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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세력의 몰락과 부활을 위해

강준만류 진보비판, 정치와 이념부터 구별하길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날부터 지금까지의 과정을 복기해 보면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남북이 분단된 상황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정치와 이념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공익을 구현하는 정치는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라는 이념적 구별과는 다른 것이며, 이념에 대한 실천적 과정이다. 정치가 공익을 구현하지 못할 때 그것은 정치가 아닌 사적 이익을 위한 것이다. 



이는 자유민주주의와 민주주의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과 동일해서, 정치의 과잉이 역설적으로 정치의 몰락으로 이어진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한다. 대중매체에 의해 공적인 부분이 사적인 것들로 식민화된 이후에는 정치는 더욱 공익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 250여명의 학생을 포함해 304명의 국민이 죽었음에도 5개월이 넘었는데도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하나 제정하지 못하는 것도 이것에 기인한다.





민주주의라는 대원칙 하에, 현대적 의미의 정치를 최소로 정의(현대 정치학의 빈곤함)하면 다양한 사회적 이해관계와 갈등을 조정하는 공적인 작용이다. 정치가 충돌하는 사회적 갈등을 조정해 구속력 있는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과정이란 정의도 여기서 나온다. 정치를 정의하는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짧은 글로 다루려면 모든 가지들을 쳐낸 이런 방법(추상화)밖에 없고, 그래서 대단히 위험하다. 



구속력 있는 사회적 합의가 최후의 지점에 이르면 다수결원칙으로 판가름나는 것이 민주주의기 때문에, 정치과정을 대의하는 정당이 여론을 참조하고 참여를 늘리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회적 합의와 동일한 것으로 취급되는 법에 공개성, 공공성, 투명성 등의 원칙들이 적용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가 갖는 한계가 여기서 나오지만, 현실적으로 이를 피할 방법이란 없다.



반면에 이념을 같은 방식의 최소 정의로 보면, 구속력 있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확보한 공적 이익을 어떻게 배분하느냐의 원칙에 관한 것이다. 생산과 분배, 낙수효과와 분수효과 등등이 여기서 나온다. 근대국가의 등장과 자유방임 시장경제, 자본주의가 거의 동시에 등장하면서 계층의 분화와 함께 부와 기회의 불평등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이로 인해 분출하는 갈등의 충돌에 따른 약자와 패자를 돌보는 안전망으로서의 사회가 급격히 몰락함에 따라, 공적 이익의 분배에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방식을 취한 진보좌파와,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방식을 취한 보수우파로 나뉘었다.





이념이 주로 경제(푸코가 말한 삶-정치로 귀결된다)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정당과 이익집단의 기초가 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결도 실제는 소유권이 핵심인 경제에서의 대립(주인 대 노예, 기업(자본)가 대 노동자 등등)이었다. 자본주의는 자유방임에 따른 사적 독점을 인정할지언정 정부에 의한 계획경제(공적 독점이 발생한다)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자유주의와 자웅동체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서 자유민주주의가 탄생하고, 그 자체로 보수적 성향을 띠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자연적으로 주어진 자유라 함은 육체적, 정신적, 환경적, 계층적 등등의 면에서 태생적이고 후천적인 차원 모두에서 강자로 출발하는 자에게 유리하다.



보수우파들이 (그들 사이의) 자유을 중시하고, 자본주의가 극에 달한 신자유주의가 자유를 방임의 수준ㅡ무한경쟁․적자생존․승자독식ㅡ까지 몰고 간 것도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기본적으로 태성적·후천적 강자에게 유리한 것도 소유권의 한계와 분배에 관한 다툼인 이념에서 출발한다. 



세상을 보는 관점에서 보면, 보수우파의 정치는 현재의 상황이 지금까지의 최선(변증법상의 정)이라는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언제나 결과에서 차이가 벌어진다. 태생적이고 환경적인 차이를 정치가 교정하지만 그것이 최소한에 그친다는 것(신자유주의 통치의 핵심이다)이 차별과 불평등이 늘어나는 것이 보수우파의 현실인식이고 그들의 정치다.  

  


이에 비해 이념(사상, 이데올로기)은 국민(인민)과 사회의 구성원을 사회경제적 기득권과 비기득권으로 나누는 것에서 출발한다. 정치에 비해 이념의 기원을 아담 스미스와 칼 마르크스에서 찾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념은 그래서 기득권(소유한 것이 많고 크다)에 방점을 두느냐, 비기득권(소유한 것이 적도 작다)에 방점을 두느냐에 따라 정치과정을 통해 이루어내는 사회적 합의의 내용이 달라지는 출발점이다.



즉 이념은 정치가 현실적 과정으로서 출발하는 지점이나 먼저 주어진 선험적인 것(소여)이 된다. 이해관계의 갈등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구속력을 지닌 사회적 합의라는 공적 이익이 도출되면, 이것을 기득권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하게 조정하는 것이 보수우파요, 비기득권에게 유리하도록 조정하는 것이 진보좌파다. 



이는 제한된 공적 이익의 상대적 조정이지만, 결과에서는 차별과 불평등을 최소화한다. 좌파와 진보가 나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좌파는 결과의 평등을 얼마까지 인정하느냐에 따라 가운데에서 좌측으로 간다. 강준만 교수의 성찰은 이것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이념의 가치를 현실화하는 정치과정(타협, 조율)에서 벌어지는 표상에 집착함으로써 좌파와 진보를 하나로 본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든다.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이고 엘리트적이며, 기존의 강자이자 승자인 대기업 위주의 성장정책과 낙수효과를 주장하는 것이 보수우파이다. 그들의 특징은 '계몽의 변증법'에 의해 인류 문명은 끝없이 전진한다는 결과의 낙관론(예를 들면 과학기술의 발전이 문제를 해결해낼 것이다)에 방점이 찍혀 있다. 그래서 현재의 차별과 불평등이 미래에는 줄어든다고 주장(쿠즈네츠 가설)한다. 



보수우파가 긍정적·적극적·낙관적인 사고를 중시하고, 인간의 얼굴을 한 채 탐욕으로 이어지는 욕망을 부추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래는 지금보다 언제나 좋다는 '결과의 낙관론'에 경도돼 있기 때문에 ‘하면 된다’는 말이 보수우파에게서 유독 강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보수우파가 그토록 혁신을 강조하는 것도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면서, 지속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혁신이기 때문이며, 이것이 바로 사회진화론의 핵심인 적자생존의 원리다. 노력만 하면 미래는 좋아지기 때문에 '꽁짜 점심은 없다'는 것과 '더 이상 사회적 구조는 없다'라는 선언이 나올 수 있었다.



이는 또한 자본주의의 발전 방식이기도 하다. 보수경제학자인 피케티가 부자에 대한 누진증세를 주장하면서도, 성장이 불평등을 줄일 수 있는 방식이라며, 끊임없는 혁신을 강조한 것도 보수 경제학자의 본질이다. 새누리당이 매일같이 떠들어대는 ‘보수의 혁신’은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당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