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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조국 사퇴 광화문 보수집회 어떻게 봐야 할까?

 

오늘 광화문에서 열린 조국 사퇴 보수집회에 상당한 인원이 모인 것 같다. 자발적이던 동원이던 참여 인원이 많은 것은 나쁠 것이 없다. 주최측의 주장대로 200만 명이 모였다고 해도 나쁠 것이 없다. 명목상이던, 실질적이던 간에 조국 사퇴 집회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 공정과 공평, 정의라면 자한당의 주장대로 300만 명이라도 나쁠 것이 없다. 이땅의 보수들이 반칙과 특권의 기득권 유지와 세습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 공정과 공평, 정의를 공적 가치와 정치행위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할 일이지 정치공세니, 강제 및 알바 동원이니 하며 폄하할 필요는 없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 했으니 저들의 동원능력과 참여인원의 최대치가 얼마인지 아는 것도 나쁠 이유가 없다.  

 

깨어있는 시민들은 그들에게 오늘의 참여 명분을 잊지말고 계속 가져가라고, 황교안이나 나경원, 홍준표, 조중동을 비롯한 기레기들처럼 껌이나 침 뱉듯이 뱉지 말라고 말하면 된다. 문재인 대통령 하야나 탄핵을 외치던 말던, 정권 탈환을 목놓아 외치던 말던 그것의 명분이 공정과 공평, 정의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상기시키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안을 구체적으로 내놓으라고 독려하고 독려하면 된다.

 

만에 하나, 그럴 리야 없겠지만, 일본으로 추방해도 모자랄 자한당 놈들이 총선에서 승리하고 정권 탈환에 성공하더라도ㅡ생각만 해도 끔찍하다!ㅡ똑같은 기준에서 그들의 국정운영을 감시하고 비판하며 집회에 참여하라고 반복해서 상기시키고 요구하면 된다. 당신들은 절대 조국 가족처럼ㅡ팩트로 확정된 것이 하나도 없고, 재판에서 모두 다 무죄가 나올 것이라고 확신하지만ㅡ기득권의 유리함, 반칙과 특권, 품앗이를 하지 말라고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실천하라고 압박하면 된다.   

 

 

조국 사퇴 광화문 집회의 참여 인원이 두려운 분들이라면 이번 주 토요일의 조국 수호 집회와 그 이후에도 계속될 집회에 더 많은 시민들이 모이면 된다. 2016년의 혹한도 견뎌낸 촛불시민이라면 무엇이 두려울까? 민주주의는 가장 낮은 차원에서 보면 숫자의 우열로 최종 판결이 나는 체제이자 행동규범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조기 레임덕에 빠져 실패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되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분들이 많다면 이번 주 집회를 통해 숫적 우위를 또다시 보여주면 그만이다. 깨어있는 시민에게는 그럴만한 역량도 있고 승리의 기억과 경험, 노하우도 있다. 

 

중요한 것은 공정과 공평, 정의를 놓고 이념으로 갈라서던, 진영으로 갈라서던 국가적 차원의 논의가 치열해질 수 있는 계기를 맞았다는 것이다. 자한당과 기레기, 정치검찰은 이를 최대한 이용한 후 나몰라라 하며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싶겠지만 그렇게 할 수 없도록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검찰의 오만방자한 정치행위가 벌어지기 전까지는 문재인 대통령이 조국 후보자 임명을 철회하기 바랐던 필자가 조국 대전에 뛰어든 이유도 국가적 화두가 이념과 진영이 아닌 공정과 공평, 정의가 된 것에도 상당 부분 관련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성공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것은 숨쉬는 것과 같기에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필자가 이번 글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조국의 딸과 아들이 누렸다는 특혜 또는 불공정ㅡ이에 대한 반론은 넘칠 정도로 많지만 이번 글에서는 다루지 않겠다ㅡ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청춘의 분노가 유독 서울대 연대 고대의 일부(또는 다수) 학생들이나 중산층 이상의 가정 중에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자녀를 둔 사람들 사이에서 유독 강하게 표출된 이유이다. 오늘 광화문 집회에 많은 인원이 모인 동인이 조국의 딸과 아들이 누렸다는 계층적 특혜나 불공정에 있다면, 이미 기득권층에 들어선 서울대·연대·고대생 같이 상위 5~10%에 속한 청춘이나 중상류층보다 거의 모든 면에서 불리한 하위 90%에 속하는 청춘과 중하위층의 분노가 더 커야 했다.      

