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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2부 5장 ㅡ 무영과 혜준의 비밀

 

 

 

 

 

 

 

 

“결국, 천상무극진기와 태극무한진기가 하나로 합쳐진 후 그것이 검결로 넘어갈 때 검결의 수만 가지 흐름 중 딱 하나에서 역류가 일어나. 이게 문제를 일으키는 놈이야. 하지만 너무 순간적이라 놈을 잡을 수 없어. 놈을 잡아야 문제를 확인할 수 있는데.. 어쩌지?’

 

 

 

 

무영은 무려 한 달만에 두 진기가 충돌을 일으키게 만드는 원인이 단 하나의 역류에서 비롯됨을 밝힐 수 있었다. 헌데 이를 치료하려면 역류의 원리를 밝혀야 하는데, 역류의 순간이 너무나 짧아 기억 속에 잡히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을 조각내서 단계별 문제들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란 없었다. 시간을 멈추지 않은 한 속수무책으로 역류가 반복되는 것만을 지켜봐야 했다.

 

 

 

 

‘마냥 검결을 운용할 수도 없는 노릇, 어떤 방법이 있을까? 역류가 반복되면서 기혈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어. 순간의 변화를 어떻게 포착한단 말이냐? 아.. 쉽지 않구나. 원인을 찾아놓고 도대체 이게 며칠 째냐. 답답해 미치겠어.’

 

 

 

 

무영은 좀처럼 해답을 찾지 못했다. 그런 시간들이 길어지자 그의 마음은 갈수록 조급해졌다. 류심환과 약속한 육년이 이제 이년 반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직도 두 무공을 완전히 소화해내지도 못했으니, 그 다음 단계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무영은 점점 커가는 초조함을 다스리며, 기발한 방업을 찾아내야 하는 이중의 고통 속으로 빠져들었다. 게다가 일극무원결은 들여다보지도 못했다. 원리를 이해한 것과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데는 수많은 연습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것은 어떤 무인도 초월할 수 없는 시간의 문제였고, 실천의 문제였다.

 

 

 

 

‘휴.. 어떤 방법도 떠오르지 않아. 하.. 이 상태로 가면 일극무원결은 제대로 수련조차 못하겠네. 기본 검결에 걸려 아예 검법을 연습조차 못하니, 이걸 어찌해야 하지? 이러다간 일극무원결의 정수를 아예 익히지도.. 어? 어? 어, 잠깐! 어쩌면.. 그래, 일극무원결이야. 아, 그래, 맞아! 이거야, 바로 이거야! 답은 일극무원결에 있어!’

 

 

 

 

무영은 황소가 뒷걸음치다 개구리 잡듯, 옆으로 센 생각 중에 문제를 풀 수 있는 단초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류심환이 이런 상황을 예상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해준 말이 있었다. 모든 무공 중 극에 이른 것일수록 하나의 원리로 귀결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오의의 정수들을 담아둔 것이 일극무원결의 진정한 가치라고. 일극무원결은 어떤 형태의 무공이라도 그 원리에 반하지 않은 채 더욱 위력적으로 만들어주는 원리들을 담아낸 만능의 보약 같은 것이었다. 일극무원결은 모든 무공의 원리에 적용될 때 가장 큰 힘을 발휘나는 것도 모든 무공의 기원 같은 요소들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래, 일극무원결의 다섯 감각 중 상(想)의 중반부인 투상(透狀)으로 역혈 현상 전체를 잡아낸 후, 시(視)의 후반부인 투원(透原)으로 원리를 근원에서부터 분석하면 역혈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래, 바로 이거야. 그러면 문제를 풀 수 있을 거야. 해보자, 당장.’

