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꾸며진 것이란 사실을 알았다면 내가 그를 찾아 비궁을 나섰을까. 천 년을 이어온 전설이 하나의 거짓과 하나의 비밀이 조작해낸 인공적 설정인 것을 알았다면 나는 무공 최후의 단계에 이르렀을까. 그리고, 그 경지에 이르는 길을 알고도 화월곡에 오년이나 머물러 있었을까.

 

 

 

그때까지 나는 운명을 비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운명이란 놈은 나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나는 어떤 가능성도 열려 있는 내일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신의 영역에서만 가능하고, 운명의 최종 형태를 안다면 난 하루도 더 살 이유가 없다. 너무 재미가 없을 것이고, 어떤 자유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에.

 

 

 

세상 속에 있는 것, 그래서 나와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는 것, 그것이 인간의 조건이자 인류로 이루어진 세상의 영속성이다. 나는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찰나의 순간에만 실존할 수 있을 뿐이다. 최소한 나에게 운명 따위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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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강천과 비무를 한지 오년 후였다. 그날의 비무 이후 나는 이곳에 머물러 전설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어리석음이 빌어먹을 운명을 비트는 출발점이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하나의 약속이 이 모든 것의 발단이 될 줄은 그때는 정말 몰랐다.

 

 

그와의 비무 이후 정확히 오년 만이다. 그때 고집스럽게 지켜온 나만의 경계선 안으로 천년을 이어온 최고의 무대에서 밀려난 주인공이 들어섰다. 그때는 그것도 운명이라 믿었다. 그날은 그와 비무를 한지 오년 후의 어느 날, 하늘 너무 푸르러 슬퍼보였고 녹음은 깊어 오히려 답답했으며, 대지는 너무 충만해 마음이 허기진 그런 날이었다.

 

 

 

 

군가 류심환이 쳐놓은 경계 안으로 들어섰다. 이곳에 들어오는 길을 아는 사람은 류심환이 유일했다. 천상지무를 보는 대가로 검강천에게 알려준 이곳은 무공이 신의 경지에 이르지 않은 동물 한 마리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 이곳은 류심환에게 있어 절대의 공간이자, 한 없는 기다림의 감옥이었다.  

 

 

‘그가 아니라면..’

 

 

그가 땅의 진동과 공기의 파장을 감안해 살펴볼 때 그들이 달리는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른 편이지만 맨 앞에서 달리는 자의 경우 경공이 많이 흔들리는 것으로 봐서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추측됐다. 뒤를 이어 여러 명이 비슷한 속도를 내며 경계 안으로 함께 들어섰지만 흔들림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앞사람이 들어온 방향을 중심으로 몇 갈래로 포위망을 형성하며 들어온 것을 보면 그들은 추적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분명한 것은 어지러운 보법을 펼치고 있는 자가 이곳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길을 알고 있다는 것이고. 그들를 쫓는 자들도 좀처럼 보기 힘든 고수라는 사실이었다. 류심환이 이곳에서 깨달은 무공의 원리에 따라 쳐놓은 경계 속으로 그들이 들어섰다 느꼈을 때, 그들은 이미 모옥과의 거리가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목적지가 모옥이 아니라면, 그들의 경공이 달인의 경지에 이른 자들이었고, 한 명이 도망가고 여럿이 쫓아가는 것으로 볼 때 한 바탕 소란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가 아니라면… 누군가 선을 넘었어. 경계 안으로 들어설 수 있는 자는.. 그래, 오직 그 뿐이야. 그에게만 입장권을 발행했으니까.'

 

 

 

류심환은 천천히 문 앞으로 나왔다. 소란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생의 마지막으로 내몰리는 자가 누구며 그를 그렇게 집요하게 쫓아오는 자들이 누구인지 일말의 궁금증은 있었다. 그래서 문 앞에 나와 섰다. 궁금증 주위를 맴도는 어지러운 바람을 애써 외면한 채 그는 거대한 대문이 열리듯 우측으로 몸을 돌렸다.

