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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이승윤의 '뒤척이는 허울', 삶과 죽음, 종교와 시대에 대한 가슴 먹먹한 성찰

 

글을 좋아하시는 분은 영상을 보지 않아도 됩니다. 영상에 좀더 많은 것들이 담겨있지만 글로도 충분히 풀어냈습니다. 감사합니다. 

 

 

뒤척이는 허울

 

 

잉크가 마른 경전 위에는 완장을 두른 경구들/ 어머 난 난시가 있어/

 

(모든 일신교의 특징이 최고존재자이자 전지전능하며 절대자이며 창조자이고 모든 우주를 창조한 단 하나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칸트가 <순수이성 비판>을 통해 이런 근본주의적이고 원리주의적인 주장을 증명될 수 없는 것이라며 비판했지요. 최초의 원인으로 소급해 올라가다 보면 스스로 충먼하고 완벽해야 하는 존재로 비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시간과 공간에 선행하며, 영원불멸이며, 어디에나 편재해 있으며, 모든 일어나는 일들에 자신의 뜻이 배경으로 자리하는 전지전능한 신이 무조건적인 믿음과 복종을 요구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잉크가 마른 경전은 모든 신자와 비신자들을 향해 무차별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믿음을 강요하지요, 마치 완장을 찬 것처럼.   

 

모든 종교의 경전들 만큼 수많은 경구로 넘쳐나는 책들이 니체의 <짜리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마셜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입니다)

 

헌데 자신은 난시라니, 무조건적인 필연적인 믿음과 복종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지요. 칼 세이건의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보면 왜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모든 인류가 살아가고 있는 전체 세상이 아닌 성경과 성전에서만 절대적이고 구원자이자 사랑받고 구원을 주는 존재인지 물어봅니다. 그리스도교가 인류에게 더욱 많은 기여를 하려면 성서와 성전밖에서 사랑과 구원을 주는 실천가가 되야 하는 것이 아니나며 묻는 것이 나옵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명분으로 들고나온 성서제일주의, 성서와 예수무오류설 등도 완장을 두른 경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잉크가 말랐다는 것은 각각의 종교가 오래됐다는 것을 말합니다, 도무지 변화할 줄 모르는 그런 고집불통으로서. 

 

아마 아마 뒤척이는 허울/ 아마 지척에는 조울/ 아마 뒤쳐지는 너울/ 뒤척이는 허울은 완장을 두른 경전을 말하는 것 같은데, 자신이 난시이니 경전이 아마도 뒤척이는 허울처럼 다가왔을지도 모르고요 완장을 두른 경전은 너무너무 싫으니까. 지척에는 조울은 그것에서 벗어나기 힘든 자신의 마음 상태가 아닐까요? 뒤쳐지는 너울은 믿는 자들처럼 하늘을 향해 가지 않고 지상에 머물러 있는 자신의 마음 상태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요.  

아마 미쳐가는 서울에/아마 빛을 잃은 거울/ 아마 윗층에는 해야/ 최근의 일부 기독교도들처럼, 또는 경전의 말씀은 아랑곳하지 안은 채 자신의 이익과 탐욕에 물든 광신도들로 인해 서울이 미쳐갈 수 있고, 믿음 자체와 동떨어져 사는 사람들의 각자도생과 욕망들의 충돌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빛을 잃은 거울은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추한지 돌아보게 하는 반성과 성찰 기능으로써의 거울의 역할은 쓸모없어진 것이지요. 이것만 넘어서면, 그래서 위층에 오르면 거기는 햇살 가득한 곳일 수 있지요. 아니면 해, 즉 태양으로 상징되는 신은 아랫층, 즉 현실을 방관하고만 있다는 뜻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일에 신이 함께한다는 데 신의 뜻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사악하고 추한 것들이 널려 있으니...   

아마 미쳐가는 서울에/ 눈 감아 휘청이는 건 좀 봐주세요/ 이런 이유들로 해서 미쳐가는 서울에서, 그 탐욕과 욕망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어, 또는 종교적 광신에 휘청이는 각각의 개인들을 살펴봐 달라는 것 같습니다. 눈 감았다는 것은 비신도들을 말할 수도 있고요. 

