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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강남성'에서 벗어나겠다는 조국의 반성문, 특급 엘리트의 옷을 벗다

 

글로만 보면 좀 어려울 수 있으니 영상으로 곧바로 넘어가도 됩니다. 페이스북에서 활동하는 독자들을 위해 블로그 활동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글로써 풀어내지 못하는 것들은 말로써 풀어갈 수밖에 없는 저의 한계를 너그럽게 양해해주십시오.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를 통해 조국의 SNS 글을 분석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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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나라한 인간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상상력이 아닌 진리에 따른 것은 아웃사이더의 속성인데, 이는 자기가 본 것이 진리였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모순덩어리의 인간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의 편에 선다”는 학자적인 이상이 아웃사이더의 삶을 이끌고 불의한 세상에의 도전을 추동한다.   

그렇다보니 "아웃사이더에게는 세상이 합리적인 것도, 질서정연한 것도 아니다...그는 깨어나서 혼돈을 본 인간이다. 아웃사이더는 혼돈이 적극적인 것이며 생명의 근원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를 갖고 있지 않은지도 모른다." 혼돈은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의 본질이며,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현재의 세상이 미래의 세상에도 되풀이될 수 있음을 말한다. 노통이 '어떤 이념도 완성형이 없다'고 말한 것이 이에 해당하는 성찰이다.


모든 아웃사이더는 자신의 구축한 이상적 세상에 매몰돼 있기 때문에 모든 삶의 본질인 '새로운 체험이 불가능하다. 강렬한 갈등은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는 곳에서만 일어난다'는 것을 모르기 일쑤다. 조국이 SNS에서 '학문 연구, 권력기관 개혁에 몰입"했으면서도 '가족의 일상을 '경쟁공화국'의 논리에 맡겨두었다'는 반성을 하게 된 지점이다.  


차가운 이성으로 지은 집에 사는 '아웃사이더'에게 혼돈 속에 사는 인간이란 "완성된 피조물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으로부터의 도전이며, 구원을 받는 만큼 두려움도 느는 머나먼 가능성이기도 하다. 거기에 도달하는 과정은 아직 단거리가 답사된 데 불과하며, 그것도 가공할 고초와 희열이 뒤따른 것이었다. 이 가능성은 오늘은 처형대, 내일은 기념비가 될 소수의 경우에도 그러한 것"일 수밖에 없다. 조국이 권력기관 개혁을 위해 가정사를 방치한 채 학문 연구에 매달렸던 것도 이런 논리로써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다.  


그리고 민정수석을 거쳐 법무부장관에 올랐다가, 공수처 출범도 완성하지 못한 채 '조국 죽이기'에 직면했을 때, 그리고 지금까지 재판이 계속되고 있을 때 다음과 같이 생각했을 수도 있다. "반란에는 휴식처란 있을 수 없고, 환희의 배당도 지불되지 않는다. 정신은 감각의 부속물이며 감각이 견딜 수 있는 데까지 견디어내고 일보전진할 때마다 그것을 발판으로 하여 보다 먼 모험, 보다 깊은 고난, 보다 심한 고통으로 전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감각은 전진도 후퇴도 할 수 없다. 느껴진 감정은 정복된 감정이며, 표현됨으로써 매장되어버린 죽은 체험인 것이다."

여기까지가 재판을 받고 있는 와중에도 '뚜벅뚜벅 반격'을 가하고 있는 조국의 일생을 요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강남성'을 내려놓겠다는 오늘의 SNS가 나오기 전까지 내가 느낀 조국의 부자연스러움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대체될 수 있다. "병에 걸린 영혼인 국외자에게는 이 신세계가 공포감을 일으킨다. 그것은 축음기의 레코드같이 부자유스럽게 홈을 따라 도는 기계문명의 상징인 것이다." 나는 늘 조국에게서 이런 형태의 이질감을 느껴왔었다. 특급 엘리트라는 것이 늘 좋은 것만은 아니며, 진정한 성찰이란 현실의 부대낌을 거쳐야만 성숙될 수 있다. 

 

다시 <아웃사이더>로 돌아가보자. '마지막으로 붓다는 단식을 하고 피골이 상접할 때까지 그것을 계속했다. 어느 날 개천에서 목욕을 하고 있던 그는 기슭으로 기어올라갈 힘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늘어뜨려져 있던 가지에 매달려서 익사를 면했는데, 이때 죽음 일보 직전의 체험에서 붓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자기가 바라고 있는 것은 보다 긴 생명이지 생명을 감소시키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이렇게 깨닫자 그는 당연한 식사를 하기로 결심하고, 동시에 바라는 결과를 얻는 수단으로서 자기 자신의 예민한 상상력과 식별력에 의지하기로 한다...붓다가 오랜 명상을 계속하여 마침내 ‘자유’의 경지, 열반에 도달하여 대오각성하고 자기실현을 완성했다.'

 

 

부처의 깨달음과 비슷하지 않은가. 노무현의 삶과 그 마지막 선택이 그랬다. 그는 아웃사이더로 출발해 치열하게 살다가 성자에 준하는 모습으로 삶을 마쳤다. 조국이 SNS를 통해 '자기의 한계지점을 받아들이고, 강남성에서 벗어나겠다'는 말은 경쟁공화국은 자연적인 것이 아닌 인위적인 선택의 결과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보 노무현이 대통령에 도전할 수 있는 공부를 마친 후 문재인 앞에 나타나 도와달라고 했을 때처럼.

 

시민 노무현이 남긴 한 장의 유언장은 그의 마지막 선택이 성자에 이른 것을 말해준다. '오래된 생각'이라는 것도 대통령에 도전하기 위한 공부를 끝냈을 때, 그리고 봉화에 돌아와 "야, 기분 좋다"라고 말했을 때를 이미 생각해둔 것이었으리라. 그의 마지막 선택이 위대했음은 아래의 인용문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조금 어렵지만 인용문을 읽은 다음 최대한 쉽게 풀어보겠다.   

"자기보존의 본능이 내면 확대의 고통에 반항하고, 정신적인 태만에 기울기 쉬운 충동이 일어날 때마다 파도같이 높아져가는 것을 하찮게 여기며, 자기의 눈으로 보고 자기의 손으로 만진 체험의 양을 한정시키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존재의 민감한 부분을 그것에 상처를 줄지도 모르는 대상에게 드러내 보이며, 어떻게 하든지 전체로서 사물을 보려고 고투하는 것, 그것이 개인에게 맡겨진 문제다. 개인은 이 긴 노력을 아웃사이더로서 시작한다. 그리하여 성자로서 마칠지도 모른다." 


https://www.youtube.com/watch?v=htnqjboBsi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