 

 

 

 

무영은 다시 파천태극무검의 기본 검결을 운용했다. 이번에도 당연히 두 진기가 충돌하며 역혈이 일어났다. 순간 단전에서 두 진기가 일어나 서로를 향해 맹렬히 달려들어 전력으로 충돌했다. 무영이 역혈이 일어나는 것을 방치한 채 투상과 투원을 동시에 펼쳤다. 온몸에 엄청난 통증이 몰아쳐 왔지만, 무영은 단전을 최대한 열어놓은 채 투상에 의해 역혈이 일어나는 그 찰나 지간의 변화들을 놓치지 않고 투사하는데 성공했다. 그러자 그 동안 역혈을 일으켰던 모든 현상들이 시상의 표면에 뚜렷하게 각인됐다. 무영은 이어 투원으로 각인된 현상들을 재빨리 들여다봤다. 순식간이었지만, 역혈의 원리들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무영은 무엇이 문제인지 볼 수 있었다. 동시에 시상의 표면에 각인된 것들이 일제히 사라졌다. 그러나 기억은 남았다.

 

 

 

 

‘역혈은 천상무극진기가 원인이었어. 태극무한진기와 상극의 흐름을 보여야 기본 검결을 운용할 수 있는데, 나는 천상무극진기 중에서 무엇에도 역행하지 않는 순(順)의 흐름을 보냈던 거야. 그 때문에 상극의 흐름으로 시작되는 기본 검결의 운용이 문제를 일으키며 그 다음 단계를 아예 불가능하게 만든 거야. 어떤 기와도 충돌하지 않고, 그 기의 원리까지 포용하는 천상무극진기의 최고 경지의 순(順)을 보냈던 거야. 그래서 기본 검결의 바탕인 태극무한진기와 상극을 이루지 않아, 오히려 역혈을 일어났던 거야. 둘은 닮았지만 상극의 기운이라는 것을 깜빡했어. 진기까지 인간처럼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주체인 내가 진기에 지배됐던 거야. 깨달음은 주체의 몫, 이젠 수단인 천상무극진기의 정수인 순의 기운을 역으로 돌려놓으면 기본 검결을 운용할 수 있어. 그러면 상극의 검결을 동시에 운용할 수 있고, 일극무원결의 도움을 받아 하나로 합칠 수 있어. 류심환 아저씨는 이미 이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

 

 

 

마침내 문제의 원인을 밝혀낸 무영은 기본 검결 상의 문제들을 하나씩 잡아나갔다. 역혈의 문제만 잡으면 한층 상승된 파천태극무검을 완성할 수 있으니, 이는 천상무극진기의 상승으로 이어진다. 그 두 개의 상승효과를 하나로 합쳐 천상귀원검으로 녹여 내거나, 둘을 하나의 연환식으로 펼쳐, 합공의 위력을 갖게 하면 그런 경지의 무공이란 고금제일이라 할 수 있다. 그 이후로는 뜻하여 이루지 못할 것이 천하에는 없을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무영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깨달음을 공고한 경지까지 끌어올리는 작업에 속도를 높였다.

 

 

 

 

‘정말로 천상천은 가까워졌어. 아버지와 어머니의 복수를 할 수 있는 날이 이제 멀지 않았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 역천이 얼마나 큰 죄인지, 검강인과 금미령에게 뼈저리게 보여줄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라.’

“검강천의 아들, 나 검무영이 너희들을 찾아갈 테니!”

 

 

 

 

무영은 천상천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니 없던 생기도 일어났다. 참혹했던 부모님의 마지막 모습도 떠올랐다. 허나, 예전 같았으면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영혼을 갉아먹는 심적 고통을 느꼈을 무영이 지금에는 그러하지 않았다. 확신이 자리했기 때문이며, 그만큼 성숙해졌기 때문이다. 무공은 깊어질수록 인간의 마음도 정화시키는 작용을 했다.

