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었을까? 운명이 나에게 안배한 것이. 과거란 지나갔기 때문에 그것이 운명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미래마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의지는 어떤 역할을 할 것이며, 나는 삶의 주체로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운명이었다고 말해야 한다면 무엇이 내것이고, 지금 이 순간에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누구이며, 내가 내 삶의 주체가 될 수 없다면 살아있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운명이 내 의지와 선택을 비틀었다면 나 또한 운명에 맞서 비틀 수 있다는 것, 그것조차 운명이 안배한 것이라 해도 나는 비틀 수 있고 비틀 것이다. 과거는 지나갔기에 과거이고, 미래는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래이다. 나는 지금 현재의 상황에 충실하려 한다. 내 의지와 선택이 자유롭게 흘러가도록 만들 것이다.
봄이다. 어김없이 찾아온 봄이다. 시간은 이렇게 공간 속으로 되돌아오곤 한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들이 아득한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도 있었고, 가늠할 수 없는 먼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도 있을 것인가? 나는 지금 과거와 미래,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고,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봄이다. 이것만은 운명이 안배한 것이 아니기를, 나는 빌고 또 빌었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몸을 뒤척이는 것처럼, 영원히 되풀이되는 시공간 속에서 갇혀 있지 않기를, 나는 빌고 또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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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곡에도 봄이 왔다. 온난다후한 기후 때문에 그것이 봄인지 조금 시원한 여름인지 구별하기 힘들지만, 절기상으로 볼 때 봄은 확실했다. 헌데, 삼혼 중 불혼과 도혼의 무공을 육 개월째 수련하고 있는 무영이 수련 중에 뿜어내는 열기가 여름 중에서도 가장 덥다는 삼복 더위에 못지 않았다.
가옥 앞, 뒤에 마련된 연무장의 모습은 육 개월 사이에 많이 바뀌었다. 무명곡의 인공절벽은 족적의 수가 늘었다는 것 이외에는 별반 차이가 없었는데 가옥 앞과 뒤에 있는 연무장은 거의 폐허나 다름없었다. 수많던 기둥은 무영이 무공 수련 중 휘두르는 검기와 도기에 의해 잘리고 박살나 이제는 몇 개 남지 않은 상태였다.
다양한 지역의 다종한 지반의 형태를 재현한 수련장은 아예 모양이 모두 다 바뀌었다. 지반의 형태도 예전과는 달리 대부분 늪지나 물, 모래로 이루어졌고 거의 모든 곳에 날카로운 검이 거꾸로 박혀 있었다. 하지만 이곳도 수많은 무영의 족적으로 마치 수백 년은 된듯한 상태로 바뀌었다.
그 수련장의 끝에 새롭게 만들어진 건물이 들어섰다. 그 건물은 하나의 인공 기관으로 삼십 장 길이의 통로였고 수많은 장치가 숨겨져 있었다. 무영이 오늘 이 기문을 통과하기로 했다. 삼십 장 길이의 기문은 도혼이 난이도가 높아진 무공 수련을 위해 류심환이 부탁한 기관토목술의 정수들을 모은 집합체였다. 류심환은 자신이 비궁에 들어가기 전에 통과한 관문에다 몇 가지 기능을 추가했다.
기관을 만드는 두 달 간, 도혼은 하루 한 시진밖에 자지 못할 정도로 기관의 재완성과 보강에 매달려 그의 몸은 뼈가 다 저리고 살이 저밀 정도로 피로가 누적됐다. 물 먹은 창호지처럼 늘어져 더 이상 기문의 보강작업을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비로소 기관은 완성됐다. 어쨌든 도혼으로서는 무영의 무공수련을 위해 자신의 기관토목술 지식을 다 바쳤기에 몸과는 달리 마음은 날아갈 듯 상쾌했다.
그 앞에 무영이 섰다. 오늘 이 기관을 통과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 단계로 넘어설 수 있다. 무영은 생각했다, 다음 단계는 자신의 새 내력과 천상무극진기와의 합일일 것이고, 이는 천상지무의 연공에 들어서는 것을 의미한다고. 오늘은 그래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날들 하루라고.
사전지식으로 주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 도혼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일극무원결을 바탕으로 해서 그때그때의 상황에 대처해야 하고 정말 대처하기 힘든 경우에는 그 동안 익힌 삼혼의 무공을 사용해야 한다. 무영은 크게 신호흡을 한 뒤 마침내 기관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그긍!
무영이 들어서자마자 기관의 입구가 다쳤다. 헌데 그 입구가 내려오기 시작하는 맨 위쪽의 한 자 높이에서 열 개의 비도가 그를 향해 발사됐다. 잠시의 틈도 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제 막 기관에 들어섰음에도, 그래서 어둠에 익숙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슉!슉!