 

지난 화요일의 100분토론(역사상 최악의 토론 중 하나였다)에 토론자로 나온 우석훈과 성한용, 김근식(이 자의 구역질나는 위선을 알고 싶다면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 북한 관련 토론에 나온 그의 발언들을 찾아보라), 그리고 한심하기 짝이없는 또 한 명의 토론자처럼 덜 떨어진 지식인과 진보인사(자신이 구좌파적 보수라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는 작자들, 이념 구분을 직선상에서만 볼뿐 3차원적으로 보지 못하는 사이비들)는 청춘의 분노를 들어 조국을 비판했지만, 그들이 말하는 기회의 공정함과 정의란 구시대의 유토피아적 유물이어서 하위 90%를 대변하지 못한다. 상위 5~10%에 속한 학생과 계층에 분노가 집중된 이유는 그들의 기득권을 조국 가족이 더욱 많이 누렸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조국의 딸과 아들이 누렸던 특혜와 불공정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지지만, 무엇보다도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정립한 존 롤스의 <정의론>을 제대로 읽었다면 상위 5~10%에 속하는 학생과 중상류층이 주장하는 공정한 기회란 불평등을 전제로 한 것이며, 불평등을 늘릴 뿐이라는 롤스의 성찰부터 제대로 확인하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공정으로서의 정의에 관해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롤스는, 태어나 보니 부모 모두가 교수이고 경제적으로도 중상류층에 속한 것을 '우연'이라 말하며, 원초적 상태에서 정의의 두 원칙에 합의하는 경우에도 각각의 참여자는 우연하게 놓이게 된 환경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최대한 활용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원초적 입장에서 모든 참여자가 만장일치로 합의하게 되는 정의의 두 원칙, 즉 최소수혜자에게 최대의 이익이 돌아가는 합의가 전제되고 기초적인 제도에 반영되지 않은 현재의 상황에서 상위 5~10%가 소리 높여 주장하는 기회의 공정함이란 불평등을 전제로 한 것이며, 그것을 더욱 늘릴 뿐이라는 롤수의 주장((이 지점에서 완전한 평등을 강제적 요구하는, 그래서 공정한 정의에 관심이 없는 마르크스적 구좌파와 명확하게 구별되며, 정의의 두 원칙에 참여자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자유롭고 평등한 합의에 이를 수 있다. 칸트(+로크+루소)의 사상을 국가와 사회의 기초적인 제도로 녹여내려 했던 롤스의 <정의론(개정판)>에서 말하는 합의란 사회계약론과 참여민주주의의 발전적 혼합형이라 할 수 있다. 드워킨도 <자유주의적 평등>에서 완전 평등을 요구하는 구좌파의 차이를 명확하고 합리적이며 정의롭게 풀어냈다. 두 사람의 주장을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는 사람들이 21세기의 진보적 민주주의자, 또는 사회적 민주주의자라고 나는 믿는다)에 완전히 배치된다.

 

가난했고 온갖 병으로 시달렸던 나 같은 장애인을 포함해 상대적·절대적 약자의 위치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는 하위 90%에게 기회의 공정함이란 우연으로 부과된 환경적 불리함을 감수한 채 지랄같은 경쟁에 참여하라는 것이어서 조국의 딸과 아들이 누렸다는 특혜와 불공정에 분노할 힘도, 현실적 고민도 되지 못한다. 서울대 연대 고대의 일부학생들처럼 상위 5~10%에 속하는 청춘과 부모들에 유독 분노가 집중된 것도 기회의 공정함에 숨어있는 불평등의 독점을 뺏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나 상위 10%에 속하는 청춘들은 취직이나 결혼 걱정 같은 것은 하지 않았고 앞으로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

 

