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여름

 

 

이 놈의 집구석/ 넌더리가 난다고 했던/ 주말 오후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ㅡ 회사에 다니던, 개인적인 일을 하던 주말 오후는 가족이 모일 시간일 터, 이때 부모님이 언제나 다툼을 벌인다. 힘든 시절의 힘든 상황의 힘든 가정의 전형적인 특징. 그런데 이번주 말 오후에는 부모님이 싸우지 않았다. 그것은 싸움을 여력도 없거나, 더 이상 싸울 필요도 없거나, 이제 남은 것은 결단을 내리는 일만 남은 폭풍전야 같은 경우일 수도 있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끝나기만 기다렸다/ 어머니가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귀를 막았다 ㅡ 오후를 무사히 넘기는 듯했으나 밤에 들어 부모님이 싸움에 돌입한 것 같다. 늘 그렇다. 아이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끝없이 이어지는 감정적이고 소모적이며 언제나 어머님에게 불리한 싸움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언제나 그랬듯이 어미님이 울음을 터뜨렸고, 아이는 귀를 막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므로 해서

 

그 해 여름 어머닌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해서 이룬 게 거의 없었다 ㅡ 어미님은 붕괴 직전의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집안 일이던, 다른 일이던 그것에 지니칠 정도로 매진함으로써 하루하룰 겨우겨우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하지 않아도 될 일들까지 계속해서 했기 때문에 오히려 이룬 게 거의 없는 역설, 그러나 당연한 역설에 빠질 뿐이었다. 

 

슬픈 마음이/ 안 슬픈 마음이/ 될 때까지 난/ 슬플 때마다/ 슬프다고 말했다 ㅡ 슬픔이란 그 바닥까지 가야 반등을 치거나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슬픈 마음이 안 슬픈 마음이 되는 경우란 그런 경우밖에 없다. 슬픔이 일상화된 삶, 그래서 슬플 때마다 슬프다고 말함으로써 그 슬픔이 슬픔으로써 더 이상의 위력을 발휘할 수 없을 만큼 탈진하면 슬픔할 여력도 남아있지 않을까.  

 

나는 동급생들과/ 아파트 단지를 뛰어다녔다/ ㅡ 달리 벗어날 방법이 없기에. 어린 나이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없기에. 할 수 있는 일이란 동급생들과 아파트 단지를 뛰어다니는 것일뿐, 자연과 함께 할 수 있는 공간도 없는 도시에서 그저 아파트 단지만 미친듯이 뛰어다닐 뿐.  

 

자전거를 훔쳐 타고/ 슬프다 슬펐다 언덕을 오르 내렸다/ 페달을 쉬지않고 밟았다 ㅡ 아파트 단지를 뛰어다니다 지쳐서, 삶과 세상, 아버지에 대한 욱한 마음에 자전거를 훔쳐 타고 미친듯이 페달을 밟았다. 슬퍼서, 너무나 슬퍼서, 이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자신의 삶이, 가족의 삶이, 이 빌어놈을 세상이.... 페달을 밟고 또 밟으며 언덕을 오르내렸다.    


옳다고 믿었던 건 옳지 않은 것 뿐이었다/ 슬픈 마음이 안 슬픈 마음이 될 때까지/ 난 슬플 때마다 슬프다고 말했다 ㅡ 옳다고 믿었던 건, 가정에서건 학교에서건 뉴스에서건 책에서건 그때까지의 미숙한 경험에 의해서건 옳다고 믿게 만들어준 모든 것들이 옳지 않다는 것일 알 수 있었다. 부모님의 수없는 싸움에서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이 아니라면. 부모님이 매일같이 싸울 수밖에 없도록 만든 세상,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부모님이 이렇게 매일같이 싸워야 하는 그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면 생각해볼수록 더욱더..

 

어머니도 한 때는 무용수였다/ 난 종종 무대에서 춤 추는 어머니를 떠올렸다 ㅡ 어머님은 전업주부가 되기 위해 자신의 꿈을 접었다. 자식의 교육을 위해서, 그들의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어머님은 꿈을 포기하고 가정을 택했다. 그런데 작금의 현실이란, 그래서 난 어머님이 무디에서 춤추는 것을 종종 떠올리곤 했었다. 그렇게해서라도 어머님의 슬픔을 함께 하고 싶어서. 어머님을 죽도록 사랑하기 때문에. 어머님이 너무나 불쌍해보여서. 

 

어머니는 땀을 뻘뻘 흘리며 팔과 다리를 길게 뻗었고/ 나는 시시한 이야길 지어낸 셈이다 ㅡ 내 상상 속의 어머님은 이사도록 던컨처럼 땀을 뻘뻘 흘르며 팔과 다리를 아름답고 힘차고 우아하게 뻗었다. 상상속의 어머님은 검은백조가 아닌 하얀백조였다. 그러나 어머님의 현실이란, 너무 일해서 거의 이룬 것이 없는 어머님의 하루하루란.. 결국 나는 시시한 이야기를 지어낸 것에 불과했다. 자기만족적 상상이던, 자기기만적 상상이던, 자기도피적 상상이던, 사랑하는 어머님을 위한 대리적인 꿈이었던.. 

 

슬픈 마음이/ 안 슬픈 마음이/ 될 때까지 난/ 슬플 때마다/ 슬프다고 말했다 

 

 

 

https://youtu.be/EukV0oxGp1c  

 

 

https://youtu.be/Cm_pEKLf4-g

  1. 참교육 2021.03.06 07:17 신고

    자본주의가 만든 비극입니다 .
    가난이 죄가 되는 세상입니다.

  2. 영국사는 크리스 2021.03.07 05:49 신고

    저는 마지막 문장이 슬프네요. 슬픔을 슬프다고 말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을 때가 있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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