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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제11장 - 확월곡의 정상에서



무영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반 시진을 쉬었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오늘은 한 번도 멈추지 않을 거야!”

 

다시 출발선에 선 그가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지난 일 년 동안 그는 팔과 다리, 허리에 철환(鐵環)을 두른 상태로 하루 여섯 시진 동안 몸을 단련했다. 처음에는 걷는 동작 하나에도 팔이 저렸고 다리가 끌렸으며, 무릎과 발목에 피로가 쌓였고, 허리에 충격이 가해졌다. 당연히 걷는 일 이외의 다른 것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무영은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걸을 때 팔을 확실하게 흔들었고 다리도 보폭이 줄어들지 않도록 집중하고 주의하며 걸었다. 첫 날에 그는 삼백여 보(步)를 걸은 후 쓰러졌고 다시 일어나 몇 십 보 더 걸어간 뒤 완벽하게 탈진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는 불혼에 의해 그 상태 그대로 모옥으로 옮겨졌고 불혼의 품에서 이미 잠에 골아 떨어졌다.

 

 

물론 자는 동안에도 무영은 철환을 풀지 않았다. 숙면을 취하는데 불편함이 있었지만 빠른 적응을 위해 한시도 자신의 몸에서 철환을 풀지 않았다. 자신이 이루려 하는 것은 인간이 오를 수 있는 맨 꼭대기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작은 것도 극복하지 못한다면 고금제일인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걷다가 탈진한 채 쓰러져 그 자리에서 잠들지라도 철환은 자신의 몸에 그대로 있어야 했다.

 

 

‘이제 시작을 뿐이야. 이 정도는 아직 아무 것도 아니야.’

 

 

철환을 두른 채 잠든 다음 날 아침, 무영이 잠에서 깨어 끊어질 듯 저리는 팔과 다리, 허리를 문지르며 마음속으로 또다시 다짐했다. 그는 매일 아침 그의 눈가에 빛나는 해살에, 깊은 밤에 잠들 때 스르르 감기는 눈에 걸린 몇 가닥 달빛과 별빛에 다짐하고 다짐했다.

 

 

무공수련 과정 중 불혼 할아버지와 나누는 장난스러운 말과 투정에도 어린 무영의 아픔이 숨겨져 있었다. 무영은 가슴 속에서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죽어 있는 아버지가 그리움의 이름으로 떠오르려 할 때면 불혼에게 실없는 말이라도 던졌다. 억누르고 억눌렀던 그날의 기억들이 튀어나올 것 같으면 불혼에게 투정을 부렸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 복수에 대한 끝없는 갈증과 초조함, 그러면서도 당장 지금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때 없이 올라와 자신을 가만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 일각도 복수를 잊은 적이 없어. 내게서 그것을 빼면 나는 없는 거야. 복수의 그날까지 나는 없고 무공수련을 먹고 사는 괴물만 있어. 십 년 아니, 백 년이 걸린다 해도 반드시 내 손으로 원수들을 처단할 거야.'

 

 

이제 이런 다짐은 무영의 주문이 됐다. 일곱 살 아이의 가슴에서 자라는 시뻘건 검이 되고 시퍼런 도가 됐다. 꿈에서든 상상 속에서든 원수의 피가 묻어 흥건해져야 비로소 잠이 드는 검의 울음이 됐고 도의 살의(殺意)가 됐다. 그는 무서울 정도로 집중했고,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의 마음속에 복수라는 감정이 검붉게 쌓여만 갔다.

 

 

‘최대한 빨리 최고가 될 거야.’

 

 

 

철환을 두른 그 다음 날에 그는 삼백오십 보를 나갔고 한 번 일어나 다시 오십 보를 더 걸었다. 그는 물먹은 한지처럼 탈진하여 땅바닥에 퍼져 버렸고 당연히 불혼에게 들려져 가옥으로 옮겨졌다. 그것으로 그대로 골아 떨어졌음은 첫 날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손과 발, 허리가 끊어질 듯한 고통에 견디기 힘들었지만 하루하루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 만큼 복수는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고 가슴 속으로 칼을 갈았다.

 

 

그렇게 한 달을 수련하자 무영은 일 리를 걸어가도 별로 힘들지 않았다. 일정한 속도로 팔을 흔들 수 있게 됐고 다리의 보폭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눈에 띠게 걸음이 빨라졌다. 다시 한 달이 흐르자 무영은 일 리를 달릴 수 있었다. 철환을 두른 채 걷기 시작한 첫 날처럼 그는 수없이 넘어지기를 반복했지만 그때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툴툴 털고 일어나 반드시 남은 거리의 두 배를 더 뛰었다.

 

 

그것도 한 달이 또 흐르자 무영은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일 리를 달릴 수 있었고 그런 후에도 또 일 리를 달렸다. 그가 탈진해 쓰러지는 것도 사라졌다. 처음에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무영의 지독한 복수심과 거기서 자라는 독기에 의해 하나씩 현실이 됐다. 팔과 다리에 힘이 붙기 시작했고 허리는 이를 견뎌냈으며, 무릎과 발목에 피로가 쌓이지 않았다. 몸이 솜처럼 땀에 절 때까지 달려도 한 시진 정도를 쉬면 기력을 회복해 다시 달릴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무영의 호흡도 안정되고 길어졌으며 심장박동도 규칙적이며 줄어들었다. 무영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사이에 몸은 단단해지고 체력은 점점 강해졌으며 호흡은 일정하게 유지됐다. 그의 몸에 기초토납법의 일부가 자연스럽게 배기 시작했다. 심법을 본격적으로 수련할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 시점부터 무영은 불혼의 지시에 따라 달리는 것 이외에도 매일 오백여 장 높이의 화월곡을 오르게 됐다. 일리를 전력으로 달린 후 반 시진 쉬고, 다시 일리를 달린 후 한 시진의 휴식이 주어졌고 그 다음에 화월곡을 오르기 시작했다.

