천마곡(逆天麻谷)을 세워 지옥혈왕의 열두 가지 힘, 십이마혼(十二魔魂)을 깨우고, 하나같이 절정 마인으로 키워낸 400명의 살귀를 이끌고 나타나 세외무림에서 중원에 이르기까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무차별로 살육해 가던 시절에 전설은 시작됐다.

 

 

그 천하 존망의 위기에 한 명의 영웅이 홀연히 나타나 절대마인과 그 혈겁의 추종자들을 홀로 처단해 갔다. 첫 발검으로 시작한 무림 구원사는 꼬박 1년이 흘러 태산의 정상에서 절대 마인 화극연을 전설의 검, 승천제마검(昇天制魔劍)으로 양단하니, 시산혈해를 이룬 혈겁은 그것으로 진저리 치는 피의 향연을 멈추게 됐다. 홀로 무림을 다니며 절대마인을 제거해 세상을 구하니(獨行武林 殺魔求世)비로소 검을 놓고 단 한 마디의 칭송도 받지 않은 채, 영웅은 자신이 나타났을 때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무인과 일반인 가릴 것 없이 세상은 그를 칭송하여 무림혈록에 기록하기를 '정사무한대첩(正邪無限大捷)'이라 했으니 그것이 1년간의 혈겁의 역사며 홀로 진행한 무림 구원의 대장정이었다. 그가 절대마인과 그 추종자들을 한 자루의 검으로 베어가던 그 1년간의 여정을 천검지로(天劍之路)라 명명했고, 영웅의 업적을 기려 그를 천상무존(天上武尊)이라 칭송했으며, 그의 무공을 하늘의 무공이라 하여 천상지무(天上之武)라 함에 천 년 무림 혈사의 첫 장은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이렇게 그날의 일은 전설의 첫 장에서 인구에 회자되어 전설의 영역으로 들어섰고 그가 걸었던 독행무림(獨行武林)의 영광을 모든 무인들이 추구하여 하루도 검을 놓지 않으니 무림은 그것으로부터 흥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무림은 세상의 중심에 뿌리를 내렸으며 역사를 이루고 또 다른 영웅을 탄생시키며 전설의 장을 넓혀 갔으니 무림 역사가 이로써 비롯됐다 해도 과함이 아니었다.

 

 

                                                                행복한 산쟁이에서 인용  

              

 

그리고 한 가지 말, 모든 영광과 흠모를 뒤로 한 채 다시 은둔으로 돌아가면 천상천주가 했던 말이 인구(人口)에 회자되니 그것이 천 년에 걸쳐 더해지고 부풀려져 하나의 전설에 이른다. 말이란 기억을 통해 상상을 자극하기에, 경험 이전의 신비감을 갖기 마련이며, 그래서 몇 마디 말에 불과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끝없이 회자되기에 모든 세대를 걸쳐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불멸의 존재로 우상화된다. 거기에 함정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당시의 사실은 신화의 영역으로 올라간 후, 태양처럼 빛나는 부분만 세상을 회자한다.

 

 

“내 이제 천하를 구하고 떠나니 신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자 다음을 기억하라.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도 그 아래이니, 내 생각 속에 모든 바람을 담고 내 육체 속에 생각을 풀어놓아라. 태극(太極)에서 십방(十方)까지 만물의 이치가 이 안에 있으며 깨달음을 얻는 자 그 흐름을 자신이 되게 하라.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자 영원히 하늘 아래 있고 그 경지를 넘어선 자 하늘 위에 있으리라. 내가 이루지 못한 이 경지를 뛰어넘는 자, 비로소 천하를 얻고 영원히 자유로워지리라. 후인이여, 무림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는 날 다시 하늘을 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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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강천은 마음이 급했다. 속도를 낼수록 오른쪽 어깨를 관통한 상처와 깊게 갈라진 왼쪽 옆구리에서계속 피가 흘렀다. 내상도 치명적이어서 최소한의 운기조식이라도 해야 했지만 점점 가까워 오는 포위망에 아예 쉴 수도 없었다. 피와 땀이 뒤범벅돼 그의 등 뒤로 빠르게 날아가 땅에 떨어졌다. 처음에 30장마다 떨어졌던 핏자국은 지금에 이르러 3장으로 좁혀졌으니 그의 내력도 점점 고갈됐고, 그만큼 남은 삶의 시간도 빠르게 줄어들었다.