어떤 의도도 없는 열두 개의 비도가 무영의 등뒤 주요 혈도 열 곳을 쏜살같이 파고들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상으로 신경이 점차 날카로워진 상태에서 입구가 닫히는 소리가 더해져, 기관에 익숙하지 않은 초반 긴장이 최고조에 오르고 그에 따라 그의 몸이 최대로 경직됐을 때 불의의 공격이 펼쳐진 것이다.
‘도혼 할아버지답다. 허나…’
“합!”
무영은 최대한 몸을 틀며 왼손을 뒤편을 향해 흔들어 일극무원결의 수비식 제 일초 수(守)를 펼쳤고 그의 손에서 십이연환장(十二連環掌)이 발사됐다. 순간, 열두 개의 손이 허공 중에 동시에 생겨 비도를 하나씩 잡았다. 마치 무영이 손이 열두 개나 달린 괴물처럼 보였다. 동시에 장풍을 펼치는 반탄력을 활용해 무영은 허리을 직각으로 꺾었다.
마치 척추가 부러져 몸이 정확히 둘로 꺾인 것 같았지만, 이를 통해 무영은 열두 개의 비도 다음에 자신의 가슴 높이로 날아든 다섯 개의 창을 피할 수 있었다. 동시에 손으로 잡은 열두 개의 비도를 자신으로부터 오 장 앞에 있는 양쪽 벽면의 여섯 개 화주(火珠)를 향해 발사하며 몸을 일으켰다.
바로 그 순간 열두 개의 화주가 그를 향해 그대로 튀어나왔다. 무영은 화주가 설치된 안쪽에서 미세한 진동을 느껴 기관이 작동할 것을 눈치 채 선수를 친 것이다. 이는 일극무원결 상의 수비식 제 이초 겸, 공격식 제 일초 흡이발(吸以發)을 응용한 수였다.
펑!펑!펑!
열두 번의 폭발이 일어났고 기관 내의 모든 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기관 안이 칠흑 같이 어두워졌다. 순간, 그가 어둠에 적응하기도 전에 무엇인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쉭! 휘리리릭!
그것도 소리의 내용이 모두 달랐다.
'할아버지가 나를 잡을 요량이야. 쉴새 없이 몰려오잖아!!'
무영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그의 몸은 이미 일극무원결의 수비식 제 삼초의 전반부 투안(透眼)을 시전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몸의 반응이 빨랐다. 무영의 투안에 걸린 것은 모두 세 종류의 공격이었다. 자신을 단 번에 저승으로 보낼 듯한 장창이 다섯 개였고, 비석(飛石)이 아홉 개였으며, 서른여섯 개의 침과 두 자루의 검이 포함돼 있었다.
양 벽면에서 튀어나온 각각 두 개의 장창이 상반신과 하반신을 동시에 노렸고 천장에서 머리를 향해 한 개의 장창이 파고들었다. 철강석으로 만들어진 비석은 성인 주먹의 반만했는데 머리와 가슴, 단전 및 팔과 다리를 향해 파고들었고, 서른여섯 개 침은 무영의 주요 사혈을 향해 하나의 혈도 당 각각 두 개씩 동시에 격발됐다. 마지막으로 검은 이를 피하기 위해 몸을 날리거나 검막을 칠 것을 대비하여 무영의 양 손목을 겨냥했다.
어디로도 피할 곳이 없는 상황이 됐다. 허나, 청아한 무영의 기합이 터졌고, 그는 서있는 자세 그대로 몸을 돌리면서 양 손을 상하좌우로 흔들었다. 그가 이렇게 몸을 돌리며 양 손을 마구 흔들자 허공 중에 촘촘한 기의 장막(掌幕)이 펼쳐졌고 이는 일극무원결 상의 수비식 제 삼초 후반부 망(網)을 장풍으로 구현한 것이다.
챙!! 탁!탁!
팟!팟!팟!! 카앙!!
충돌과 함께 창이 부러졌고 돌이 산산조각 났으며 침들이 튕겨나갔고 검이 동강났다. 망은 수비식이었지만 지금처럼 좁은 장소에서는 반탄력을 이용한 공격도 됐다. 이것이 상대의 힘을 이용해 공격하는 일극무원결 상의 공격식, 그 제 이초 역반투(力反投)와 일맥상통한다.
퍽!퍽!퍽!퍽!!!
무영의 방어에 의해 부러지고 조각나고 튕겨나간 창과 비석의 파편들이 기관의 여러 곳에 날아가 박혔다. 순간, 기관 전체가 진동을 일으키더니 변화를 일으켰다. 그의 일 장 앞의 바닥이 꺼지고 천장이 내려오고, 이 장 옆의 벽면이 열리면서 만년한철로 된 삼 장 앞의 벽이 진로를 차단했다. 이것으로 기관의 모든 구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잠시의 틈도 없어. 할아버지는 내가 일극무원결을 거의 완성했음을 알고 있는 게야. 익숙한 환경을 절대 안 주려는 거야. 아니, 그런 호사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이야. 휴~ 여기를 빠져나갈 때까지 잠시도 방심하면 안되겠네. 헌데.. 재밌어.’