 

 

화월곡은 수직에 가까운 까닭에 평지에서와는 달리 무영은 철환을 풀고 절벽을 올랐다. 막상 그가 철환을 몸에서 풀자 팔과 다리가 그렇게 가볍고 편할 수 없었으며 허리는 어떤 자세에서도 무게중심을 유지했다. 그것만이 아니라 자신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의 힘이 붙었다.

 

 

화월곡을 오르는 첫 날에는 몸을 끈으로 묶어 안전장치를 한 상태에서 삼십 장을 올랐는데 그 동안 강해진 팔과 다리를 사용해, 몇 개의 튀어나온 돌과 절벽 사이의 틈새를 이용해 거침없이 올라갈 수 있었다. 무영은 많이 힘겨워 했지만 그 속도와 안정성이 불혼의 예상을 뛰어넘고도 남았다. 철환을 착용한 채 그가 했던 수련이 이곳에서도 효과를 발휘했다.

 

 

‘도대체 이 아이의 발전 속도란.. 좋아, 일정을 앞당겨 보자.’

 

 

불혼은 그의 속도가 예상을 뛰어넘자 십오일로 예상했던 날짜보다 오 일이나 앞당겨 화월곡을 오르는 높이를 십 일마다 두 배로 늘렸다. 그마저도 무영이 거뜬히 해내자 그 다음에는 오 일 간격으로 올라갈 높이를 다시 두 배로 늘렸다. 아울러 무영이 하루에 오르는 높이가 사백 장에 이르렀을 때 그 지점부터 절벽은 지면과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그는 손의 힘으로만 절벽을 올라야 했다.

 

 

허나 그런 정도의 난이도는 무영에게 절벽 곳곳에 핀 잡풀에 눈이 찔리는 정도의 방해거리도 되지 못했다. 그의 하루하루가, 순간순간이 놀라운 발전으로 이어졌고 그 발전은 곧바로 무영의 변화로 이어졌다. 한 마디로 그의 성장은 갓 시위를 떠난 화살 같았다. 철환을 풀고 오르기 시작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계곡을 오르는 것은 달리기와 달라 긴장의 강도가 높았고 추락에 대한 두려움도 떨칠 수 없었지만 이제 그것마저 그에게는 지겨운 감정이 됐다.

 

 

처음 손에서 돌부리를 놓쳐 십여 장을 수직으로 떨어져 절벽에 부딪쳐 튕겨진 후 끈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와중에도 무영은 자신이 실수한 곳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에게 두 번의 실수란 용납되지 않았고 그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수련 도중에 벽에 손가락을 낀 채 흘러내리며 손톱이 부러지고 발이 삐기를 수십 차례, 손목이 돌아가고 발을 헛디뎌 추락해서 갈비뼈에 금이 가고 발목이 부러질 듯 뒤틀려도 그는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의 눈에선 실수한 곳만 직시했고, 떨어진 거리만큼의 자책과 다시 실수하지 않겠다는 독기 어린 다짐만 그의 뇌리에 가득했다. 그의 요구에 따라 무영이 하루에 오르는 높이가 이백십 장에 이르게 된 날부터 몸에 묶은 끈마저 풀었다. 위험은 극도로 높아졌지만 그는 끈을 묶은 상태에서 계속 오르는 것은 집중력에서 차이가 난다고 판단해 불혼에게 끈을 풀 것을 요청했고, 끝까지 고집해 허락을 받아냈다.

 

 

물론 그가 떨어진다 해도 불혼이 있으니 죽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무영의 의지가 그랬다. 죽을 각오로 오르겠다는 것이었고 불혼도 그 순간만큼은 그의 독기에 놀라 온몸의 피부에 잔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독기라는 것은 어린 그에게 마음의 그늘일지는 모르지만 몸에는 보약이었고 불혼도 무영의 오기(傲氣)를 말릴 이유가 없었다. 마음이 성장할 기회는 얼마든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육체의 발전에만 집중하자. 정신은 육체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므로, 지금은 무영의 복수심을 걱정할 때가 아니야.’

 

 

그렇게 시간이 물 흐르듯 지났고 한 달 전부터 무영은 매일 화월곡의 정상까지 오를 수 있었다. 무영은 화월곡 정상에 오른 순간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처음 화월곡 정상에 올라 두 발로 섰을 때, 한껏 들이킨 공기의 청명함이란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이었다. 무영의 영혼에 푸른 희망을 안겨준 최고의 선물이자 큰 산 하나를 넘었다는 성취에 대한 뿌듯함이기도 했다.

 

 

들이킨 공기는 가쁜 호흡 때문에 곧바로 자신의 몸 밖으로 나갔지만 그 순간의 가슴 뚫리는 시원함이란 무영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일곱 살, 그 어린 날의 첫 희열이었다. 그런 기분으로 내려다본 화월곡 안의 풍경은 얼마나 작았던지. 또한 처음 바로 본 화월곡 밖의 풍경이 얼마나 넓고 무한히 펼쳐져 있었던지.

 

 

‘저 너머 어디엔가 천상천이 있을 것이다.’

 

 

바로 그 순간, 불혼이 죽어서도 잊지 못할 무영의 말이 그의 작은 입술 밖으로 흘러나왔다. 중얼거리듯 무영이 나직하게 한 말, 류심환이 불혼에게 들어 속혼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게 만든 바로 그 말.

 

 

“천상천… 이로써 한 발 더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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