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적이던 주관적이던 최고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특징은 무심코 던진 말이라도 자존심과 체면 때문에,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지키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는 속담도 비슷한 사례들이 쌓여서 나온 것이다. 말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행동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에 높은 지위의 사람들은 말 한 마디에도 신중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물며 천년 동안 무림을 주재해왔다고 자부하는 자의 자존심과 자기 확신이란 측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강할 터였다. 류심환은 상대의 능력이 자신의 생각보다 높은 것에 가슴이 서늘해졌지만, 그렇다고 절망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천년의 주재자가 직접 움직일 만큼 자신의 능력을 경계한다는 뜻이었고, 이는 무영이 자신이 안배해둔 것들을 모두 취한다면 천년의 주재자와 맞설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안배가 남았어. 저 자의 감시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으니, 계획을 바꿔야 해. 저 자의 약점은 단 하나니 일단 그걸 파고들면서 다음을 생각해보자. 무조건 시간을 벌어야 해.’
류심환은 생각을 정리한 후 세 번째 질문을 던졌다. 이것이 먹혀야 다음이 있을 수 있었다.
“진실.”
“...?”
“...”
“...........?”
류심환은 ‘진실’이라는 딱 한 마디만 하고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심리전에 들어간 것이었다. 마지막 안배를 이곳에서 하려면 자신이 말하는 시간을 최소화하고 상대가 길게 말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러려면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리면서도, 그를 속인 유일한 인물인 자신에게 천년을 주재해온 것들을 장황하게 늘어놓도록 만드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 생각했다.
비록 상대는 천년을 주재한 것을 가장 자랑스러워할지언정, 그 긴긴 세월 기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상상 자체가 불가능한 고독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류심환은 상대가 천년의 주재자라 해도 신이 아닌 이상 배후의 절대자로 살아왔던 욕망의 출발점에 그의 약점이 있으리라 판단했다. 그는 그것을 건드리면 천년에 걸친 그의 고독 속에 축적됐을 천년 무림의 역사가 봇물처럼 터져 나올 것이라 생각했다. 천년의 모든 것, 무림의 진짜 역사를 그 혼자 지니고 있기에는 미치도록 말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리고 천년의 진실이 남아 있어. 그게 너의 진짜 욕망이겠지. 기의 형태로 천년을 존재했다 한들, 무림역사에 개입해왔다는 건, 넌 언제나 인간이었다는 뜻이야. 미치도록 무림에 현존하고 싶은, 그런. 넌 욕망 그 자체야. 폭발 직전의 욕망!’
“진실? 무슨 진실?”
제천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류심환에게 물었다. 생각 같아선 단 칼에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류심환이란 존재가 그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제천은 천년의 전설을 매듭짓기 위해 류심환에게 취할 것이 있었다. 그래서 제천은 류심환과 최대한 오래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헌데, 달랑 진실이라니?’
“무슨 진실을 말하는 것이냐?”
‘너의 비밀. 천년을 기의 형태로 버텨온 것 뒤에 숨겨져 있던 바로 그 비밀. 너를 처음 봤을 때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된 너의 비밀. 천년의 주재자로 보낼 수 있었던 진정한 하나의 거짓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단 하나의 진실, 그것 말이야. 내가 준비한 최후의 안배가 잘못 됐음을 알려준 것, 그래서 최후의 안배를 수정할 수 있게 만들어준 것, 너라는 존재의 비밀, 이제야 깨닫게 된 단 하나의 천년의 진실 말이야.’
류심환이 제천의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생각을 이어가자 하나의 떠 있는 눈의 주변에서 급격한 파장이 일어났다. 그것은 하나의 떠 있는 눈이 일으킨 느닷없이 생긴 회오리바람이 일으키는 파장 같았지만, 류심환은 그 너머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제천이 이곳에 떠 있는 하나의 눈이면서도, 무림 전체를 볼 수 있는 모든 떠 있는 눈이 될 수 있는 존재의 근원을 볼 수 있었다. 천년의 진실은 바로 그것이었고, 그래서 류심환은 떠 있는 하나의 눈을 조금 더 속일 필요가 있었다.
“지난 천년 무림의 실체적 진실.”
“실체적 진실?”
“그래, 실체적 진실. 네가 주재한 진짜 무림의 역사 말이야.”
“클클. 그게 알고 싶었던 게구나. 좋아, 좋아. 내 말해주.”
“거짓부터 시작해야지. 이름도 밝히고.”
류심환이 제천의 말을 중간에서 잘랐다. 그것은 격장지세였지만, 스스로 신이라 여기는 자에게는 효과적이었다.
“이 버러지 같은 놈이 내 말을 잘라!! 내가 말하면 넌 그냥 듣기.”
“이름부터 말해. 그냥 떠 있는 눈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무것도 아니라고? 천년을 주재해온 내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름이 없으면 존재도 없는 법이지. 네가 천년의 무림을 주재했다고 해도 넌 비존재였을 뿐이야.”
“비존재??”
하나의 떠 있는 눈, 제천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쩌면 류심환이 말한 비존재가 자신의 천년을 말해주는 것으로는 가장 적절할 듯싶었다.
“어디에나 있으면 아무 곳에도 없는 것이지. 넌 비존재일 뿐이야. 너의 세상에 갇혀 천년을 허송세월한. 그래서 측은해, 너의 삶이.”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삼혼 할아버지, 이제 출발하죠.”
무영이 천상천의 진정한 주인만이 지닐 수 있는 승천제마검을 집어 들며, 삼혼에게 말했다.
“그래, 늦기 전에 도착해야 하니.”
불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무영에게 답했다.
“부처님, 살생의 길로 접어든 저를 이해해주십시오. 최대한 적게 죽이겠습니다. 뭐, 실수로 몇 명 더 죽였다고 윤회에 가두거나 그러지지 마시고요. 나무아미타불.”
도혼이 복마도장을 집어 들며 말했다. 무림에 다시 나가 마음 놓고 싸울 수 있게 됐으니, 온몸이 근질거려 미칠 지경이었다.
“얘들아, 너희들을 능력을 마음껏 펼칠 때가 왔구나.”
속혼이 탈명비도를 챙기며, 삼영을 향해 말했다.
“저희야 그냥 이끌어주시는 대로 할 뿐이죠.”
준영이 한성과 철용을 대표해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영이 출발하자고 말했을 때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 한성과 철용은 이미 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철용아, 항상 조심해야 해. 상대는 만만한 놈들이 아니니까.”
“한성 형, 걱정하지마. 내 몫은 꼭 할 테니까.”
철용이 무림으로 나가는 문을 열었다. 이제 천년 무림을 제 자리로 돌려놓으리라. 철용이 문을 열며 다짐했다.
“검강인, 내가 간다. 받은 것 이상으로 돌려줄 테니, 기다려라.”
아버님, 어머님, 이제 제가 갑니다. 못난 아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아들이 이제 갑니다. 지켜봐주세요.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2부 12장 - 삼혼의 달라진 모습 (2) | 2014.10.04 |
---|---|
제2부 11장 - 무영, 종남파를 위기에서 구하다 (2) | 2014.09.29 |
제2부 9장 ㅡ 류심환과 제천의 대면 (10) | 2014.09.26 |
제2부 8장 - 무영, 삼영의 깨달음을 이끌다 (2) | 2014.09.23 |
제2부 7장 ㅡ 무영, 삼혼에게 새 삼혼지문 깨우쳐 주다 (2) | 2014.0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