 

 

 

허나, 그가 아니라면 경계 안으로 들어선 그들은 금단의 선을 넘었기에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을 문 앞까지 나오게 했다. 죽음같이 적막했던 5년간의 시간을 그들이 깼다. 이것에 대해 그들은 어떤 식이던 간에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며, 한편으로는 무한정의 약속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그가 아니면 누구도 경계 안으로 들어설 수 없고 자신의 기다림은 그만이 깰 수 있다.

 

 

 

그리고 한 사람, 일 푼의 궁금증에 숨어 있던 바람이 얘기했던 한 사람, 5년이란 세월을 격하여 류심환 앞에 운명처럼 서있는 한 사람.  

 

 

 

죽음의 문턱에 선 피투성이 무인, 찢어진 도포 사이로 흘러내리는 피는 그가 얼마나 힘든 격전을 치렀는지 짐작케 했고, 손가락 끝을 타고 지면으로 뚝뚝 떨어지는 선혈은 그 상처의 깊이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려줬다. 그 엄중한 상태에서 얼마를 달려 온 것인가. 생의 끝까지 내몰린 채 그가 달려 온 이곳까지 그 거리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그만큼의 거리와 비슷했을까. 그는 호흡이 매우 거칠었고 때 없이 흔들렸다.

 

 

허나, 그런 순간조차도 존재하는 그 자체가 위대함인 단 한 사람. 나만의 경계 안으로 들어설 때부터 내 기억 속에 각인돼 있어서 단 한 순간도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그래서 귀찮아도 나올 수밖에 없었던 단 한 명의 절대자. 다급한 상황이 분명함에도 흔들림 없이 침잠되어 있어, 얼굴의 대부분을 가린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수련의 깊이를 드러내는 강렬한 눈빛의 소유자.

 

 

수많은 위험과 고비를 뚫고 이곳까지 오는 동안 너무도 미약해진 기운이지만 이 세상 누구도 따르지 못할 맑고 단아하며 고결한 기도. 만남의 첫 순간부터 각인돼, 그래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단 한 사람만의 기도. 내 기억 속에 항상 머물고 있던 단 한 명의 사람. 약속이란 이름으로 내 자유를 박탈해 5년간의 고독을 안겨주었던 바로 그 사람, 검강천.

 

 

 

“천상천주 검강천.”

 

 

 

그였다. 천하에 그 아니면 누가 있겠는가. 하늘 아래 이 같은 기도를 가진 사람이 그 아니면 또 누가 있겠는가. 자신이 쳐놓은 경계 안으로 들어설 수 있는 유일한 사람, 그는 천년 전설의 주인공인 천상천주 검강천이었다. 5년간의 기다림 속에서 비로서 깨달은 고독의 실체를 알게 해준 사람, 그가 생의 마지막에서 자신을 찾아왔다.    

 

 

“류공!”

 

 

흔들리는 검강천의 부름이 류심환의 가슴에 날카롭게 닿았다. 온몸에 가득한 상처들은 너무 많고 치명적이어서 천하제일인이라고 해도 극복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저렇게 많은 상처를 입은 채 이곳까지 왔다는 것이 기적일 따름이었다. 죽음의 순간을 필사적으로 늘려가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왼손에 품고 있는 것에 있었다.

“천주.. 오랜만입니다.”

 

 

그 짧은 부름에 역시 짧게 답하는 류심환의 음성에도 이처럼 느닷없이 일어난 상황에 대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떨림이 묻어났다. 그것은 전혀 예측조차 못해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현실로 일어난 최악의 상황에 대한 놀람이었다. 허나, 오년 전에 한 약속, 그것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아이를 맡아주시오.”

 

 

 

검강천이 거두절미하고 왼손으로 안고 있던 아이를 건넸다. 아직까지 그가 살아 있는 유일한 이유이자, 오년 전에 예약한 부탁의 내용이었다. 너무 맑고 깊어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검강천의 심연 같은 눈동자가 류심환이 아이를 받아 들자 잠깐 흔들렸다. 그것은 류심환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안타까운 시선이었다.  

 

 

 

‘중독됐어!’