롤스의 주창처럼 조국의 딸과 아들도 우연으로 얻은 유리한 환경을 위법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활용한 것이기에 공정으로서의 정의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이 불공정하고 정의에 반한다면 유리한 환경을 물려받은 청춘들은 그 유리함을 활용하지 말아야 하며, 부모는 무엇에도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아니면 그런 유리함을 모두 다 반납한 완전히 평등한 상태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주장한 프롤레타리아 폭력혁명이 성공한 이후에나 가능한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마르크스의 예언 중 맞는 것이 하나도 없었던 이유도, 앞으로도 맞을 것이 남아있지 않은 이유도 인간과 세상, 정치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터무니없이 부족하거나 잘못된 추상화(그의 사상체제 안에서는 완벽하고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위대한 성찰을 보여주었지만)의 오류에 빠진 유토피아적 환상에 매몰됐기 때문이다.      

 

환경적 요인을 고려하지 않은 기회의 공정함이 불평등을 강화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롤스가 정의에 대한 차등의 원칙으로 최소수혜자에게 최대 이익이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며, 사회주의적 요구를 대폭 수용해 '공정으로써의 정의'를 설파한 이유도 기회의 공정함을 보완하기 위해서다. 차등의 원칙이 실시되도 불평등은 유지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불평등은 줄어든다. 그의 성찰이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이념과 진영이 아닌 '공정으로써의 정의'를 국가와 사회의 기본틀로 받아들이는데 합의한다면 기회의 공정함은 결과의 불평등을 최대로 줄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다. 

 

다시 말하면, 오늘 광화문에 모인 사람들의 대다수는 공정과 공평, 정의를 그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보수적인 구좌파와 사이비 입진보의 무식하고 교조적인 선동 때문에 필자가 포함된 386세대가 사악한 기득권으로 비난받고 있지만, 386세대에서도 상위 10%와 하위 90%는 현재의 청춘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민주화 투쟁도 전체 대학생의 10% 정도만 참여했고 그들 대부분은 취직은커녕 목숨까지 보장할 수 없을만큼 역할한 환경을 감내해야 했다. 민주화 투쟁에 앞장선 내 친구 두 명도 군대에서 목숨을 잃었고, 재벌이나 대기업 등에 취직한 놈은 한 명도 없다.

      

현재의 헬조선은 그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세습되는 상위 1%와 기술 발전, 전쟁, 천재지변, 전염병, 인종, 성별, 이데올로기 등에 따른 결과이지 386세대를 비롯한 기성세대 때문이 아니다. 산업자본주의가 본격화된 이래 사회의 중추가 50대인 것은 모든 나라에서 공통된 현상이지 대한민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경제성장률과 임금인상률, 복지 수준에 비해 평균수명의 증가가 더욱 가파랐다른 것까지 고려하면 이 시대의 상위 10%는 386세대의 상위 10%에 결코 불리한 상황에 처한 것도 아니다. 피해의 대부분은 하위 90%에 집중되어 있다. 장애인과 여성일수록 더욱 많은 불평등과 피해에 노출돼 왔고.   

 

진보좌파적 성향이 강한 필자가 마르크스주의적 구좌파(보수적이며 권위주의적인 성향)와 사이비 좌파인사(엘리트주의적 성향)에게 그토록 분노하는 이유도, 그들이 자한당과 보수언론, 뉴라이트, 토착왜구처럼 극우친일꼴통에 필적할 만큼 역사와 현실을 호도하고 왜곡하기 때문이다. 기회의 공정함이 마치 공정과 공평, 정의의 핵심인양 떠들어대는 그들의 교언영색이란 불평등의 심화와 성장의 역설에 침묵하는 경제학자의 궤변과 함께 사탄의 속삭임에 다름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기회의 공정함이 정의로우려면 불평등과 불공정을 완화하기 위한 역차별적 조정작업이 뒤따라야 한다. 하위 90%에게 기회의 공정함이란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결과를 받아들이란 것과 다름없다.  