 

토성의 고리 손가락엔 안 맞아/ 천체를 접붙인 왕관을 가져와도/ 어머 난 얼굴도 작아/ 어쩌면 신이, 맹신을 요구하는 신이 이승윤군에게 영광의 반지, 즉 토성의 고리를 준다고 해도 맞지 않으며, 천체, 우주를 접붙인 왕관을 씌워준다고 해도 자신은 얼굴이 작아 맞지도 않는다는 것, 즉 완장 두른 경전을 따를 순 없다는 것, 이런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아마 아마 뒤척이는 허울/ 아마 지척에는 조울/ 아마 뒤쳐지는 너울/ 아마 미쳐가는 서울에/ 아마 빛을 잃은 거울/ 아마 윗층에는 해야/ 아마 미쳐가는 서울에/ 눈 감아 휘청이는 건 좀 봐주세요/

 

시대의 품 속에 얼어붙은/ 우린 아마 여기서 얼어죽을 개인/ 얼어죽을 내일/ 많은 이들이 시대의 품 속에서 얼어붙은 채, 다시 말해 신앙적으로도, 세속적으로도 구원을 받지 못해 천국이 아닌 여기서, 이 지상에서, 미쳐버린 서울에서 얼어죽는 것이지요. 지옥도 아닌 대한민국 수도인 이 서울에서. 청춘을 헐값에 가져다 쓴 후에 냉정하게 버려버리는 거대도시의 냉혹한 본질에 개인은 참혹하게 얼어죽는 것이지요. 희망이라는 것의 의미로 쓰인 내일에 얼어죽을 것이니 절망의 상태에서 죽음을 맡는 것이지요.

 

아마 뒤척이는 허울/ 아마 지척에는 조울/ 아마 뒤쳐지는 너울/ 아마 미쳐가는 서울에/ 아마 빛을 잃은 거울/ 아마 윗층에는 해야/ 아마 미쳐가는 서울에/ 눈 감아 휘청이는 건 좀 봐주세요

 

 

 

관광지 사람들

 

 

죽지도 않고 살아 있지도 않는 이 도시에서/ 난 살아 아니 사실은 죽어있는 것 같기도 한데/그래도 나는 살아/ 3대 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이나 이탈리아에 있는 고대로마의 도시들이나, 그리스 아테네 등을 보면 그 역사적 명성 때문에 살아는 있으나 좋았던 시절이 모두 다 사라진 퇴락한 도시로 변해버렸습니다. 죽지도 않고 그렇다고 살아있지도 않은 도시가 된 것이지요. 이승윤군이 말한 관광지는 정확히 확정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난 이곳에서 살고 있어, 반쯤은 죽은 채로, 반쯤은 겨우 숨만 쉴 수 있는 생의 명맥만 유지한 채로, 과거의 영광에 족쇄 채워진 상태이지만 그렇게 지옥에나 있는 듯이 살아 있기는 해 

 

좋은 자린 전부 역사가 차지하고/ 우린 무덤 위에서만 숨을 쉴 수 있고/ 어제를 파낸 자리에 오늘을 묻어야만 해/ 그래야 내일이란 걸 살아/ 그래야만 내일이란 걸 살아/ 좋은 자리란 역사의 유물들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고, 역사의 무덤, 폐허처럼 쇄락한 이곳에서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으며, 과거의 영광을 유지하기 위해 후대의 사람들은 최악의 삶과 행복을 바쳐야 한다는 뜻, 역사의 유물들이 던져주는, 즉 관광객들이 흘리고 가는 부스러기라도 받아먹어야 겨우 삶을 유지할 수 있어... 이런 뜻이지요. 많은 관광지들이 유물 때문에 발전하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코로나19 펜데믹 상황까지 더하면 역사의 도시에서 사는 분들이 힘겨운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과거에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과거도 우리한테 빚을 지고 있다고/ 우린 끊임 없이 그들을 되내이는데/ 그들은 딱히 우릴 기억해주지 않아/ 우릴 딱히 기억해주지 않아/ 역사의 도시에서 살기 때문에, 그것을 보기 위해 왔다가 가버리는 사람들이 쓰는 돈 덕분에 먹고살 수 있으니 과거에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각종 유물들도 우리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빚을 지기란 과거도 마찬가지. 게다가 후대의 사람들을 과거의 영광을 얘기라도 하는데, 그래야 도시의 유물도 관광객들을 맞을 수 있는데, 죽은 유물들은 후대의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아. 기억해주기는커녕 우리는 잊혀진 존재야, 관광객의 떡고물이나 받아먹는.