 

 

어지러웠다. 전력질주가 네 시진을 넘어서면서부터 어지러움은 달리는 속도를 뭉툭 뭉툭 갉아먹었다. 살을 가르는 통증이야 그렇다 쳐도 한 시진 전부터 흩어지기 시작한 기력은 점점 바닥을 향해 달렸고 이를 알면서도 어떤 조처도 취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목숨이야 이미 버렸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작된 역천의 순간부터 자신의 삶은 의미가 없어졌다. 아니, 최고의 자리에 오른 순간부터 자신의 삶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실존하면서도 어디에도 없는 존재였다. 신화의 주인에게 주어지는 삶이란 너무나 협소해, 천하가 혈란에 빠져들지 않은 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모든 이들보다 높은 곳에 있었지만, 칭송의 대상이었지 그들 사이에 있을 수 없었고, 존재하는 인간이었지만 그 실재가 현존하는 인물로 세상에 속하지 못했다. 그곳에서 검강천은 지독히 외로웠고, 누구와도 속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죽음이 또 다른 시작이 될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죽음으로써 신화의 영역에 올라올 때까지는 자유로워질 자신의 아들이었지만.

  

 

‘이 아이만은 살려야 해.’

 

 

모든 것이 잘못됐지만, 잘못돼 한참은 정도에서 벗어났지만 이 아이만은 살려야 했다. 그것은 천년 전설의 진정한 주인이 이 아이이며, 이 아이만이 변질된 천년의 전설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아이로 인해 전설은 더 이상 신화의 영역에 머무를 필요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아이에게 모든 가능성이 닫혀 있었다, 반나절 전까지는.

 

 

‘신화는 당사자에게 지옥이야. 이 아이는 지옥에 오르기 전까지만이라도 자유로워야 해.’

 

 

검강천은 자신의 아들이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랐다. 그것이 그가 지금 죽을 수 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것도 아이를 살려야 가능하다. 그 이유 때문에 그는 달리면서도 운기행공이나 지혈도 할 수 없었다. 촌각의 시간도 지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껏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았으나 그것을 탓하지 않았고, 그것이 옳다면 누구의 요청도 거절하지 않았으며, 먼저 돌아서지 않았고, 한 번 준 믿음은 이미 주었기에 거둔 적이 없었다.

 

 

헌데 평생을 함께 해온 이복형의 절대권력을 향한 탐욕의 칼에, 모든 것을 쥐고 싶었던 한 여인의 부정한 욕망에 내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 이제는 이 아이마저 위태롭다. 무림은 전쟁을 통해 세력을 넓혀가고, 상인들과의 거래를 통해 부를 늘리며, 뛰어나 자질을 소유한 문도를 늘림으로써 권력의 정점을 향해 간다는 점에서 정치를 닮았다. 절대적 힘을 갖게 되면 반드시 부패하기 마련인 정치를 닮아서 무림은 피와 배신, 복수의 역사와 동일하다. 악은 그런 과정에서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다.

 

 

해서.. 살려야 했다. 이 아이만은 살려야 했다. 내 유일한 핏줄이어서가 아니라, 아이의 어미, 그 처참한 죽음 때문이 아니라, 틀어진 천년의 전설을 바르게 돌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 아이가 살아야 하고 내가 죽어야 하는 이유다. 그 이유만으로 나는 내 아내의 죽음까지 받아들였다, 피눈물과 죽어서도 용서받지 못할 천형(天刑)의 사랑으로. 검강천은 마음 속으로 간절하게 빌었다.

 

 

지이잉!

지-잉!

 

 

그의 오른손에서 승천제마검(乘天制魔劍)이 슬프게 울었다. 주인의 상황을 알고 있는지 검명에는 습기가 가득해 검루(劍淚)를 뚝뚝 흘릴 듯 슬프게 울었다. 빠르게 뒤로 눕는 풀들 위로 여전히 검붉은 피와 영혼마저 잠식하는 땀이 떨어져 내렸고 하늘도 슬픈지 서쪽으로 길게 스러져 갔다. 어둠은 그에게만 밀려들었고 어디에서도 빛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검강천으로서는 모든 것이 가능해 너무나 생소한 경험이었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이런 자유를 누릴 수 있다니..’

 

 

그의 내력이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다리도 하염없이 무거워졌고 아무리 애를 써도 속도는 떨어졌다. 하지만, 여기서 쓰러질 수 없었다. 하나의 약속이 남았기에 그는 쓰러질 수 없었다. 죽음이 그것을 막는다면 죽음부터 벨 것이고, 죽음을 베지 못한다면, 혼백이 되어서라도 약속의 땅으로 갈 것이기에 한 움큼도 남지 않은 의식을 한시라도 놓을 수 없었다.

 

 

가서, 그를 만나야 한다. 그에게 이 아이를 맡겨야 한다. 나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전설과 같은 영역에 올라선 사람, 류심환. 그에게 이 아이를 맡겨야 한다. 그 하나의 이유로 나는 쓰러질 수 없다. 기력이 다해 다리가 멈추면 기어서라도 가리라. 무릎이 다 닳아 뼈가 드러나 길 수 없다면 손가락으로 땅을 긁어서라도 가리라.

 

 

나에게 마지막 하나는 남았다. 하나의 약속만은 남았다. 오년 전에 했지만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바람처럼 지나간 약속, 그 하나만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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