 

 

 

류심환은 검강천으로부터 아이를 받아든 순간, 아이가 치명적인 독에 중독된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류심환이 검창천에게 눈으로 물었고, 검강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간절한 눈빛으로 중독의 위중함을 류심환에게 알려주었다.

 

 

 

“최대한 빨리 오려고 했는데..”

“늦지 않은 것 같습니다.”

 

 

 

류심환의 말에 검강천의 눈빛이 크게 흔들리더니 이내 심연으로 돌아왔다. 그가 보인 순간의 흔들림은 심연의 수면을 건드리고 날아간 잠자리의 파장 같은 것이었지만, 슬픔과 체념이 교차하는 안도의 순간이기도 했다. 그가 일단 마음을 다잡자, 아니 더 이상 죽음을 늦출 여력이 없을 인정하자, 애당초 그에게 흔들림이란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것처럼 보였다. 

 

 

“아이 이름은 무영이네.”

 

 

 

검강천이 건내준 아이를 류심환이 말없이 안아 들었다. 예닐곱 살 가량으로 보이는 아이는 자신이 낯선 이의 품으로 넘겨졌음에도 입을 굳게 다문 채 또렷한 눈망울만 깜박이고 있었다. 중독의 고통 속에서도 현 상황의 위급함을 정확히 알기에 아이는 신음소리를 내거나 울지도 않았다. 오히려 너무 깊게 가라앉은 채 두려움을 감추며 아비를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과 꽉 다문 입술이 류심환의 뇌리에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 느낌은 너무나 생경했지만, 분명하게 각인되었다.

 

 

 

어쩌면 아버지보다 뛰어난 아이일지도..’

 

 

 

급히 진기를 주입해 중독의 속도를 줄이며 아이의 상태를 살펴본 류심환은 아이의 신체가 무술을 위해 태어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맑고 청아해 슬픔을 간직한 듯한 아이 눈빛이 검강천과 류심환을 인연의 끈으로 다시 묶은 것은 설명하기 힘든 인연 같았다. 조건이 약속이 되고, 약속이 새로운 인연을 창조했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아이와의 인연은 질긴 운명으로 발전해 가리라. 늘 그랬듯 빌어먹을 운명은 원치 않는 곳에서 원치 않는 방법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그렇게 다시 닻을 올린 운명이란 놈이 류심환을 보고 씨익 웃었다. 그리고 비틀었다. 그 비틀림의 시작에 검강천이 있었고, 중간에 류심환과 무영이 있었고, 그 끝에 그로부터 대가를 치러야 하는 자들의 소리가 들렸다.

 

 

 

‘불나방 같은 놈들…’

 

 

 

“저기다!”

 

 

멀리서 일단의 무리가 소리쳤다. 그렇게 새로운 인연을 창조한 운명이 추격자 무리의 외침을 빌려 검강천과 아이에게 소리쳤다. 그 소리의 시작은 수십 장 밖이었는데 어느 새 그들도 모옥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추적자들은 무서운 속도로 검강천을 향해 다가왔다. 그들 중에는 검강천과 비슷한 옷을 입은 자들도 있었다.

 

 

 

늘 안 좋은 예감은 현실이 된다. 안 좋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그렇게 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삶에서 안 좋은 예감은 늘 그랬다.

 

 

 

‘역모?’

 

 

 

류심환은 기세당당하게 거리를 좁혀오는 추적자들을 보며 검강천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왜 안 좋은 예감이 늘 이렇게 맞아 떨어지는 지 추적자 무리들을 응시했다.

 

 

 

‘내부의 소행이 아니면 천하에 이런 상황을 만들 자는 어디에도 없겠지.’

 

역시 안 좋은 예감에 예외는 없었다, 지금처럼. 검강천을 살해하려는 역도들의 내는 경공의 파공음이 그의 등 뒤에 이르렀다. 천년 무림의 최강자, 검강천의 죽음을 재촉하는 소리가 행동으로 이뤄지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검강천과 류심환에게 그들의 존재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둘 사이에는 오년 전의 약속만 의미 있었다. 무영의 미래, 그리고 그밖의 무수한 일들..