 

여긴 그냥 관광지/ 우리는 관광지의 주민이지/ 여기에 사는 것은 우린데/ 실은 죽은 사람들과 관광객이 주인이지/ 여긴 그저 관광지/ 우린 관광지의 주민이지/ 거기에 사는 것은 우린데/ 실은 죽은 시간들과 관람객이 주인이지/ 우린 그냥 그 주위를 그리다가 글이 되겠지/ 역전된 관계, 주민이 주인이 아닌 곳, 잠시 동안 들렀다 가는 관광객이 그래서 주인이지. 실은 죽은 시간들과 관람객이 주인이지 라는 표현은 정말 시적이면서도 철학적입니다. 관광객 또는 관람객에게 팔 그림이나 안내글, 역사책 등에 이곳의 주민들이 담기는 정도가 허용된 삶의 모든 것이라는 뜻입니다.

 

박물관 앞에서 그림을 그려 파는 친구녀석이 묻더라/ 세기가 다섯 번을 더 지나도/ 나 같은 놈은 여전하겠지/ 벽의 여백엔 작품이 걸려 있고/ 밖의 공백엔 기념품이 널려 있지/ 저 안에 자리는 안 그래도 얼마 없으니까/ 하는 수 없이 헐값에 팔아/ 어제를 그려 오늘을 내일에 헐값에 팔아/ 관광으로만 먹고 살아야 하는 희망 없는 도시,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과거의 명성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도시, 그곳의 주민으로써 화려한 비상과 절박한 탈출이란 불가능하겠지. 우리의 자리란 없어. 벽의 여백엔 관광객을 위한 작품이 걸려있고, 유적지에서 나오면 기념품들이 즐비하지. 그런 공간이 후대의 사람들이 삶을 가꾸어가야 할 공간인데 그것도 주민의 몫은 아니지. 헐값에 팔밖에야, 어제를 그려 오늘을 내일에 헐값에 파는 영겁회귀의 윤회에 갇혀버린 것이지.   

 

과거에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과거도 우리한테 빚을 지고 있다고/ 우린 끊임 없이 그들을 되내이는데/ 그들은 딱히 우릴 기억해주지 않아/ 우릴 딱히 기억해주지 않아/

 

여긴 그냥 관광지/ 우리는 관광지의 주민이지/ 여기에 사는 것은 우린데/ 실은 죽은 사람들과 관광객이 주인이지/ 여긴 그저 관광지/ 우린 관광지의 주민이지/ 거기에 사는 것은 우린데/ 실은 죽은 시간들과 관람객이 주인이지/ 우린 그냥 그 주위를 그리다가 글이 되겠지

 

가장 남쪽에 위치한 예루살렘은 비록 더럽고 누추한 도시였지만 셈족의 모든 종교가 이곳을 거룩한 성지로 만들어놓았다. 기독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은 과거의 유물을 직접 관찰하고 또한 역사의 전통을 실질적으로 체험하기 위해서 해마다 이곳으로 순례의 길을 떠났다. 일부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의 정치적인 미래를 위하여 예루살렘을 보고 싶어 했다. 이렇듯 과거와 미래의 단합된 힘이 너무나 강력했기 때문에 이 도시에는 거의 현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극히 일부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예루살렘 사람들은 마치 호텔에서 일하는 심부름꾼처럼 아무런 개성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오가는 여행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살아갈 뿐이었다.

 

 

www.youtube.com/watch?v=AOL2QknvnI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