 

 

기회의 공정함이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는,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환경에 시달리고 있는 하위 90%의 청춘과 시민들이 조국 사퇴를 외친다면, 문재인 대통령은 당장 내일이라도 조국을 사퇴시킬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윤석렬 검찰총장에게 직접 지시를 내려 검찰개혁에 속도를 높인 것도 조국 이후를 고려했기 때문으로 본다(검찰이 설득력 있는 증거로 정경심 교수 기소에 성공한다면 문재인 대통령의 결심이 빨라질 수도 있다. 물론 정반대일 수도 있다. 조국 법무부장관으로 인한 국정 운영의 불리함과 어려움은 감수한 채 검찰개혁에 박차를 가할 수도 있다. 검찰개혁이 그만큼 중차대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심중을 알 수 없지만, 오늘 광화문 집회에 공정과 공평, 정의를 내세워 많은 인원이 모인 것은 나쁜 일은 아니다. 불평등과 불공정의 근원인 계급간의 의식 차이까지는 아니더라도 계층간의 환경과 의식 차이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 조국 사태의 의의이기 때문이다. 계급의식까지는 아니더라도 계층의식을 국민 모두가 체감한다면 미래의 대한민국은 지금보다 무조건 좋아질 것이 분명하다. 반칙과 특권에 반대하고, 불평등과 불공정의 시정을 시대적 과제로 부상시킨 조국 사태는 대한민국을 진정한 선진국으로 진입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촛불혁명에서 확인할 수 있었듯이 대한민국 시민들의 정치의식은 세계 최고의 수준에 이르러 있다. 조국 사태를 슬기롭고 정의롭게 수습할 수 있다면, 세계적인 석학들도 미래의 불확실성에 빠져 헤매는 상황에서 인류의 미래를 밝힐 수 있는 최선의 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 미시적으로 볼 때 이번 주 검찰개혁 촉구 및 조국 수호집회에 광화문집회보다 많은 인원이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최측 추산 300만 명에 이르러야 효과가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국가적 과제로 떠오른 공정, 공평, 정의 담론을 발전적으로 키워가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에서 문재인 대통령으로 이어진 핵심 가치가 바로 그것이며, 촛불혁명의 대의였기 때문이다. 검찰과 언론, 보수 진영을 환골탈퇴시킬 수 있어야 재벌과 수출 위주의 한국경제도 지속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까지 고려하면 조국 사태를 발전적으로 키워가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다.

 

인공지능이던, 유전공학과 나노공학이던, 지구온난화나 핵전쟁, 신종 전염병, 고령화·저출산의 심화이던 간에 인류에게 주어진 시간은 50년 정도다. 원인이 무엇이던 간에 공정·공평·정의가 시대적 화두로 떠오른 것은 그래서 정말 소중한 기회다. 이번 기회를 살릴 수만 있다면 문재인 정부의 성공은 따놓은 당상이다. 조국을 지키냐 지키지 못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지키는 것이 최선이지만) 대한민국을 공정·공평·정의로운 국가로 만드는 것이다.

 

조국 사태를 기점으로 해서 대한민국 개조에 성공할 수 있다면 노무현 대통령이 추구했던 사람사는 세상이자 문재인 대통령이 반드시 이루겠다는 사람이 먼저인 나라가 될 수 있다. 내년 총선 전까지 행정부 차원의 검찰개혁에 성공하고 총선에서도 압승할 수 있다면 성숙하고 공정하고 정의로운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개헌(내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경제민주화의 강화와 차별금지 조항의 포함이며, 그것에 기반한 차별금지법의 국회 통과다)에도 성공할 수 있다. 조국 대전에서 승리하는 것이 그 출발이라는 점은 거듭해서 말해도 부족함이 없다.  

 

 

P.S. 시진핑의 중국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홍콩시민들의 위대한 투쟁이 승리로 귀착되기를 간절하게 기원한다. 

 

P.S. 나는 마르크스의 추상화를 비판한 석학들 중에서 칼 폴라니(인간에 대한 이해 부족), 한나 아렌트(노동자에 대한 이해 부족), 미셀 푸코(진화론과 물리학에 대한 이해 부족), 울리히 벡(역사의 가변성에 대한 이해 부족), 지그문트 바우만(자본주의 변화에 대한 이해 부족), 토마 피케티(잘못된 추상화) 등에게서 제일 많이 배웠다. 칼 포퍼와 다니얼 벨 등의 신보수주의자의 비판은 그 자체로 모순에 빠져있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