무영은 이곳에서는 자신을 지켜볼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미세하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이것은 건방진 것과 다르기 때문에 류심환 아저씨도, 불혼과 도혼 할아버지도 이해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루라도 빨리 최고의 수준에 올라 천상천을 향해, 검강천의 아들이 왔노라고 말하려면 이런 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어차피 이 정도의 난관을 돌파하지 못하면 그 다음은 주어지지 않을 것, 최선을 다해 최대한 빨리 이곳에서의 수련을 끝내리라고 무영은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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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다. 죽어 저승에서도 잊을 수 없는 저곳이다. 거기에 내가 살던 집이 있었다. 무작정 불어가는 바람에 지금은 풀섶 하나 흔들릴 지붕도 없고, 누가 찾아와도 열어줄 싸리문 하나 없다. 거기서 내가 태어났다. 이제는 소각돼 흔적조차 찾기도 힘들지만, 작은 내 방이 있었고, 바로 옆에는 내외의 정이 너무도 아름답던 아버님과 어머님의 더 작은 방이 있었다.
류심환이 자신이 태어난 집 앞에 서있다.
저기다. 삼혼이 빛나는 햇살 속에서 눈부시게 다가와 내게 손을 내밀던 그날의 논밭, 몇 평 안 되는 땅을 갈며 땀을 훔치시던 아버님과 어머님이 하얗게 웃던 그날이었다. 내가 무우 한 조각을 물어 고픈 배를 채우던 순간, 삼혼이 운명처럼 다가와, 찢어지는 가난을 벗어나고 싶어 매일 탈출을 꿈꾸던 나에게, 다른 미래를 제시한 그들을 처음 만난 곳이 바로 저기다.
아이야,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최고가 되지 않으련. 가난만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천하의 혈난을 구하는 단 한 명의 영웅이 되지 않으련. 네가 우리의 손을 잡는 순간, 너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단다. 네가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럴 수 있단다.
그가 부모님이 일하던 황폐해진 그날의 논밭 위에 섰다. 아들아, 따라 가거라. 우리는 네가 잘되면 그것으로 넘치도록 만족하단다. 가서 최고가 되거라. 가난해 밥 한끼 제대로 해주지 못해 너무 미안하기만 했던 아들아.
류심환이 돌아서서 한 곳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아아… 저곳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묻혔다가 태워진 곳이다. 역병에 몇 날을 괴로워하고, 또 몇 날을 숨어 힘들어 했으며, 이 아들이 돌아오기를 얼마나 간절히 기원했을까? 아니, 자신이 돌아오지 않기를 더 간절히 빌고 빌었을, 바로 저곳이다. 저기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피와 고름이 흘렀을 육신이 아비와 어미의 영혼이 재로 흩어져 사라진 곳이다. 임종도 지키지 못한 아들의 불효가 차마 머물지도 못했고, 이 죽일 놈의 운명이 마음조차 놓아주지 않았던, 내 삶의 모든 것들이 함께 묻힌 곳이다.
류심환이 돌아섰다. 그의 눈에서 끝내 한 방울의 눈물도 되지 못한 몇 조각의 습기가 떠돌았다. 그것은 가슴에 묻어둔 채 피조차 흐르지 않게 하여 완전히 썩도록 방치해버린 불효에 대한 속죄의 마음마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비전의 무공을 익혀 최고가 됐음에도 전혀 줄어들지 않는 후회와 죽어서도 스스로 용서하지 못할 불효에 대한 회한이 한 방울의 눈몰로도 속죄할 수 없는 것이었다.
허나 이런 습기에는 한가지 사실이 더 들어 있었다. 그것은 류심환이 확인하려 이곳에 온 이유이기도 했다.
‘여기서도 발견됐어. 그날의 지울 수 없는 흔적이야. 반드시 흔적의 주인을 찾아 그날의 진실을 찾아야 해. 그 진실이 의미하는 것이 지옥이라면, 그 지옥마저 벌할 거야. 그곳이 하늘이면 그것도 베어버릴 거야.’
류심환의 눈에 어렸던 습기가 공기 중으로 사라지며 그의 눈빛은 점차 핏빛을 띄기 시작했다. 그런 변화는 전혀 류심환답지 않았고, 왠지 모르게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억지로 입고 있는, 그런 느낌을 주었다.
‘운명은 지금부터 내가 정한다. 천외천이라 해도 내가 벹 거야.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의 이름으로. 다시 비궁으로 돌아간다, 운명을 비틀기 위해.’
그 뒤로 속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류심환의 연락을 받고 세 명의 아이를 데리고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오늘은 속혼이 화월곡을 떠난 지 일년이 되는 날이었고, 속혼은 핏빛으로 변한 주군의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두려움이기도 했지만, 영원히 떨치지 못할 아픔이었다. 신에 버금가는 능력을 지녔으되, 그것 때문에 단 한 순간도 행복할 수 없는 사람..
‘주군을 위해 이미 버린 목숨, 주군의 선택이 무엇이든 나는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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