 

 

 

 

물론 사파의 무공은 이와 정반대의 역할을 한다. 무영은 아저씨와 할아버지들, 친구들의 도움을 받으면 천상천도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 섰다. 그것이 무영에게 여유를 주었고, 복수에 대한 조급함을 덜어주었다. 이는 무공의 빠른 증진에도 도움으로 작용했다. 무영은 이제 진정한 절대 고수의 반열에 들어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아저씨는 참 대단해. 이런 과정을 다 거쳤을 텐데 내색 한 번 않다니.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려 이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그래, 내가 본받을 것이 그거야. 자신이 한 말과 약속을 철저히 지키고 반드시 이행하는 것. 그래, 아저씨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자. 아저씨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결과를 이루어내자. 헌데… 삼혼과 삼영은 잘하고 있을까? 보고 싶어. 벌써 몇 년이냐? 아, 그리고 이제는.. 어엿한 숙녀가 됐을.. 혜준이도.’

 

 

 

 

무영은 삼혼과 삼영을 떠 올리며 그 끝에 혜준도 떠올렸다. 그녀의 눈부신 미소가 떠오르자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이곳에는 삼년 내내 무영만 있었지만, 혜준만 떠올리면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으흠! 험!”

 

 

 

 

무영은 공기라도 자신의 마음을 보는 것 같아 헛기침을 해본다. 참 이상도 하다. 이렇게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뛰고 볼이 뜨거워지는 것이. 혼자 있으면서도 주위를 둘러보게 되고, 이렇게 헛기침이라도 해야 창피한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 참 이상도 하다. 하지만 정말 보고 싶다, 혜준이가.

 

 

 

 

 

 

“혜준아, 고집부리지 말고 내 말을 따라라. 어서!”

 

 

 

 

한 사람, 천상천 오장로(五長老) 천상무영원혼지 위재영이 혜준에게 소리쳤다. 그는 혜준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싫어요. 저 이제, 고 사숙조의 무공과 세 분 사숙조의 무공까지 모두 익혔어요. 그것들을 하나로 합친 탈천화령검결(奪天花靈劍訣)도 이제 완성단계에 접어들었고요. 헌데 갑자기 왜, 위 사숙조의 내공을 제가 받아야 해요? 왜 그래야 하는 데요? 전 싫어요, 죽어도 그렇게 할 수 없어요.”

 

 

 

 

혜준은 위재영의 요구를 강하게 거절했다. 사숙조의 내력을 받을 수 없는 일이다. 위 사숙조가 자신의 내공을 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러면 위 사숙조가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더 받을 수 없다. 혜준은 완강하게 거절하며,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았다.

 

 

 

 

“혜준아, 이는 네가 좋고 싫고, 그런 것에 따라 결정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잖니? 돌아가신 검강천 천주를 생각해야 하고, 우리를 탈출시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네 할아버지인 대장로님과 고지천 차장로님, 열명의 호법들과 내궁 소속 천인들의 한결 같은 뜻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어? 게다가 무영 도련님이 무공을 대성해 나올 때, 너도 준비가 돼 있어야 작은 힘이라도 되지 않겠어? 이건 운명과도 같은 거야. 혜준아, 이제 이 늙은이의 부탁을 들어다오. 제발 고집을 꺾고 무영 도련님이 천상천을 되찾는데 도움이 돼 다오.”

 

 

 

 

오늘은 위재영도 물러날 생각이 없다. 소천주 무영을 위해서는 혜준의 무공이 죽은 대사형의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그것도 천상천의 무공 외에도 다른 문파의 무공도 익혀야 한다. 류심환이 제시해 준 방법대로 하려면, 그것을 이루려면 기본적으로 살아남은 세 명 장로의 내공이 필요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오늘은 장장 육 개월을 끌어온 혜준의 고집을 꺾어야 했다. 천상천을 검강인에게 뺏긴 이래 자신들의 삶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무공이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간다 한들 억울할 것도 없다.

 

 

 

 

“싫다고 했잖아요. 위 사숙조(師叔祖)가 뭐라고 해도 전 받지 않아요. 제 마음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무영 오빠도 받지 말라고 할 게 분명해요. 그러니 사숙조님도 포기하세요.”