 

 

 

“아이를 무인으로 키워주시게.”

 

 

 

이것이 류심환이 검강천으로부터 들었던 마지막 말이다. 천상천의 신물 천상옥패와 그의 애검인 승천제마검, 그리고 한 권의 서책을 건네면서 검강천이 류심환에게 했던 마지막 말이다. 이것으로 천년의 전설에 처음으로 금이 갔고 그 금은 너무 커서 전설을 뿌리 채 흔들었지만 류심환을 보는 전설의 주인, 검강천의 눈에는 분명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의 약속으로 인해 천상천이 살아 있음을, 이를 아이가 입증할 수 있도록 천하제일인으로 키워주시게. 부탁하네.’

 

 

 

검강천의 믿음이 류심환에게 말하고 있었다. 허나, 천상천주 검강천만 놓고 보면 한 번 기울어진 위세란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기울어진 틈새를 노려 불나방들의 검, 도, 장, 지 등 탐욕과 역겨움의 짓거리가 역천이란 이름으로 가장해 전설의 주인에게 날아들었다. 전설이나 신화가 영원할 수는 없다면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리라.

 

 

 

“알겠습니다. 약속 지키지요.”

 

 

 

류심환이 아이를 품에 안고 돌아섰다. 독에 힘겹게 버티던 아이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아비의 죽음을 보기 싫었던 듯,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듯, 천상무극독에 악착같이 버텼던 아이가 의식의 마지막 조각을 놓쳐버렸다. 류심환의 응급조치에 의해 아이는 혼절하고 말았다. 그것을 지켜본 검강천도 자신의 등 뒤까지 살수를 펼친 그의 형제와 식솔들을 향해 돌아섰다.

 

 

 

순간 두 사람의 등이 마주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모든 것이 멈춰 선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억겁을 두고 그렇게 서 있어 세월의 흐름도 멈춰선 듯 했다. 그 사이에서는 역모의 탐욕자들이 펼친 가공할 위력의 합공은 존재조차 하지 못했다. 모든 사물이 정지된 채 절대의 고요에 빠져들어 두 운명의 스쳐감과 틀어짐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느낌을 다 누리기도 전에 두 사람은 앞으로 날아갔다. 한 사람은 이미 자신의 것이 되어버린 죽음을 향해, 한 사람은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새로운 인연의 미래를 향해.

 

[그리하여 천상천을 다시 세우는 날..]

[우리의 약속도 지켜지게 되겠지요.]

 

 

 

두 사람 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음이 오갔고 검강천으로서는 그 이상의 전음을 이어가기란 불가능했다. 그를 향해 달려드는 자들을 막기에도 힘겨웠기에. 류심환이 무영을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려면 자신이 책임져야 할 시간이 남아 있기도 했고. 자신을 쫓아온 무리들은 이들만이 아니었고,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아직까지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가 남아 있었다.

 

 

'무영아, 잘 자라서 아비처럼 후회를 남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라. 아비는 비록 떠나지만 언제나 네 주위에서 함께 할 거야.

 

 

 

검강천이 몸에 남아 있는 마지막 진기까지 끌어올려 몸을 날렸다. 신화의 영역에서 더욱 빛났던 그의 검이 아름다운 선을 그리며 허공을 갈랐다. 5년전 류심환에게 보여주었던 천상지무가 두 번째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 위력은 너무나 달라서 신화의 영역에 머물러 있을 자격이 없었다. 약간의 시간을 끌 수 있었지만, 그것이 다였다. 전설의 영역에 올라선 신화의 주인공의 죽음은 너무나 초라했다, 그 덕분에 신화는 계속될 수 있었지만. 

 

 

‘아빠… 아빠…’

 

 

혼절한 아이의 보낼 수 없는 마음이 마지막까지 그곳에 남아 몇 날을 목 놓아 울었다. 그때 하늘 밖에 있던 하나의 떠 있는 눈이 빙긋거렸다. 눈짓으로만. 그 빌어먹을 운명의 장난질이 인간에게 해왔던 것처럼, 하나의 떠 있는 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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