 

 

 

 

혜준은 미인의 표본 같은 예쁜 얼굴을 찡그리며 완강히 거부했다. 현재의 상태만으로도 혜준은 거의 완벽한 미인의 반열에 오를 만큼 물이 올라 있었다. 그러면서도 순수한 느낌을 주는 인상은 백미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슬픈 표정으로 강하게 거부하니 차마 말을 꺼내는 것조차 망설여질 정도였다.

 

 

 

 

‘죽음은, 더 이상의 죽음은 저는 싫어요. 이 정도로도 넘칠 만큼 많아요. 더는 싫어요.’

 

 

 

 

위재영은 고집을 꺾지 않는 혜준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더 이상 미룰 여유가 없었다. 오늘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혜준의 고집을 꺾고 내공을 전달해야 한다. 너무 오랫동안 혜준의 고집에 끌려왔기 때문에 시간이 부족했다.

 

 

 

 

‘결국, 이 말까지 해야겠구나. 허허, 대사형 죄송하외다. 내 오늘은 이 말까지 해야 할 것 같아요. 죄송하외다.’

“혜준아, 대사형이 왜 천주의 탈출을 따라가지 않고 비궁에 남았는지 아느냐?”

“…? 무슨 말이에요? 그게?”

 

 

 

 

사숙조의 말에 혜준은 크고 빛나는 보석 같은 눈망울에 의문을 가득 떠올렸다. 너무나 맑고 투명해 때로는 슬픔마저 느껴지는 혜준의 눈동자에 의문이 떠오르자 위재영은 자신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순결함이 주는 아련한 아픔 같은 것이란, 도대체가! 하지만 오늘은 끝장을 봐야 했다. 단 한 치의 물러섬도 용납할 수 없었다.

 

 

 

 

“혜준아, 내가 무슨 말을 하던 끝까지 들어야 한다. 알았지?”

“…”

 

 

 

 

혜준이 말없이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그녀의 눈망울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위 사숙조가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말했다. 부모님이 내궁의 일로 집에 들릴 틈이 거의 없어 자신은 주로 할아버지와 시간을 보냈다. 혜준에게 할아버지란 부모와 같은 존재였다. 헌데, 위 사숙조가 할아버지의 죽음에 어떤 뜻이 있다고 말했다. 본능적으로 혜준은 다음 얘기가 두려웠다.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꺼내기만 하면 참을 수 없는 그리움에 하염없이 눈물만 흐르게 만드는 할아버지의 죽음이었거늘, 위 사숙조가 할아버지의 죽음에 담겨 있는 숨은 뜻을 말해주겠다고 한다. 혜준은 불안함을 감추지 못한 채 위재영의 입술이 만들어내는 소리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무조건 끝까지 들어야 한다. 그렇게 알고 말하마. 소천주와 너는 한 가지를 공유하는 것이 있단다. 이는 검 천주와 장로들만 아는 사실인데, 그 시작은 십오 년 전 무영 도련님이 태어났던 그날이었어.”

 

 

 

 

위재영이 하나의 비사를 얘기했다. 그것은 그녀와 소천주 무영에 관한 태생적 비밀이었고, 대장로인 혜준의 할아버지가 죽음을 선택한 이유에 대한 얘기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아, 그런 일이 있었다니. 오빠와 나 사이에 그런 인연의 끈이 있었다니…”

 

 

 

혜준은 위 사숙조가 한 말을 다 듣자 탄성부터 질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무영 오빠와 자신은 태생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자신의 몸은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다. 자신은 무영과 영육 양 면에서 반드시 통해야 하는 운명으로 엮어 있었다. 그것만이 무영 오빠가 선천지체가 아닌 정기신일체(精氣神一體)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며, 할어버지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혜준이 본능적으로 두려워했던 것은 틀리지 않았지만, 그 이상의 것들이 할아버지의 죽음에 담겨 있었다. 이를 따르자니 더할 수 없는 슬픔이지만, 따르지 않으면 그보다 더한 슬픔을 자신과 무영, 할아버지들이 감당해야 한다.

 

 

 

 

“위 사숙조, 받을 게요. 받을 게요. 미안해요, 죄송해요. 받을 게요.. 흑흑흑흑!”

 

 

 

 

혜준은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가만히 있어도 그 고운 눈망울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천상천을 다시 세워 천주의 자리에 오를 무영 오빠를 위해서라도 받아야만 했다. 그래야 돌아가신 검강천 천주도, 할아버지 대 장로 심윤환도, 차 장로 고지천도, 열 명의 사숙과 궁인들의 죽음도 다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선택의 여지란 없었다.

 

 

 

 

“혜준아, 마음을 진정시켜라. 이제 시작해야 하니, 지금부터는 세상의 모든 연을 다 잊어야 한다. 지금은 너와 내가 하나가 돼야 한다. 명심해라, 이것은 두 번 할 수 없는 일이니, 그 행함에 있어 추호의 감정의 개입도 있어서는 안 된다. 엄중함이 태산 같아야 하니 너도 추호의 틈도 드러내선 안 된다. 너도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자, 준비됐으면 시작하겠다.”

 

 

 

 

‘혜준아, 너는 네 손녀와 다름없어.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데. 너에게 내 내력을 줄 수 있어 기쁘기 한량없고, 소천주 무영 도련님께 도움이 되니 그 또한 기쁘지 않겠느냐. 죽은 사형들과 숙질들, 내궁 식솔들에게 최소한의 용서라도 구할 수 있으니 이 또한 즐겁지 않겠느냐. 부디, 탈천화령검결을 완성해 너 또한 무영 도련님처럼 정기신일체로 거듭나길 바랄게. 사랑한단다, 혜준아.’

 

 

 

 

혜준은 자신의 몸속으로 위 사숙조의 내력이 흘러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평생을 바친 위 사숙조의 내력은 장강의 물결처럼 거대하고, 그 안에는 수많은 생명들이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넉넉하고, 누구도 행복함을 느낄 만큼 부드러웠다.

 

 

 

 

위재영의 내력이 혜준에게 넘어가자 그녀의 후단전에 머물러 있던 대 장로와 차 장로의 기정, 그리고 자신만 알고 있었던 검강천 천주의 기정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역천의 날에 검강천이 혜준의 내부에 서둘러 주입했던 비밀의 기정이었다. 혜준도 그제야 검강천이 남긴 기정이 자신의 몸에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천주님.. 천주님..’

 

 

 

 

혜준은 운기조식에 집중해야 했지만 그녀의 무의식은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혜준은 여기까지 흘러온 천상천이 생각나서 울었다. 자신을 위해 이미 무공의 반을 주고, 그것도 모자라 목숨까지 바친 할아버지가 그리워서 울었다. 고 사숙조의 희생과 열 명 호법과 무엇보다도 검 천주의 배려 때문에 울었다. 자신에게 내공을 주고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갈 위 할아버지의 희생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에 한없이 울었다. 검 천주의 자식 사랑 때문에 울었고, 무영 오빠와 이루어야 할 일 때문에 울었다. 무영 오빠와 꼭 그렇게 맺어지지 않아도 서로 사랑할 수 있길 바랐기 때문에 울었다.

 

 

 

 

“그래, 혜준아. 꼭 무공을 대성해서 무영 도련님에게 힘이 되거라. 나와 네 할아버지, 호법들과 검 천주님까지 우리 모두의 한결 같은 소망을 생각하거라. 그리고…”

‘꼭, 무영 도련님과.. 잘.. 맺어져라. 부디, 무영 도련님과..’

 

 

 

 

그는 마지막 말을 다하지 못했고, 생각 속에서도 끝내 다하지 못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내공을 모두 혜준에게 주입시킨 후 혜준의 등에 손을 댄 채 깊은 숙면의 세계로 접어들었다. 혜준은 눈을 타고 흘러내리는 그 하염없는 눈물이 상의를 다 젖게 할 때까지 가부좌를 튼 상태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사람은 평범한 노인으로 돌아갔고, 한 젊은 소녀는 절대무인의 경지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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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최종 지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군. 컬! 그래야지, 그래야 재미있지. 일환!”

 

 

 

 

하나의 떠 있는 눈이 말했다. 제천이다. 그가 일환을 불렀다. 이번에도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삼환은 사지를 부복의 자세로 그의 앞에 엎드리고 있었다.

 

 

 

 

“소신 일환, 대령했습니다, 제천님.”

“판을 키운다. 일소빙혈사(一笑氷血死) 설지연을 깨우고 빙혈천마의 후인도 금제를 푼다. 그들을 완전히 자유롭게 풀어준다. 실시하라.”

 

 

 

하나의 떠 있는 눈, 제천이 명했다.

 

 

 

 

“존명! 제천님!”

 

 

 

 

일환이 소리와 함께 또 사라졌다. 당연히 그 자세, 그대로다. 헌데… 이는 또 무엇이란 말이냐. 제천이 말한 자들은 무림 사대(四大) 혈사의 주인공 중 두 명이며, 검강인이 천에게 말했던 각각 칠백년 전과 오백년 전에 천하를 피를 물들였던 두 절대마인 아닌가. 그들을 깨운다니,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들이 죽은 것이 아니란 말인가? 설지연을 깨우고, 빙혈천마의 후인의 금제를 풀라고 하니, 그들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고 있단 말인가?

 

 

 

 

“컬! 류심환의 성취가 보통이 아니야. 세외문 놈들도 간이 배 밖으로 나왔고. 검강인과 진무결도 생각한 대로 절정의 반열에 올랐고, 컬! 무영이란 놈.. 지 아비보다 더 뛰어나지만 아직까지 큰 변수는 아니야. 컬! 재미있겠어. 재미있겠어.”

 

 

 

 

천년 무림을 자신의 뜻대로 주물러온 이 절대 문파의 수장인 제천의 능력은 대체 어디가 끝이란 말인가? 류심환부터 무영까지, 천년 무림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제천이란 자의 능력이 가능하기라도 하단 말인가? 도대체 천년 음모의 주재자인 제천의 실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음모는 음모를 먹고 자란다. 그렇게 먹고 먹힌 음모들만 무려 천년을 이어왔다. 그 깊이와 넓이를 누가 감히 짐작이라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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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무영의 성취가 어디까지 이르냐가 모든 것을 결정할 거야. 무영이 내가 원하는 수준에 이른다면 천년 음모의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을 거야. 그의 주변에서 내가 지금까지 파악하지 못한 움직임들이 미약하게나마 잡히고 있어. 하나의 비밀과 하나의 거짓 이상의 것들로 보이는 그런 움직임들이.’

 

 

 

 

류심환은 비궁에서 제천과 비슷한 형태로 무림 전체를 살펴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비궁을 찾은 이유 중에는 제천을 감시하는 것이 포함돼 있는 것은 분명했다. 류심환은 무영처럼 천상지무와 파천태극무검을 하나로 합치는 일과 일극무원결을 극대화하는 것 이외에 무엇인가 별도로 하고 있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제천과 관련된 것으로 보였고, 어쩌면 세외문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떤 것도 가능하다고 봐야 해. 모든 것에 열려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거야. 모든 가능성을 변수로 두는 것은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상황이야. 내가 준비해둔 안배들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까? 하나라도 어긋나면 천년의 주재자를 처리할 수 없을 텐데, 세상일이란 것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최후의 1푼은 인간의 한계를 넘는 일로 비워둘 밖에야. 뜻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라자. 무엇보다 무영의 성취가 중요해. 결국 이 모든 것이 중심에는 무영이 있어. 그가 짊어져야 할 짐의 무게가 너무 크지만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그 무게를 최대한 줄여주는 일에 전력하는 수밖에. 검강천, 당신이 파악한 것들이 진실에 가깝기를 바라야지. 나 또한 당신이 파악한 것에 기초해 이 모든 일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